인생의 말기에서 만난 친구이다. 친구라기보다는 10여 년 인생 후배. 
이제 막 시작한 비컴 멤버로 그녀와 세 번째의 아주 짧은 만남이다.  
 선한 모습의 밝고 유난히 키가 큰 그녀!! 그녀는 먼저 다가와 따뜻한 인사를 건넸다.
아직 이름도 닉 네임도 모른다. 잠깐 스칠 수도 있는 그녀와 구태여
인연이라고 엮고 싶은 마음은 그녀의 태도나 말씨가 보석처럼 빛났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느끼는 신선함이었다. 직장의 안식년 기간 동안 열심히 활동하고 싶다는 그녀.
새로운 신세계를 만난 듯, 들뜬 기분이라며 비콤의 활동에 대해서.. 그리고
블로거 활동에 기대가 찬.. 흥분된 모습이었다.

모두들 궁금해했다. 무슨 직장을 다닐까... 학교는 어디를 나왔을까..
그녀의 대답은 농담이 섞인 진담으로 웃으며 " 너무 알려 하지 마세요, 다쳐요"
이 한 마디에 난 반해버렸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는 끈질기게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궁금증을 더 하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양보하기 않았다.
아마 그녀는  자신의 대답이 어떤 멤버들에게는
소외감을 느끼고 마음이 위축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따뜻한 배려심인가. 그녀의 태도는 그녀를 다이어몬드수저 처럼  돋보이게 했다.

우리는 여러 환경에서 태어났고 자라왔고 이제는 시니어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금수저로 태어나 아무런 어려움 없이 넉넉한 사랑을 받고 지원도 받으며
여기까지 온 사람들도 있지만 반면 혹독한 환경, 흙 수저로 태어난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자살을 경험할 정도로 밑바닥 생활로 버텨온 시니어들도 그들의 의지로  멋진 시니어로
당당하게 선 그들을 보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특별한 환경은 지금까지도 
셀 수도 없이 많은 기적 같은 실화들이 살아있는 곳이다. 

우리 SBCK(한국 시니어 블로거) 그룹도 마찬가지다.
가끔 자신이 금수저임을 유난히 표현하는 사람들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 나름의 공통 언어에 섞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때, 흑수저였던 사람들은
갑자기  외계인이 된 것처럼 말을 잃어버린다. 그들이 거닐었고 만나고 즐겼던 시간들 속에서
자신들은 무엇을 했을까? 어쩌면  자괴감으로 그들과 이야기를 섞을 만한 스토리가
전무하다는 것에 대단히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들의 고되었던 삶이 불행했을까?

치열하게 살았던 그들은 작은 라듸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속극에 매료되었고
한밤의 음악편지에 정성껏 엽서를 보내기도 하면서 행복했을 것이다.
나이나 배경에 관계없이 가진 것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멤버가 된 분들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멋진 블로거의 모임인 이곳에서 서로 가진 재능으로 빛낼 수 있는 곳이다.
어떤 분들은 빠른 속도로.. 혹은 거북이걸음으로라도
소속감을 느끼며 행복해하는 멤버들이다.
혹여.. 자신의 금수저 특유의 말들이나 행동들로  
 슬프게 하는 분들이 있을까 조심스러워해야 한다.
 





  

  






 
1970-01-01 09:00 2018-05-0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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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섬이 강화도 외포리에서 떠난 민통선 안의 볼음도섬)

 

형부가 15살 나이였던 1950년에 아버지와 함께 잠시 피난했던 곳인 볼음도에 가야한다고

매일 주문처럼 외우셨다.  민통선 안에 위치한 볼음도는 강화도의 외포리 선착장에서만 떠난다.

하루 두 차례.  80대 형부의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드리기 여행이었다.

형부는 섬으로 피난하면서 넉넉잡아 3개월이면 전쟁이 끝날 줄 믿으셨단다.

아버지는 장남인 형부만을 데리고 피난을 했던 것이다. 

그곳에서 소나무껍질로 죽을 먹으며 어머니가 계신 집에 돌아가기를 기다렸지만

고향인 연천에 사셨던 어머니와 동생들은 지금까지 만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늘 한이되어 연천을 바라볼 수 있는 볼음도에는 꼭 가야한다고 하셨다.

난 형부가 외우시는 그 곳, 볼음도 여행을 계획하며 형부의 소원을 들어줘야했다.

주로 인터넷을 통해 자료와 정보를 수집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떠난 여행!  볼음도에 도착하면서 시작된 형부의 집착은 대단하였다.

당신이 살았던 동네와 머물렀던 집을 꼭 찾아야한다는 것이다. 형부가 또렸이 기억한다는

소나무가 있던 해변, 두 개의 우물가, 마마로 얼굴에 온통 마마자국이 가득했던 주인집 딸,

동네할아버지가 바람피우다가 곤욕을 치뤘다는 집, 아침이면 우물가에서

여인네들이 보리를 닦던 그 풍경, 광산이 있던 곳, 매일 오르던 뒷산,

이 곳을 찾기 위해 온통 볼음도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민박집 주인에게 묻고 또 묻고...

그분에게 부탁해 그 동네에서 오래 살았다는 할아버지도 만나보고...

마침 주문한 조개를 갖고 오신 할아버지께서 당시의 그 동네에서 사셨다는 말에

형부가 어찌니 흥분을 하시는지...

 

이분이 65년전 그 당시의 일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계셨다. 우리는 이분을 따라 형부가 살던 집터를

찾았으며 우물터도 찾았다. 그 분을 따라 형부가 살았던 집터를 보며 형부는 그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낡은 기둥이라도 흔적이 남아있기를 바랐던 그곳은 밭이 되어 있었고 뒷 동산은 통제구역으로

오르지도 못했다. 마음이 몹시도 허전해 하셨다. 65년동안 바라던 그 모습은 흔적조차 없다는 것을

형부의 집념은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지금의 민통선안의 집들은

정부에서 무상으로 지어준 것이라고 했다.

 볼음도는 바다물이 빠지면 끝없이 펼쳐진 갯벌의 크기가 세계 최대라고 한다.

조개를 캐기위해 경운기를 타고 2시간이상, 8km 를 가야한다고 해서 우린 포기했다. 

이곳에 서식하는 저어새는 볼음도의 보물이라고 한다.

 

3000명 가까이 있었던 주민들은 거의다 떠난 볼음도. 학생들은 물론

아기울음 소리도 잊혀진 볼음도.가끔씩 지팡이에 의지한 노인들 만 남아있는 곳.

 실망과 허전함을 지니고 바닷가를 거닐뿐이었다.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는 볼음도에는 산에는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형부는 산꼭대기로 올라 고향인 연천땅을 보고싶어해 무리해서 올라갔다가

총을 든 해병이 뛰어나오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섬 주민외에 외부인들은 출입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있었다.

몆명이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가는지 해병이 직접 조사하고 있었다.

 

260명 정도가 사는 볼음도.  하지만 만 3일동안 어디를 가도 사람들을 만나볼 수가 없었다.

정말 조용했다. 땅은 기름져 고추나 가지들을 키우는 밭이 많았다.

산은 밀림처럼 숲으로 가득했다. 민박집에서는 원하면 조개구이나

매운탕으로 식사준비도 해주며 4인용 민박은 5만원이다.

 

적막한 섬, 해변에서는 발가벗고도 수영을 맘껏할 수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고 깨끗했다. 힐링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이다.   

 

오는 길, 형부의 집착은 또 교동도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 섬은 걸어서도 연천에 갈 수 있는 북한과 가까운 곳이다.

형부는 겨울에 바닷물이 얼면 연천에서 걸어서 교동도로 나왔으며 그곳에서

다시 배를타고 마포나루에 내려 지금의 경희궁자리인 서울중학교에 다녔다는 것이다.

비가 부슬거리며 내렸다.  교동도는 강화도에서 13 km 에 있으며 꼭 일년전에

다리가 개통이 되어 쉽게 갈 수 있었지만

이곳도 입구부터 철저하게 검색하는 모습의 해병대원들이 있었다.

북한쪽을 볼 수 있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만큼 끝까지 갔다.

 

철책이 쳐진 사이로 북한을 한없이 바라보는 형부의 쓸쓸한 모습.

마지막을 이렇게 정리하는 모습인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였다.

 

1970-01-01 09:00 2015-09-1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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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p 에 달하는 이 책을 소개 받은 건 유어스테이지에 누군가 올린 책 사진을 보았고
그 내용이 PCT( Pacific Crest Trail) 을 3개월동안 하이킹한 여인의 이야기라는 기사를 본 순간 난
교보문고로 달려가 14,800 원을 주고 이 책을 샀다.
 
우선 책의 분량이 만만치 않게 두텁다는 것과 그 책 속에는 한장의 사진도 실리지 않은
논픽션 의 글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읽는 동안 내 가슴이 벌렁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으니까.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카나다국경까지의 이 길이 완성되기는 1992년.
총 길이가 4285 km 이고 수시로 독사와 여우와 곰을 만나야 했던 길.
사막과 눈이 쌓인 4000km 가 넘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어야하는 이 trail 을
26살의 젊은 여자가 혼자서 걸었던 이야기에 왜 내가 그토록 흥분이 됐을까?
 
내가 LA 지역의 사막인 Phelan 에 있을때, 페루에 살고있는 사촌동생이 내가 사는 지역에 왔었다. 
거의 9년전이다. 동생과 함께 누드온천이 있는 곳을 꼭 가보고 싶었다.
딥 크릭(Deep Creek)에 솟는 천연 온천으로 차가운 계곡물에 더운 온천수가 넘쳐흐르는 곳으로
보웬 랜치 (Bowen Ranch)에 주차를 하고 계곡으로 1시간 정도 내려가야 하는 곳.
바람이 몹시 불던날, 동생을 데리고 산길을 오르니 마침 그곳이
날씨 때문에 잠시 동안 닫았다고해서 아쉽게 그냥 돌아온 곳이다.
바로 그곳이 PCT 가 지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마침 PCT 를 걷다가 쉬어가기 위해 들렸다는 40대의 미국인 남자를 만났다.
처음에 힘겹게 산에서 내려오는 허름한 모습의 한 남자를 보고는 떠돌이 homeless 인줄 알았다.
커다란 등짐을 내려놓고 배가 고픈지 배낭에서 dried food를 꺼내 먹고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가져간
과일을 주고 싶다고 했더니 pay 를 하겠다고 했다.
가져온 과일이 많다고 원하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고마워하며 얼마나 달고 맛있게 먹던지... 그러면서 그 사람은 자기가 걷고 있는 길이 PCT 이며
6개월을 계획하고 있다면서 지도와 장비등을 보여주었다.
이 PCT 를 걷기 위해 4년간 훈련과 비용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자기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일을 한다면서
6개월의 삶이 이 등짐에 다 들어있다는 말을 들으며 난 아직도 난 내가
가진것이 너무 많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길(PCT) 을 사투를 벌리며 걸었던 26살의 여자가 과감없이
그 산길을  걷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과 바램과 욕망을 과감없이 보여주며
6개의 발톱이 빠지도록 처절하게 걸었던 이야기들을 잔잔하게 이야기하듯이 쓴 이 책을
읽으며 난 10년전에 온천에서 만난 그 남자가 떠 올랐다.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는
“94일 동안 PCT를 걷는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영적인 여정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힘들 때 자연에 기대는 것처럼 나도 그 길에 기댔고,
갈 곳을 잃고 절망하고 있을 때 그 길은 나에게 문자 그대로 한걸음 한 걸음 내딛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고 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난 계속 내가 40대만 되었어도... 아니 50대만 되었어도 꼭 한번 걸어봤을텐데....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 책이 나온건 2012년인데 20여개국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다고한다.
방황하는 이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 내 두 딸들에게도 강력하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올 1월에 같은 제목으로 영화로도 상영되었다.
책을 읽은후에 영화를 보았지만 나의 경우에 책보다는 감흥이 덜하였다.
 
한국에서는 남자들은 군대를 다녀와야지 사람이 된다고 하는데 아마 미국에서는
젊은이들이 이런 야생에서의 목숨을 건 치열한 도전을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스스로 결정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들을 정리하며  걷기 전과 후의 삶의 방향이
엄청나게 변화되는 걸 경험하고 있은 것 같다.
이렇게 건강한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아직도 지구가 숨쉬고 살아있는 것은 아닐지.... 
 
언젠가 미국을 다시 방문하게 되면 두 딸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Bowen Ranch안의 야외온천을 꼭 가봐야겠다.
그리고 PCT 의 일부분에게라도 입맞춤하고싶다.
5월에는 그곳, 사막의 산에는 형형색색의 야생화가 온 산을 뒤덮는 곳,
그 길을 걷다가 방울뱀을 만났던 일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1970-01-01 09:00 2015-06-1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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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단테 2015-06-17 12:44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나이 스물여섯에 이렇게 멀고 먼 장정을 시작 할 수 있는 세상만으로도 감동입니다.
    발톱이 빠지면서까지 걸으며
    저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인생에서
    무엇을 찾았을까요?

    지금은 휠씬 성숙한 삶을 누리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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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에서 라스베가스 가는 쪽으로 80마일정도 가다보면 138번 도로를 지나게 되는데 그 도로를 따라 4000FT 의

지역에 phelan 이라는 동네가 있다. 이 정도의 고도는 사람이 장수에 아주 적당한 높이 이며 

사막동네로 은퇴후에 삶을 보내기에 적당한 장소로 알려져있는 곳이다.

집값이 상대적으로 싼 곳이고 넓은 땅에( 6000평) 집이 한 채씩 지어져있는 한가한 동네이다.

3년을 그녀와 나는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그녀는 1997년에 phelan 지역에 30여 에이커( 약 6만평)의 땅에

집이 세개가 있는 농장을 사서 소나무를 심고 사과와 대추농장도 만들었다. 

지하수도 풍부해 물걱정도 없었다고 한다.

 

이 친구부부는 30여년전에 이민와서 택사스주에서 장사를 하면서 돈도 많이 모았단다.

하지만 어느날 남편의 심각한 병을 발견하고 장사를 접고 phelan지역으로 옮겼으며 남편은 그 때부터 그곳에

소나무를 심기 시작해 지금은 소나무 숲이 볼만하게 자랐다.

그곳에서 건강도 찾고 제 2의 삶을 펼치리라 부푼 꿈을 가졌었다. 

사과나무 꽃이 필때면 아름다운 농장의 모습에 행복해 하기도 하였다.

2013년, 내가 리마에 머물고 있을 때, 그 부부는 한달동안 내가 머물고 있는 아파트의 옆집을 빌려 

같이 여행을 다니기도 했었다. 그 때도 남편은 매일 주사를 꼭 맞아야했다.

  (리마 바닷가 벤취에 앉아 있는 친구 부부의 모습이 아름다워 찍었다)

 

며칠전 그 친구는 한국에 다니러 왔다고 하며 우리집을 와보고 싶어했다.

내 작은 아파트(16평)를 둘러보며 이젠 다 정리할 때가 온 것 같다고 한다.

발을 뻗을 수 있을 정도의 이 아파트 크기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미국의 농장을 이젠 감당하기 힘들어 졌다고 한다. 그녀의 몸도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그래도 고향땅을 밟으니머리도 안아프고 살 것 같다고 한다.

남편도 더 이상 주사로 당 조정이 안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라던 손녀딸이 와도 이젠 귀찮아 졌단다. 그냥 조용한 곳에 머물 수만 있으면 좋겠단다.

바리 바리 사서 나르던 선물 보따리가 이젠 들을 힘도 없어 맨몸으로 다닌다고 했다.

그녀는 도리어 내가 부럽다고 했다. 두 자녀에게 집착했던 마음도 이젠 다 내려놓고 나처럼

홀가분하게 살고 싶단다. 건강이 안좋으니 좋은 것이 하나도 눈에 보이지가 않는단다.

 

남편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농장을 처분하기로 맘먹고 있단다.

정성드려 가꾼 소나무들과 과일농장을 일구며 그곳에서 뼈를 묻고자 했던 계획을

수정해야겠다고 했다. 건강이 좋지 않으니 어머니가(87세) 계신 고향에만 돌아오고 싶단다.

나이가 들었어도 힘없고 늙으신 어머니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소박한 아파트를 둘러보며 재활용으로 버려진 가구들을 사용한다고 하니 놀라는 표정이다.

식탁도, 의자도 다 공짜로 받은 선물처럼 쓰고 있다고 하니 오히려 부러워 하는 눈빛이다.

그래! 그렇게 살아야 돼! 이렇게 아직 새것인데 버려진 것이면 어때?

라며 이제부터라도 웅켜쥐고 싶었던 것들을 자유롭게 버리며 살고 싶단다.

그렇다, 난 어제 이 친구와 냉면을 해 먹으며 우리나이에 이제부터라도

소박하고. 단순하게 살아야할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었다.

조금이라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을 때,주변을 정리해야한다.

일년에 한번도 안입은 옷들은 가차없이 나누어 주며 내 짐을 가볍게 해야한다.

언제든지 훌 훌 떠날 수 있어야한다. 짐을 정리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날이었다.

 

 (버려진 가구들이지만 하얀색을 맞춰 가져와 쓰고 있다)

 

 

1970-01-01 09:00 2015-06-1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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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단테 2015-06-17 12:49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진정 참다운 삶이 무엇인가 돌아보게 합니다.
    건강할 때 부귀영화도 있는 것이겠죠?

    점점 나이들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져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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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면 까마득한 50년 전의 눈이 오던 그 날로 돌아가곤한다 .
단간방에 우리 네 형제는 오손도손 살았었다.
언니와 오빠의 부지런함 덕분에 난 경제적인 책임을 회피한채 막내로서의 
가난한 자유를 누리곤 했었다.
겨울이 되면 연탄아궁이를 한껏 밀어 넣어도 겨우 한사람 몫의 아랫몫만 따뜻할뿐이었다. 
늦은 시간에 돌아오는 막내의 자리로 남겨놓고는 언제나 그 자리에 내 이불을
깔아 놓앗었다. 눈이나 비가오는 날이면 언니는 장화를 들고 버스정류장에서
야간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는 막내를 기다리곤 했다.
난 내가 막내란 이유로 당연히 받을 만한 것처럼 생각했다.
 
눈이 펑펑내린 새벽이었나보다.
언제나 일찍 일어나는 언니는 마당에 가득 내린 눈을 쓸다가 막내가 보면
분명히 펄쩍 뛰며 좋아할 것을 알고는 곤히 자는 내 귀에 속삭였다.
"막내야! 눈이 엄청왔어. 언니랑 같이 눈을 쓸까?"
난 아직도 동이 트지않은 어둑한 겨울 새벽! 따뜻한 잠자리에서 나오기 싫었지만
언니를 기쁘게 하고 싶었다. 너무 기쁘다는 듯이 목소리도 한껏 높히며 "정말?"
그리고는 언니가 짠 두터운 쉐타를 입고는 마당으로 나갔다.
이렇게 언니와 난 열심히 눈을 쓸어 뫃앗다. 언니는 수북히 쌓인 눈처럼 다음해의 건강과
행복한 마음이 늘 막내와 가족에게 가득하길 빌었었다. 
                                                                20 살과 30살의 자매
 
며칠전 강원도의 전원주택을 다녀왔다.
마침 아름답게 조경이 되어있는 마당 가득히 눈이 내렸다.
난 다시 50년 전의 옛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치웠다.
당시 노처녀였던 언니는 늦어지는 결혼에 얼마나 걱정을했을까?
자신의 결혼보다도 동생들의 앞날을 걱정했던 언니!
 
넓은 마당의 눈을 쓸어 뫃으며 50여년전에 동생들에게 빌어준 복을
언니에게 다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즐거운 노동을 하였다.  
영하로 뚝 덜어진 날씨에도 송글 송글 땀이 배어나온다.
 
지금은 허리가 많이 굽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언니,
그동안 동생들에게 퍼주기만 했던 언니,
이제사 고향에 돌아와 언니의 잔 신부름을 마다않는 막내에게 
찐한 자매의 情 을 이렇게 말로 표시를 한다. " 난  네가 없으면 안되" 
 
보름정도 남아있는 2014년을 정리해야겠다.
고향에 돌아온 2014년은 어느해 보다도 바쁘고 값지게 보낸 한 해 였다.
새로운 우정에 감동했으며 작은 친절로 감동을 주기도 했다.
젊음은 멀리 가버렸지만 아직도 나에겐 이렇게 눈을 치울 정도의 힘이 남아 있음에 감사한다.
 
또한 서운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의 찌꺼기가 치워지지 않은 눈처럼
어느 한구석에 남아있다면, 눈을 쓸듯이 다 쓸어버려야겠다.
2015년은 가볍게 비어진  마음으로  주름진 손이지만 나의 따뜻한 손 길이
좀 더 많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기를 바랄뿐이다.
 
 
 
 
 
  
 
  
 
1970-01-01 09:00 2014-12-1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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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어스테이지의 이벤트의 선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티켓이 내 스마트폰속으로
배달되었다. 남편의 병수발로 힘들어하는 친구와함께 불광동의 CGV 의 극장을 찾았다.
다큐영화로 98세에 돌아가신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잔잔히 가슴에 전해지는
영화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울면서 울면서 할머니는 이렇게 통곡하셨다.
" 영감, 이젠 누가 내손을 잡아주나....."
일부러 꾸며낸 연출이 아니고  그분들의 일상을 마음으로 역어낸 감동 스토리였다.
76년을 함께한 노부부는 어디를 가던 손을 꼭 잡고 다니신다.
서로에 대한 존경과 애틋한 사랑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분들의 모습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자신들을 돌아보게하였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두런 두런 들리는 소리는
" 바로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이야!"
눈이 싸이면  눈을 던져 장난을 하고
떨어진 낙엽을 쓸다가 서로에게 장난을 치며  단짝처럼 놀이도 잘하셨다.
76년을 그렇게 애틋한 모습으로 사랑하셨으며
화장실 가는길이 무서운 아내를 위해 문밖에서 노래를 불러주시던 할아버지의
구수한 노랫가락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생긴 티켓 두 장은 힘들어하는 친구에겐 다시한번 
남편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게 한 것 같았다.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아프더라도 내 옆에 있어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건지....
진한 감동으로 눈물지을 수 밖에 없었던 이 영화는 오랫동안 따듯하게
가슴에 남아있을 것 같다.  
 
1970-01-01 09:00 2014-12-05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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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 식용쥐는 쿠스코의 산간마을이나 변두리 빈민가의 부엌에서 기르고 있다.
그들의 단백질 공급원이 되고 있다는  꾸이(식용쥐의 페루인들이 부르는 말)는 페루를
대표하는 음식가운데 하나이다.
지금은 꾸이를 전문으로 요리하는 식당에서만 먹을 수 있으며 마치 한국의 보신탕처럼

페루인들에게 보양식처럼 즐겨먹는 페루를 대표하는 음식이 되어있다.

 

4계절을 리마에서 머물며  벼르기만 했던 꾸이요리 전문식당을 보고는 무조건 들어갔다.

한국인들에게는 피하는 음식이며 선듯 먹게되는 음식은 아니라고 했다.

반마리를 튀겨주는데 25솔(만원) 다른음식에 비해 무척 비싼편이며

배부르게 먹는음식이 아니고 맛을 보는 차원의 음식이다.

 

꾸이의 발톱과 이빨까지 그대로 튀겨나오기 때문에 제대로 꾸이를 먹는 기분이었다.

맛은 닭이 아주 맛있고 촉촉하게 튀겨진 것과 비슷한 맛이었다.

내가 먹는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앞의 손님에게 부탁해 찍은 모습...


나라마다 음식문화가 다른건 당연하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하는 여러나라들의 전통음식도
있지만 여행의 진정한 의미는 그들의 문화속으로 잠간이지만 잠겨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음식이라도 그들의 전통음식에 거부감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여행자들은 거부하는 음식이란다.
 

  

지금 한국여행객들에게 페루는 꼭 가보고 싶은 나라이며 언젠가는 가보리라..꿈을 갖는 나라이기도 하다.

멀고 먼 나라이며 아주 다른문화권의 나라인 페루는 아직도 가난한 나라이기도 하다.

어린소녀들이 학교대신 돈을 벌기위해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다.

10대 초반의 이 어린 소녀들은 공원에 조잡한 물건들을 펴놓고 외국인들에게 매달리며

사정을 하듯이 사달라고 조른다. 

하루에 5솔(1500원)을 벌면 만족한다는 이 소녀들...

이소녀들이 사는 곳은 물도 안나오는 열악한 환경의 산동네이며 잘 씻지도 못한 듯했다.

 

난 한국에 돌아와서 새로 살림을 장만하며 아파트내에 버려진 가구들을 대부분

사용하고 있다. 버려진 멀쩡한 옷이며 신발들을 볼 때마다 페루의 이 소녀들에게 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고민도 했었다.

여행을 하며 값지게 얻은 교훈은 아직도 도움이 필요로하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아직도 너무 많은데 어떻게 욕심을 더 낼 수 있을까?

 

 

 

1970-01-01 09:00 2014-12-0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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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이 오던 날, 서울에 볼일이 있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따뜻한 아파트의 온기는 
집을 나서자마자   매서운 추위로 온 몸을 얼려버리는 것 같았다.
밤새 내린 눈이 가득 쌓였다. 밤을 새며 경비하시던 분이 눈길을 내고 계셨다.
이렇게 우리 주위에는 주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시는 일을 묵묵히하시는 분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택배분들.. 새벽운동을 나갈 때 면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신문배달하시는 아주머니. 우편물을 배달하시는 분들..등등.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12월엔 1년 내내 수고 하셔던 이분들에게도
감사를 표시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페루의 리마에 살면서 난 가끔 아파트 경비원들에게 한국의 호빵이나 모찌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12월이 되면 주민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작은 선물로 그들의
수고에 보답한다. 작은 돈(20솔) 7000원정도를 봉투에 넣어 전달하기도 하며 
12월을 상징하는 커다란 과일빵을 주기도 한다.
그곳은 12월이 여름이기때문에 동생들은 티 셔쓰 나 부인들을 위해 옷을 주기도 하였다.
 
미국에서는 12월이 되면 좀 더 철저하게 그런분들에게 선물하는 습관이 배여있다.
자주 다니던 미용실의 뒷일을 하시는 분들, 매주 쓰레기를 수거해가는 분들,
마켓에서 허드렛 일을 하는 젊은이들에게도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을 보곤한다.
또한 단골 주유소나 식당의 종업원들에게도 12월의 감사 선물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곤했다.   
 
난 오늘, 통밀로 머핀을 만들었다. 해바라기씨등 여러가지 견과류와 함께 바나나를 으께어 넣었다.
버터 대신에 올리브유를 넣었고 말린사과도 넣었다. 준비하는데 10분이며 굽는데 20분이면 
맛있는 머핀이 12개가 나온다.
30 분을 투자해서 1년 내내 경비일뿐만 아니라 청소와 쓰레기 분리까지 하시는 
이분들에게 작은 정성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얼마전 뉴스에서 주민의 폭언으로 숨진 경비원의 기사를 읽으며 우리사회가
이렇게 삭막해져가는 걸 막을 수는 없는것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2014년을 행복하게 마무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남을 의식하는 두툼한 봉투보다도 작지만 내 주위에서 우리를 위해 수고하며
땀 흘리는 분들에게 보여주는 작은 관심과 고맙다는 미소는 사회를 좀더 따뜻하고 
생기있게 만들 것같다. 
오븐에서 금방 꺼낸 따뜻한 머핀을 손에 감싸쥐며 좋아하시는 경비원선생님!
대부분 은퇴를 하신 6,70대의 분들이시다.
수고하신다는 한마디 만이라도 인색하지 말아야겠다. 특이 이달에는....
1970-01-01 09:00 2014-12-04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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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딸 가족이 미국의 Thanks-giving  Day 주간의 휴가를 이용해 먼길을 왔다.
입양한 아들과 함께 온 것이다.
새벽 6 시에 도착한다고 하여 전날 공항으로 갔다.
공항 스파에서 하룻밤을 보낼 계획을 세웠다. 공항의 스파시설은 깨끗하고
우아하기까지 했다.
 
다음날, 게이트를 나오는 딸 부부와 함께 손주인 아담은 팔을 벌리며
"할머니" 소리를 치며 달려와 안긴다.
그동안 한국말을 배웠다는 이 귀여운 손주는
"할머니" "고맙습니다" 단 두 단어지만 열심히 불러주었다. 
페루의 리마에서 만나고 1년만에 만나는 사랑하는 가족이다.
그새 손주는 말도 늘고 행동도 더 활동적이 되었다. 
집에 도착하자 아담은  할머니에게 줄 선물을 준비한 손주는 할머니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어 아빠를 졸랐다.
 
정성스럽게 포장한 선물은 제법 크기가 컸다.
무엇일까? 무척 궁금하였다.
선물은 아담이 그림을 그리는 친할머니의 도움으로 유화물감으로 그린 이 그림이었다.
  마치 피카소의? 그림이 연상되는 느낌이다. Adam 이라는 싸인도 그리듯이 넣었다.
뒷면에는 할머니라는 영어글자와  날자,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다시 썼다..
 
감동이었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종이를 썼을까?
미국의 친할머니는 요동치는 5살배기 녀석의 그림작업을 위해 이젤앞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씨름하며 보내셨을까?
아빠는 이 그림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 패널을 짜고 마무리하는 작업으로 
상당한 시간을 보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완성한 손주의 그림선물이 나에게 왔다.
난 나의 작은 공간에 어디에 걸어야할까...한참을 시도해보며 컴퓨터 책상위에 걸었다.
 
딸이 갖고온 값비싼 화장품  보다도  손주의 그림선물은  
무엇보다도 정성이 가득한 이 선물은 어떤 값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12월이 시작하는 오늘, 어디서나, 어느나라나... 많은 선물이 오가는 달이다.
선물코너가 붐비기 시작하고 즐겁게, 또는 어쩔 수 없이, 선물을 주고 받는 달이다.
이왕이면 감동과 사랑이 담긴 선물을 준비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미국의 두 딸들이 돌아가는 짐속에 난 내가 직접 마련한 선물로 향주머니를 만들었다.
강원도 여행때 잣나무 숲에서 주운 잣송이를 말려 일일이 잣을 뺐으며 그렇게 모은
잣을 복주머니에 가득 담았다.
잣의 향기가 두 딸의 집 한구석에 걸려 항상 은은한 잣향기가 집안에 배이도록 바랐다.
까지않은 잣송이를 처음본다는 두 딸들, 그리고 잣송이에 밖힌 잣송이가 신기하다는 두 딸들...
 
  이렇게 만족한 선물을 받을 수 있고 또 보낼 수 있어서
  2014년의  마지막 달을 보내면서 많이 행복할 것 같다.
 
 
   
 
 
 
1970-01-01 09:00 2014-12-0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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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강신영-1 2014-12-03 11:06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선물주고 받기 할 일 없어요~~~ 그만큼 각자 따로 알아서 사나 봐요~~선물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하는데....ㅠ

  2. 백순원 2014-12-04 08:14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2014년을 지나면서 마지막 달이 가기전에 고마움의 표시를 하고싶은 분들에겐 고마움의 표시도 하면서 지내야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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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은 모처럼 소 무위도 섬으로 여행을 했었다.

24명의 도보 맴버들과 함께하는 즐거운 여행이었으며 섬 주위를 느리게 걷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섬을 떠나면서 우리는 용유역에서 6시 7분에 떠나는 열차시간에 늦지않게 부지런히 걸었다.

집이 멀어 아침에 일찍 출발한 시간을 계산하니 벌써 12시간이

지나있었다. 난 적당히 피곤했다. 지금부터 집에까지 걸리는 시간은 3시간 반이다.

앉을 수 만 있다면  그 시간을 즐기는 건 문제가 아니다. 전철속에서의 독서는

시간때우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에 늘 책은 비상약처럼 갖고다닌다.

홍대역까지는 편안히 앉을 수가 있었다.

 

그 시간 홍대역은 붐볐다. 평소에는 외면하던 경노석도 아무리 노려보아도 빈자리는 나지않는다.

신도림역에서 내려 다시 1호선으로 갈아타야 했으며 1호선은 더 사람이 많았다.

등에는 배낭을 메고 적당한 자리에 설 자리를 찾았다. 일요일이 어서 나처럼 배낭차림의 등산객들이

대부분이었다. 두 시간을 서 서 가야 할 생각을 하니 내 눈은 앞에 앉아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이에게로 꽂힌다. 평소에는 앉을 자리가 없어도 일부러라도 젊은이 앞에 서지를 앉았다.

책을 펴고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일부러라도 자리를 내어 주고픈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너무 피곤했으며 등짐도 무거웠다.

 

애써 눈길을 피하며 더 열심히 스마트폰에 얼굴을 묻고 있는 젊은이가 날 좀 쳐다봐 주었으면..

그래서 내가 할머니이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다는 걸 알아봐줫으면...

하는 못된 바램으로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그 젊은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에그...쯧쯧!! 페루비안 만도 못한 놈!"

 

그렇다! 우리나라의 60년대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사는 페루인들의 " Lady Fierst" 정신은

어느 선진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1년동안 그곳에 살며 난 주로 버스를 타고 다녔다.

큰 버스도 있지만  도로사정이 안좋은 그곳에선 옛날의 한국의 합승버스처럼  작은 버스도 

구부리고 서야 할 정도로  초 만원으로 싣고 달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여자들이 타면 앉아있던 남자승객들은 어김없이 자리를 여자승객에게 양보를 한다.

할머니가 아니라도 젊은여자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아직도 차장이 돈을 받는 그곳에서 혹시라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남자승객이 있으면

차장은 호통을 친다. 차장의 그런 말 한마디에 남자들은 꼼찍못하고 양보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난 버스를 타면서 차장에 의해서 자리를 양보받은 적은 없다.

대부분 내가 버스를 타면 남자들은 서로 일어서며 자리를 내어준다.

 

사실 Lady Fierst 의 유래를 알면 충격적인 이야기가 전해온다.

현대에 와서는 여성에 대한 배려(配慮) 이지만 그 유래의 실상은 아주 잔인한 전투 현장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전쟁에서 전투력이 떨어지는 여성을 먼저 위험지역으로 보내서 지뢰밭이 형성되었는가의

위험이 없는지 확인시키기 위해 여자들을 먼저 앞으로 걷게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는 영국의 전설적인 왕인 아서왕시절 원탁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은 기사도 정신을

철저하게 지킬 수 있는 기사들로서 그것이 원탁정신으로 전해져 내려오며

구 중에 예의와 부녀자들과 노약자들에대한 배려심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페루는 300여년동안 스페인의 통치를 받았으며 지금도 곳 곳에 건물이나 종교나 거의 스페인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는 남미중의 한 나라이다.

우리나라보다 먼저 서양의 문화가 들어왔기때문에 아직도 그 당시의 관습들은 그들의 생활에 깊이

뿌리내려 페루비안의 정신과 관습에서 서양의 기사도 정신이 살아있는 것 같다.

 

반면 한국은 조선500년동안 유교문화권에 젖어 있었으며 남존여비 사상과 내외법을 더욱 강화시켜

여성차별을 제도화한 그 문화의 여파는 세월이 가도 그리 쉽게 변화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곳곳에서 뿌리내려져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는 페루비안들의 투철한 Lady First 의

기사도 정신이 그 날은 정말 부러웠다.

 

(사진은 페루의 버스를 타기위해 몰려든 손님사이에 끼어 찍은 사진.

줄을 서는 질서는 아직 페루에선 찾기 힘들다.)

 
1970-01-01 09:00 2014-11-0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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