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월성

 

아는 만큼 보인다. 고 했다. 그러니 아는 만큼 쓸 수도 있고, 말 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많이 알 수 있을까? 가 문제가 된다. 매사에 관심을 쏟고 신문이나 잡지도 열심히 보고 라디오와 텔레비죤도 자주 보며 많은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는 등 자신의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것이라면 부지런히 보고 듣고 보며 많은 사람들과 대화도 자주 나누는 등 자신의 견문을 넓히는 일이라면 부지런히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고 찾아다녀야 할 것이다. 그때 가서야 본인의 무지를 벗겨낼 수 있을 것이다.

수필가는 일상의 평범한 것들도 곧이곧대로 노래하지 않고 뒤집고 부풀리고 변형시켜서 더더욱 새롭게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한다. 수필가라면 이런 자세를 갖고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해 봐야한다.

 "아찌 저기 기차가 와요." 제목이 가져다주는 신선감은 작품을 읽지 않아도 청순한 소녀가 생전 처음 눈에 들어오는 기차를 보고 아저씨에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쳐대는 소리로 우리 가슴에 닥아 온다. 장난감 기차만 보았던 민숙이다. 기차는 손을 흔들어 주는 어린이들을 뒤로 하고 엄마 찾는 송아지와 푸른 나무들을 뒤로 하고 힘차게 달려 왔다. 달리는 기차는 민숙이의 꿈을 펴 올리는 기구가 된다. 

민숙이는 시골에 살아서 드물게 오는 자동차일망정 자동차가 지나가면 길아레 논두렁으로 피난 가고 피난 갈 곳이라도 없으면 자동차가 내 뿜는 흙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 써서 살색 나는 화장품을 얼굴에 듬뿍 바른 모습이 된다. 자동차 먼지를 피해 자동차 길 아래 논두렁에 내려 왔을 때, 논두랑에 고란이 새끼가 샛별 같은 눈동자를 굴리고 풀 속에 앉아 있었다. 얼른 고라니 어린 새끼를 껴 앉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라니 새끼가  민숙이 손가락을 자꾸 빨아 배가 고파 젖을 달라는 것으로 알고  동생이 먹는 젖병에 우유를 타서 젖병을 고라니 입에 넣고 우유를 먹였다. 이후로는 고라니 새끼가 민숙이만 따라다녔다. 엄마가 집에 와서 고라니 를 보고 얼른 있던 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해서  "싫어 고라니 하고  살 거야" 때를 써봤지만 "안 돼 고라니가 죽어," 해서 울면서 고라니 새끼를 있었던 논두렁 풀 숲속에 갖다 놓았다. 이 수필을 읽는 사람들이 민숙이와 같이 흙먼지를 흠뻑 뒤집어쓰는 시골길을 걷게 되고 새끼고란이를 안아 보게 된다. 민숙 엄마는 짜장면 한 그릇도 돈이 아까워 먹지 못 하고 국수 한 그릇을 시켜 먹고 남편이 짜장면을 먹으면 밖에서 남편이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먹도록 서서 기다리시는 어머니 이었다. 이 대목 한 줄로 엄마가 얼마나 생활력이 강한 가를 적라라하게 보여 준다.

민숙은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같이 산다. 40대의 민숙에게 70대의 노인이 추파를 건네 오면 나는 갤러리를 갖고 싶어요!” 하면 노인네가 뒤로 벌렁 자빠진다. 재치 있고 계산 된 수치로 상대방의 의지를 한 번에 꺾어 보인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스스로 적은 삶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살아간다.

어린 시절에 동경하던 아저씨에게 아찌 저기 기차가 와요.”했던 곰살스런 추억을 되뇌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시어처럼 우리의 가슴속을 파고드는 말로 생을 일구어 간다.

조 복수 시인이자 수필가에게 대성의 문운이 깃들기를 바란다.

 

    

1970-01-01 09:00 2018-11-1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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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깔스런 수필 쓰기
    
이 월성
    
  멋진 착상을 어디에서 가져 올까?
    
    
 수필을  쓰려면 우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부터 다시 음미해 보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밥 먹고 공부하고 잠자는 것은 통상적으로 수필재료가 될 수 없다. 비근한 예로 우리 측근이 쓴 어느 장편소설에는 직원들이 밥 먹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고 농촌에서 밭에서 풀 뽑고 밭을 가는 장면이 무수히 나온다. 떡 만드는 공장이 있는데 떡을 만드는 작업이 수없이 반복하여 나온다. 독자들이 금방 지루하게 느끼게 된다.
개가 사람을 물었다. 라고 쓰면 수필이 되기 어렵다. 사람이 개를 물었다. 라고 써야 독자들의 호감을 살 수 있다.
조 복수 발행인의 수필에서는 할아버지가 어린 손녀를 걸망태에 넣고 걸망태를 메고 주막을 찾아가 손주를 걸망태에서 꺼내 놓고 술을 먹이고 안주를 손녀의 조그만 입속에 넣어주고 할아버지도 거나하게 술을 드시고 다시 손녀를 걸망태에 넣고 걸망태를 메고 건드렁 비틀하시며 집으로 돌아오신다.
할아버지의 손녀 사랑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냥 주막에서 할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안주를 씹어 먹었다. 라고 수필을 썼다. 고 생각을 해보고 비교 해 보자. 수필의 맛깔스러움은 여기서 나왔다.
소녀는 학교 가기가 싫었다. 준비물로 크레파스 하나 챙기지 못하고 책가방도 없이 책보자기에 새우젓국물로 누렇게 얼룩지고 새우젓 냄새가 풀풀 나는 흐드러진 책과 공책을 싸가지고 학교에 갔다. 엄마는 농번기라고 학교에 가지 말고 동생들을 집에서 보아라고 했고 집안일로 저녁밥을 짓는 일까지 시켰다이 대목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교를 즐겁게 다녔다. 와 비교하면 어떤 글이 우리에게 정겹게 닥아 올 것인지 알게 된다.
소녀는 학교가기 싫어하는 부잣집 소녀와 같이 학교를 가지 않고 들판에서 같이 놀며 하드 한 개를 사 주어서 얻어먹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 라고 기술했다. 부잣집 소녀가 진주목거리를 주었는데 다른 친구가 진주목거리를 잡아 당겨서 진주목거리가 끊어져 진주알이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소녀는 땅바닥에 굴러 떨어진 진주알들이 피곤해서 잠자는 모습으로 보여 진주알과 함께 땅바닥에 누어 잠을 같이 잤다. 라고 표현했다. 어린이의 발상이랄까 진주알이 땅으로 굴러 떨어진 것을 진주알이 피곤해서 잠자고 있는 모습으로 보았다는 대목이 이 수필의 백미가 된다. 조 복수 발행인이 시인이여서인지 기발한 발상이 독자로 하여금 이 수필에 몰입하게 만드는 마력을 펴냈다.
    
1970-01-01 09:00 2018-11-18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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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병환자를 끌고 병원 문을 두드리듯 슈퍼를 4곳이나 돌아 별도처리용 봉투를 샀다.
    이 월성
 
 우리 집 자하실 방에서 할머니가 이사 간 방에 수세식화장실을 하나 만들고 곰팡이 핀 벽지와 방바닥에 깔았던 비닐장판을 벗겨내고 새 비닐장판을 깔고 페인트칠한 벽들은 새로 페인트칠을 하기로 하고 집수리를 벌렸다.
집을 새로 지으면 10년 감수한다는 말은  지금같이 분업화된 집수리 영역에서 각기 제 할 일들을 전문성이 똑똑 떨어지도록 매끈하게 해 버리는 시대에는 통하지 않는 말이지만 나 같은 80대 노인네들은 개적은 일에도 손수 나서서 일을 크게 만들고 힘은 힘대로 들이고  괴로워한다. 그 예로 벽과 천장에 페인트칠은 내가 했다. 천정에 롤러로 페인트칠을 할 때에는 롤러가 지나가면 페인트 분말이 날려 와 내가 쓴 레이반 안경과 모자와 얼굴에 분칠하듯 페인트가 뿌려 졌다. 기술이 있으면 이 고통을 페인트 기술자들은 슬쩍 넘기는 것 같다. 폐비닐 장판을 걷어내다가 반 토막으로 자르고 대문밖에 내 놓았더니 일주일이 지니도록 이 폐비닐 장판을 가져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 봤더니 동사무소에 가서 폐비닐 장판 처리 쓰레기봉투를 사다가 폐비닐 장판을 잘게 쓸어 담아 놓고 전화해야 가지고 간다고 했다. 동사무소에 가서 폐비닐장판 쓰레기봉투를 팔라고 하니까 슈퍼마켓으로 가서 사라고 했다. 폐비닐 장판을 쓰레기봉투에 넣는 일이 마치 중환자를 끌고 병원마다 돌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슈퍼를 3곳이나 찾아갔는데 쓰레기봉투가 없다고 해서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삼보마트에 가서 폐비닐장판 쓰레기봉투 황색 봉투를 제일 큰 것 하나를 사다가 폐비닐 장판을 담았다. 담고 보니 쓰레기봉투 위로 폐비닐 장판이 튀어나와 이 폐비닐 장판을 봉투에서 다시 꺼내 잘게 조각을 내는 작업을  커터로 잘랐다. 이 모든 일들이 큰 기술을 요하지는 않았으나 80노인에게는 큰 짐이 되었다. 허리도 아파오고 팔에 쥐도 났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빙빙 돌기조차 했다.
1970-01-01 09:00 2018-11-14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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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렸다가 스멀스멀 찾아 온 카메라 가방
    
이 월성
    
좋은문학 시상식이 있어서 지하철 3호선 정발산역 4번 출구로 나와 아람누리 지하 2층 한식 부폐식당에 들렸다. 소박한 한식 부폐집 인데도 손님들이 꽉 차서 빈자리를 찾아 카메라 가방을 내려놓고, 빈 접시를 들고 한식 뷔페를 접시에 담아 시상식에 나온 임원 6명이 맛있게 먹었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동구청 앞으로 가서 경치 좋은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다보니 카메라 가방을 깜빡 잃어버렸다. 무엇보다도 앞이 캄캄해 왔다. 카메라 가방에는 라이카 렌즈가 부착된 루믹스 디지털 카메라 한 대, 쏘니 HD 캠코더 한 대, 카메라 부품등 시가 3백만 원이 넘는 귀중품이 들어 있었다. 돈은 둘째고 루믹스 카메라는 내가 사진을 찍을 때 마다 이 카메라는 히틀러가 만든 라이카 렌즈가 장착 되어 지금까지도 해상도에서 이 카메라를 따라 올 카메라가 없다고 자랑하며 애인처럼 사랑해 왔던 카메라다. 캠코더도 동영상을 찍어놓으면 명도 조절을 스스로 조절하는 진품이었다. 내 재산 목록 일호인 카메라 박스를 시상식에 온 임원들과 쏙닥이다가 어디에다 놓고 나 홀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로부터 역순으로 카메라박스를 찾아 나설 것을 생각하며 발행인에게 카메라 박스를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카메라를 찾으러 왔던 길을 되짚어 우리가 앉았던 벤치며 엘리베이터 와 아람누리 뷔페식당으로 찾아 갔다.
아줌마 내가 카메라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내가 부패를 먹었던 책상을 둘러보아도 카메라 가방이 없어요?”아람누리 한식 뷔페 여주인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 놓아두었다면 없어질 리가 없는데. 혹시 전철에 두고 내린 것이 아닌가요?”
아니에요, 분명 여기까지 카메라 가방을 메고 왔었는데 여기다 두고 나간 것 같아요?”
나는 뜨막한 마음으로 한식 부패 집을 나와 다시 동구청으로 돌아 왔다. 내가 치매에 걸린 것인가? 혹은 미신 같지만 귀신에 홀린 것인가? 머리를 두 손으로 싸안고 동구청 모임 처인 강당으로 돌아 왔더니 발행인이
지금 막 전화가 왔는데, 한식 부폐집에 카메라 가방을 두고 간 사람이 있다.” 빨리 와서 카메라 가방을 찾아가란다.
나는 100미터 경주 선수처럼 단숨에 동구청 2층층대를 뛰어 내려 아람누리 한식 뷔페로 찾아갔다.
농협에 다닌 여직원이
이 가방을 공원 벤치에서 주었다고 여기로 가져 와 맡겼어요,”
고맙습니다.”
여직원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데 내가 돈 10만원을 맡길게 농협 여직원에게 사례금으로 주세요,”
하였더니 부패주인 아주머니가 손 사례를 틀면서 농협 여직원이 받지를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돈을 받지 않았다. 카메라 가방이 주인을 잃고 얼마나 당황했을까? 생각하면 카메라 가방을 잃고 기적같이 되찾은 일이 꿈만 같았다.
 
1970-01-01 09:00 2018-11-10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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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이 중병 심폐 소생술 산소호흡, 링거 놔 주세요,
    
이 월성
    
배운 것이 칠장이라 단독주택인 우리 집 현관 이층 담벼락 막 장식들이 페인트가 벗겨지고 이끼가 끼고, 꺼멓게 변한 곳을 수성 페인트칠을 하얗게 칠하기로 맘먹고 이층 베란다로 올라가 붓에 페인트를 찍어 발라 꺼멓게 변색된 담벼락 막이 장식들을 칠하였다. 우선 아래층 땅바닥에 떨어지는 페인트를 받을 비닐 막을 쳐 놓고 투명 안경을 쓰고 페인트칠을 할 때 입는 옷을 입었다. 이 옷에는 주머니가 없어서 핸드폰을 위 샤쓰 주머니에 넣고 이층 베란다 낭간에 밖으로 엎드려 변색된 곳에 흰 페인트칠을 하였다. 한참을 열심히 칠을 난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칠하고 있었는데, 앗 불사 핸드폰이 윗샤스 주머니에서 빠져 아래층 땅 바닥에 떨어 졌다. 탕 소리가 나면서 이층 베란다에서 보기에도 핸드폰이 뚜껑은 뚜껑 데로 빳데리는 빳데리데로 핸드폰 몸통은 몸통 데로  제각기 분리되어 퉁겨져 흩어져 있었다.
장갑을 벗고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가 각각으로 분리된 핸드폰에 빳데리를 연결 하고 뚜껑까지 주어서 핸드폰을 재조립하여 놓고 작동을 하여 보았더니 핸드폰이 까맣게 먹통이 되어 전원도 들어오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가서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LG전자 서비스 센터로 달려갔다.
걸어서 10분 거리의 곳이 걸어가는데 1시간은 걸리는 것 같고 오직 핸드폰 만 만지작거리며 걸어갔다.
내손에 묻었던 흰 페인트가 휴대폰에 묻어서 핸드폰에 추상미술품을 그려 놓은 것 같은 휴대폰을 서비스 센터 직원에 내 밀며.
    
페인트 칠 하느라고 휴대폰을 윗샤스 주머니에 넣고 칠하다가 아래층으로 떨어뜨렸는데 먹통이 되었어요. 심폐 소생술, 산소 호흡, 닝겔을 놓아 살려 주세요,”
내가 애절하게 말했더니 LG 전자 직원이 요절하고 웃었다.
    
이것 산지 얼마나 되었어요?”
    
“2달 밖에 안 되었어?”
    
고치는데 30분이 걸리고 수리비가 355백 원 들어가요
    
알겠습니다.”
나는 안도 긴 한숨을 쉬고 커피 자판기에 가서 커피를 뽑아 한 목음 씩 커피를 마셨다.
핸드폰이 생명이 있었다면 얼마나 아팠을까? 측은한 생각이 들고 가엽게 느껴졌다. 주인을 잘못 만나 이층에서 떨어졌으니 가슴마저 쓰려 왔다. 커피를 다 마시고 종이컵을 버리려고 하니 버릴 곳이 없어 여직원에게 커피 담았던 빈 종이컵을 어디에다 버려야 하느냐? 고 물었더니 내가 LG전자에 들어 올 때 했던 말을 듣고 배꼽을 잡았던 기억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로 와서
    
종이컵을 이리 주세요. 종이컵이 잠잘 곳으로 데려다 줄게요.” 하고 내가 핸드폰에 심폐 소생술을 해야 한다. 고 했었던 유머를 되받아 주었다.
마치 하루가 걸리는 것 같은 30분이 지나서 핸드폰이 고쳐졌다. 핸드폰 겉은 내손에서 묻어 말라버린 흰 페인트 자국이 너덜너덜 하지만 신호도 잘 가고 통화도 잘되었다.
핸드폰을 흰 페인트가 묻은 손으로 사람 머리를 쓰다듬어 주듯 쓰다듬어주고 품에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1970-01-01 09:00 2018-11-09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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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도깨비 시장 일화                                                
    
    
    
춘천경찰서 형사 두 명이 춘천 도깨비시장 도로변 입구 군복 옷 수선 가게에서 일하는 재봉사 전 씨 팔목에 수갑을 채운 채로 전 씨를 끌고 내가 앉아 옷가게 장사를 하고 있는 도깨비시장 내 좌판 앞으로 왔다. 전 씨는 구부정한 허리에 고개를 푹 숙이고 나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내 앞으로 끌려 와 덜덜 덜 떨고만 있었다.
    
"너 이놈아! 네놈이 재봉틀을 훔친 놈이지?"
    
형사 한 명이 소리치고 나서 나를 좌판에서 끌어내려 내 팔목에도 수갑을 채웠다.
형사의 눈은 광기가 뻗쳐 빛났다.
    
"무슨 말씀이세요? 난 재봉틀을 훔치지 않고 돈을 주고 샀습니다."
    
나는 어이없어 혀를 차며 말을 했다.
    
"이 도둑놈아! 누구에게 재봉틀 머리 10개를 샀어, 증명해봐!"
    
형사의 음성은 더 커지고 인상이 험악해 졌다.
    
"여기 수첩에 재봉틀 머리 10개를 팔은 사람의 도민증을 보고 적어 논  주소가 있습니다."
    
라고 나는 말하고 수갑을 찬 손으로 내 수첩이 있는 좌판 구석을 가리켰다.
형사가 내가 앉았던 좌판에서 수첩을 찾아 꺼내 왔다.
나는 수첩을 뒤적여 강원도 인제군 용 대리 xx 한 상득 이라 적힌 페이지를 펼쳐 보여 주었다.
형사들은 재봉틀 머리 10개를 팔았던 사람의 주소를 자신들의 수첩에 적었다.
    
"재봉틀 머리 10개를 훔친 놈이 잡힐 때까지 너희 들은 재봉틀 머리를 훔친 도둑놈들이야"
    
하면서 전 씨와 나를 개를 묶어 끌고 가듯이 끌고 춘천 경찰서로 끌고 갔다.
춘천 도깨비 시장 상인들 100여명들이 모두 눈이 동그랗게 되어 경찰서로 잡혀가는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누구 하나 우리를 왜 잡아가느냐? 고 항변 해주는 사람도 없이 나만이
    
"왜 잡아 가느냐? 나는 도둑이 아니다."
    
라고 소리를 쳤지만 산울림으로 돌아오는 메아리같이 내게로 되돌아오는 헛소리로 끝났다.
    
    
    
19538월 램프 불 밝히고 좌판에 앉아있는 밤중에 재봉틀 머리가 10개 있는데 사라고 30대 청년이 내가 있는 춘천 도깨비 시장 한 구석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내게로 와서 말했다.
    
"얼마에 팔겠느냐?"
    
말했더니 한대에 1만원씩 달라고 해서 군복을 수선하고 있는 재봉사 전 씨에게 가서
    
"재봉틀 머리 한 대에 1만원씩에 사면되겠느냐?"
    
고 물었더니 재봉틀 보관 상태가 좋으면 사서 팔면 한 대에 2만원씩은 받고 팔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국산 재봉틀이 없던 때여서 싱거, 자노메, 미쓰부시, 재봉틀은 없어서 팔지 못하는 귀한 상품이었다. 전 씨 손을 빌려 판매처를 확보해 놓고 재봉틀 머리를 사기로 했다나는 재봉틀 머리 10개를 팔러 온 청년에게
    
"이렇게 많은 재봉틀 머리가 어디에서 나왔냐?"
    
고 물었더니
    
"집 한 편 구석에 6.25 때 그리스를 잔뜩 칠해 묻어두었던 것을 캐내 왔다."
    
면서 훔친 물건은 절대로 아니라고 손사래를 차며 말했다. 이렇게 산 재봉틀 머리 10개를 사서 도민증 번호와 주소를 적어 놓고 전 씨가 재봉틀 머리 10개를  팔게 해서 한 대에 만 원씩 도합 10만원을 벌어서 똑 같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다. 조금 깨름직 하기는 했어도 어차피 군수품이든 밀수품이든 사고파는 도깨비 시장이었다.
    
    
형사 실에는 책상과 의자들이 여러 개 있고 창문은 없고 바닥은 콘크리트 바닥이어서 여름인
데도 차가웠다. 나는 큰 책상과 의자를 보면 학교 직원실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직원실에 들어가려면 공연히 두려웠다. 똑같이 형사 실도 두려움이 덮쳐 왔는데 창문마저 없어서 전등을 끄면 캄캄할 것 같았다. 날은 저물어 어둑어둑하게 되었는데도 전 씨와 나는 무릅을 꿀린체로 시멘트 땅바닥에 굴려 앉혀 놓고 형사들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흡사 고문을 당하기라도 할 것만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다.
    
옆방에서는 붙잡혀 온 젊은 여자의 앳된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들려 왔다.
    
아이 이러면 어떻해요? 난 죽어!”
    
가만히 있어 너를 홀딱 벗기고 내가 잡수시면 너를 풀어 줄게, 너 좋고 나좋잖아!”
    
여자아이가 씩씩이는 소리가 크개 들려 왔다. 옆방이 조용해지자
    
    
형사가 나에게로 왔다.
    
"범인을 잡으려는데 여비를 내라고 했다."
    
"얼마냐?"
    
라고 내가 물었더니 수사비가 5만 원이란다.
의자에도 앉지 못하고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있는 우리 둘에게는 범인 수사 여비를 내라는 말에 아무런 저항과 반항도 못하고 나는 주머니에서 5만원을 꺼내 형사에게 주었다. 내가 형사에게 건 낸  돈 5만원은 형사들의 부수입이었다. 형사들의 우악스럽던 태도가  금방 햇솜이불처럼 부드러워졌다.
    
너 주소는? 아버지 이름은? 아버지 직업은?”
    
하고 묻고 있는데
    
"우리 아버지 이름은 이 경화 씨  경기도경 경위"
    
라고 말했더니 쓰던 글씨를 멈추고 머리를 극적 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경기도경의 경위 이 경화 씨는 아니었다.
내가 춘천으로 오기 전까지 하숙을 했었던 집 주인 아저씨 이름이었다. 춘천경찰서로 잡혀 온 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머리를 스쳐간 생각으로 잔머리를 굴려 하숙집 주인을 아버지로 말했다. 형사가 어디로 갔다 30분쯤 뒤에 우리 둘이 무룹을 꿇고 있는 곳으로 돌아오더니 우리들 보고 경찰서 취조실을 나가라고 석방해 주었다. 모르긴 해도 경기도경에 이경화 경위가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우리를 풀어 준 것으로 짐작이 갔다.
    
우리가 춘천 경찰서형사계에서 석방된 다음 날 아침에 순두부 백반 집에서 검사가 나를 찾아와 보자고 한다고 시장 아주머니가 말했다.
내가 검사란 사람에게로 가서 같이 순두부 백반을 먹으면서 춘천경찰서 형사들에게 잡혀가서 형사들이 요구하는 데로 재봉틀 머리를 판 도둑을 잡으라고 수사비 5만원을 주었다고 말했더니
    
저런 죽일 놈들이 있나?”
    
하고 검사란 사람이 혀를 찼다.
    
실오라기라도 잡아서 팔 수 만 있고 장사만 되면 사고파는 춘천 도깨비시장이었다당시 한국동란을 끝내고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밥 먹고 살아 가도록한 도깨비시장이었다. 힘없고 빽 없는 장사꾼들이 형사들을 비롯한 공무원들에게 머슴처럼 착취를 당하고 살아갔다.
돈 없고 일할 자리가 없는 피난민들이 자립하여 살아가도록 마련한 곳이 춘천 도깨비 시장이었다.
1970-01-01 09:00 2016-12-1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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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 출간 수강소감

 

201592일 시니어 파트너스 제6나의 책 출간과정의 교육이 테헤란로 강의실에서 앙코르 스쿨이 열렸다.

수많은 책 출간 강의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나는 시니어 파트너스에서 하는 이 강의와 교보문고에서 시행하는 책 출간 강의도 들었다.

교보문고에서 하는 나만의 책강의에는 제법 많은 수강자가 강의를 들었는데 솔직히 강사들이 하는 강의가 머릿속을 혜집고 들어오지를 않았다.

교보문고 강의중 어떤 강사는

 

우리문단은 1960년대에 죽었다.”

 

고 말하고 책을 많이 읽으라면서 책들을 십여 권 소개 했다.

시니어 파트너스에서 시행한 제6나의 책 출간강의는 수강생이 나까지 전부 4명이었는데 4명이 그 많은 강사들의 열강을 들으며 호강을 누렸다.

내 딴에는 이렇게 수강생이 적으면 앙코르스쿨을 경영하는데 많은 어려움과 많은 적자가 예상되어 마음이 서글퍼졌다.

그러나 수강생이 적다 보니 강의 도중 수강생의 글을 지도하는 방식도 수강생과 강사가 나란히 앉아 개인 지도가 가능해졌다.

김현수 강사는 책을 만드는 두려움에 쌓인 우리 수강생들에게 글쓰기의 두려움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자기 소 개 글을 쓰라고 하면서 글쓰기의 테마를 먼 곳에서 찾지 않고 나에게로 접근시켜 주었다.

예를 들어 내가 이 시니어 파트너스 강의를 주제로 글을 쓰려면 주제에 5가지 곁가지를 쳐서 글을 쓰도록 그림을 그려보라

 

고 했다.

 

글쓰기는 내 글이 베스트 쎌러가 되기를 바라면서 쓰면 글쓰기가 두려워진다.”

 

고 하면서

 

쉬운 테마를 재밌게 전개해 나가자

 

고 했다.

 

수강생 4명의 환호성을 받으면서 수강생들은 김현수 강사가 더 많은 강의를 해주길 바랐는데 교육 스케쥴을 맡은 남 혜선 주간은

 

나로선 어떻게 강의 스케쥴을 바꿀 수 없다.”

고 말해서 수강생 4명이 모두 실망을 했었다.

 

수강생 중에는 칠십대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죽은 아들에 대한 연민을 글로 쓰셨다.

 

이 아주머니가 쓴 글을 들어보면 주제에서 곁가지를 치지 못하고 글이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고만 있었다.

중장년 취업아카데미 강사과정을 같이 수강하시는 칠십대 남자는 인터넷도 잘 하시는 수준급이여서 바다낚시 동영상을 핸드폰에 담아와 어른 키와 같은 바닷고기를 낚아 들고 활달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다낚시의 즐거움을 글로 능숙하게 써 내려갔다.

사십대의 여성은 눈매가 서글 거리는 미모를 갖춘 여자인데 시집을 내겠다고 말하면서 수강을 듣고 있었다.

 

수강 중에 점심시간은 강의실 밖으로 나갔는데 강남 전철역 주변에는 점심시간에 빤짝 음식 도깨비 시장이 벌어졌었다. 토스트. 햄버거. 김밥등 길거리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과 기호품들이 역 출구 주변으로 잠깐 사이에 죽 늘어선 도깨비 시장이 섰다.

전철역 주변에 한식 부페 식당이 있는데 우리 수강생 4명은 이 한식 부페집에서 5 천 원 하는 한식을 따뜻하게 빨리 먹을 수 있었다. 값이 싸고 내가 좋아하는 어묵도 있고 제육볶음도 있었다.

 

내가 사는 주안에서 수강하려고 강남 테헤란으로 가려면 전철로 두 시간이 걸리는 데도 강의가 새롭고 흥미로워서 인지 조금도 피곤하질 않았다.

오늘 시니어파트너즈 싸이트에 있는 앙코르스쿨에 들어가

보니 반갑게 제6나의 책 출간커리큘럼이 소개되어 있어 반갑게 댓글을 달아 놨다. 모르긴 해도 시집간 색씨가 친정소식을 듣는 것도 이와 같은 기분일 것이라 생각한다.

1970-01-01 09:00 2016-11-13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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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바람에 간당거리는 촛불

 
우리 집사람은 80세, 잔병을 수도 없이 몸에 달고 산다. 어깨 아프고 허리 아픈 것은 애교스럽고 저혈압, 만성중이염, 안구건조증에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수족냉증에 무릎 통증에 이르기까지 달고 살아 층계를 오르내릴 때 한 발 내딛기를 어려워한다. 거기다 밤에도 잠을 푹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잠을 설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단독주택인 우리 집 현관 층계를 내려가다가 넘어져서 오른 발목이 부러져 인천 사랑병원에 실려 갔다.
집사람이 층계에서 쓸어져 발목뼈가 부러 졌을 때 나는 집밖에 나가고 없고 집사람 혼자
사람 살려!”
외쳐서 건너집 사람이 듣고 택시를 불러 우리 집 사람을 택시에 태워 사랑병원으로 갔다.
집사람이 병원에 간지 3시간 후에 내가 알게 되어 사랑병원으로 달려가 부러진 발목 뼈 접합 수술을 강행했다.
젊은 사람 같았으면 층계에서 넘어지고 금방 일어나 바지에 묻은 먼지를 훌훌 털어버리면 그만일 일이 할머니에게는 골절상이라는 큰 수술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집사람 얼굴을 보고 싱긋 웃으며 천만 다행이다 고 말했다.
막상 대퇴부라도 부러졌더라면 더 큰 곤욕을 당했을 것 같다.
우리 집사람은 여러 가지 병들이 합쳐진 노인성 질환 표본 같은 사람이다.
집사람이 거북이 등껍질 같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고 웃을 때 6인실 병원에 다른 환자의 보호자가 닥아 오더니 핸드폰으로 우리 노부부를 찍어 내 핸드폰으로 전송해 주었다.
자연히 병원을 자주 찾는데 노환이어서인지는 몰라도 병원에서도 신통한 저혈압 치료와 디스크 신경 통증과 만성 중이염, 안구건 조증은 고치지를 못하고 임시 처방만 해준다. 병원에 자주 다니지만 우리 집사람의 갖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체질개선과 체력보강으로 아침과 저녁으로 꾸준히 안마와 부항을 떠주고 있다.
    
점심에는 2km를 걸어가서 급식소나 교회에 가서 점심을 먹거나 전철을 타고 신세계백화점 이마트에 가서 시식 쪽에서 이쑤시개로 꽂아놓은 음식을 먹는 등 집 밖 활동으로 재활 물리치료를 하는 것처럼  즐겁게 다니도록 했다.
    
한의사에게도 찾아가 침을 맞고 한약을 타다 먹었지만, 병세는 좋아지거나 병이 낫지 않아 건강식품으로 인삼과 대추, 생강을 넣고 끓인 약과 생강, 대추를 끓인 물, 홍화씨, 구기자 등을 먹었다. 이것들도 효용이 없고 집사람 몸은 아프기만 했다. 내가 안마를 해주고 부황을 떠주면 집사람은 잠시 몸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여보! 당신 덕택에 내가 살아가요.”
화장품에 들어있던 중금속 때문인지 얼굴에 마른 각질이 끼어 피부과 병원에 다니는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 집사람이 나를 쳐다본다.
원 별소리를 다 하네. 이 정도 서비스도 않는 남편이 어디 있어?”
나는 대수롭지 않게 집사람 말을 받아넘기고 집사람을 침대에 누이고 안마를 해준다. 현대 의학이 고치지 못하는 저혈압, 수족냉증이라면 내가 집사람에게 시간이 되는 대로 안마와 부황을 떠 주려고 한다. 집사람이 내가 해준 안마와 부황 뜨기를 받고 해바라기와 같은 밝은 웃음을 짓는 순간이 내가 느끼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된다.
오늘은 집사람과 같이 점심 때 동태탕 집을 찾아갔다.
동태탕 한 그릇만 주세요, 그리고 밥은 한 그릇 추가요
했더니
두 사람이 와서 동태탕 한 그릇을 시키면 안됩니다.
점심 먹으로 들어 온 손님들이 꽉 찬 홀을 훑어보며 음식점 주인이 말을 했다.
오늘만은 동태탕 한 그릇을 주문 받을 게요
라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집사람과 나는 동태탕 한 그릇을 시켜놓고 빈 그릇에 동태 토막을 두 토막씩 나누어 담고 점심을 집사람의 얼굴을 보며 맛있게 먹었다.
나는 장님 아버지의 순대국 그릇에 8살 아들이 자신의 순대 덩어리를 아버지 순대국 그릇에 담아주며
아버지 새우젓 국을 한 숟가락 넣어 드렸어요. “
했었던 동화 이야기를 회상하며 밝게 웃으면서 집사람과 같이 동태 탕을 먹었다.
    
    
1970-01-01 09:00 2016-11-1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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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바프아 팝]나무가 자란다.

 

[마다카스카르]섬 서쪽 비가 오지 않는 매 마른 땅에서 자라는 뿌리 같기도 하고 나무기둥 같기도 한 굵은 기둥이 오르다가 나무 꼭대기에서만 나뭇가지가 뻗어나는 어린왕자의 동화책에서 나올 것 같은 [바프아 팝] 나무가 한 구루 있다.

이 나무를 사 올 때 화원 주인이

 

몸씨 귀하고 키우기 힘든 나무니 한 달에 한 번만 물을 주라

 

고 해서 다른 화분은 하루에 한 번씩 물을 주는데 이 나무만큼은 주의를 기우려 물을 주었다.

[스카이 TV] 프로그램을 보면 마다카르 섬의 특이한 생태계가 나오다가 식물을 소개 할 때 [바프아 팝]나무가 나오면 기이하게 생기고 귀여운 모습에 저절로 입가가 올라갔었다.

나는 열대식물인 이 나무를 10 달에 집안 안방에 모셔 놨다. 나무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열대지역에서 몸통에 많은 물을 저장해놓고 사는 나무란다.

 

나는 나무와 꽃을 좋아해서 집 마당에 있는 나무들 외에 200여 화분에 식물을 키우고 있다. 겨울에는 온실이 별도로 없어 화분을 집안 마루 현관 에서 안방에 이르기까지 들여 놓고 일주일에 한번 씩 물을 준다.

2년 전에는 어른 주먹 만 한 감이 5 백여 개가 달린 감나무가 태풍에 밑 둥이 지름이 30센티를 들어내고 부러져나갔다.

내가 사랑하던 나무여서인지 대략 추산 10톤이 나가는 나무가 우리 집과 창고 사이 길속으로 쓸어졌다.

집으로 쓸어 지던가? 창고로 쓸어졌으면 집이고 창고고 남아나지 않고 파괴되었을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 추운 겨울이 오고나 겨울이가고 봄이 오면 집안으로 화분들을 옮겨 놓고나 집안에서 마당으로 옮겨 놓아야하는데, 80이 된 할아버지가 혼자 80키로가 나가는 소철나무 화분 2개를 옮기려면 써커스를 해야 한다. 피아노를 옮기는 바퀴달린 파렡을 이 무거운 화분 밑에 집어넣고 마당에서 현관에 오르는 층대에는 송판을 장을 깔고 송판 위로

 

소철화분이 올려진 바퀴달린 파렡을 끌어 올리거나 끌어내려야했다. 내가 키운 은행나무 화분은 내가 암 은행나무 가지를 접목했는데 내

마음을 읽고 있는지 은행잎이 내 주먹만 하고 잎이 여러 가닥으로 갈라진 나무여서 잎이 노랗게 물들면 따서 책갈피도 만들어 놓고 늦 여름철에는 푸른 은행잎을 따서 그늘에 말려 놓고 하루에 한 잎씩 씹어 먹는데 되게 쓰다.

은행잎에는 우리나라 은행잎에만 찡코민이라는 혈전을 녹이는 성분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은행잎들이 나를 보고 도와주는지 은행잎을 먹으면 온몸이 뜨뜻해져 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는 기분이 언짢을 때에 [바프와 팝]나무 화분을 보면 까까대머리에 머리카락 몇 개가 난 것 같아 웃음이 나오고 가시같이 삐죽 날카롭던 마음이 둥글게 되어 버린다.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고마운 화분 나무다.

1970-01-01 09:00 2016-11-06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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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째 먹이주고 키운 도둑고양이가 집고양이가 됐다.

 

나의 가축사랑은 다른 사람보다 조금은 더 보태진 것 같다.

내가 7살 때 경기도 지평 읍에서 살았다. 그 때 키웠던 닭 중에 암탉 한 마리가 내가 모이를 주러 닭장에 들어가면 나에게로 와서 모이를 들고 있는 내 손으로 올라와 모이를 쪼아 먹었다. 내가 이놈의 몸통을 만져도 이 닭은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꼬꼬꼬하며 내 손바닥에 놓인 닭 모이를 다른 닭보다 더 맛있게 먹었다. 이 닭이 모이를 먹을 때 부리로 내 손바닥을 두두리는 것이 피아노 음악 같은 리듬으로 들려 왔다.

이 닭을 할아버지께서 잡아 백숙을 만들어 나에게 먹으라고 주셨는데 나는 주먹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큰 소리 내여 울었다.

백숙은 먹지도 않고 그 후로는 지금까지도 치킨 후라이 등 닭고기 음식뿐만 아니라 계란을 넣은 전 부침에 이르기까지도 입에 대질 않았다.

6 25 사변 때에는 집에서 키우던 복실이 개와 같이 인천시 구월동(당시에는 과수원들이 있는 시골이었다.)으로 피난을 가서 피난 중에

할아버지께서 먹을 양식걱정을 하시다가 동네사람을 시켜서 복실 이를 배나무에 매달아 죽여 개장국을 끓여서 동네잔치를 했다. 나는 복실 이의 동그랗고 티 없던 눈동자가 아른 거려서 당시 중학교 1년생인 내가 큰소리로 다시 울고 말았다.

역시 그 후로는 개장국을 비롯한 개고기는 입에 대지를 않았다.

30년 전에 복돌 이라 이름 지어진 치와와 개 한 마리를 키웠는데 방에서 키워서인지 사람 말을 거의 다 알아들었다.

내가

 

베게

 

하고 방바닥에 들어 누어 머리를 땅 바닥에서 조금 띠어들고 있으면 얼른 주먹 두 개를 겹치기 한 것 만한 복돌 이가 내 어리 밑으로 들어와 베게가 되어 들어 누어주었다.

내가 코를 고는 시늉을 하면 살그머니 내 머리 밑에서 머리 밖으로 빠져 나왔다.

내가

어흠

 

하면 얼른 복돌 이가 내 머리 밑으로 다시 기어 들어와 베게 노릇을 했다.

이놈은 아침에 신문이 오면 현관문으로 나가 신문을 물고 들어 와 내 무릅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집사람은 나와 동물의 애정이 지나쳐서 싫었는지? 복돌 이가 늙어 죽은 후에는 가축을 방안에서 키우지 못하게 했다.

나는 치와와가 죽은 후에도 다시 개나 고양이를 집안에서 키워보고 싶어 했다.

 

우리 집은 이층 스라브 단독주택이었다. 복돌 이가 죽은 뒤 옥상에 있는 비어있는 옥탑 방에 도둑고양이가 꼬물거리는 고양이 새끼 5마리를 낳아 젖을 먹이고 있었다. 우리 집 사람이나 내가 빨래를 널러 옥상에 올라갈 때 옥탑 문을 열고 닫는데 그 때 어미고양이가 옥탑 방을 빠져나와 먹이를 주어먹고 다시 옥탑 방으로 올라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나는 이도둑 고양이가 먹을 꽁치통조림을 사서 꽁치토막을 2개씩 도둑고양이 곁에 놓아 주었다. 어미 도둑고양이는 나를 처음 보았을 때는 내가 혹시 자기 새끼를 건드릴까

 

으르렁

 

거렸는데 차츰 나를 반겨주는 눈빛을 보였다. 내가 꽁치토막을 들고 가까이 가면

 

야웅

 

부드러운 소리를 내면서 나를 반겼다.

고양이 새끼들이 커가면서 먹이로 주는 꽁치토막도 두 개에서 세 개, 세 개에서 네 개로 바뀌어졌다. 이 고양이들이 석 달쯤 지나 커졌을 때 이 들이 옥탑 방에서 내려와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빈 물통에 빨랫줄을 매달아 이 물통에 고양이 새끼5마리와 어미를 담아 이층옥상에서 지상으로 내려 놓아주었다.

이렇게 먹이를 주어 키운 도둑고양이들이 30년 정확하게 파악은 되지 않지만 8대를 이룬 것 같다.

도둑고양이 털색만 보아도 노란 털 갈색 털 짙은 갈색 검정과 흰점이 얼룩인 놈 등 다양하게 우리 집을 찾아왔고 이들 고양이들 끼리 서로 자기가 먹이로 주는 꽁치통조림 토막을 먹겠다고

 

으르렁

 

거리면서 싸우기도 했다.

7 대 고양이는 나에게 엽집 달동네로 자기와 같이 담 넘어 가자는 듯, 우리 집 담에서 엽집 달동네 집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담을 뛰어 넘어 보였다.

9대 째 도둑고양이는 털이 검정색이다. 조그만 놈이 우리 집으로 들어 와 주위를 두루 살펴보고 꽁치투막이 있는 곳으로 와 내가 쳐다본다고

 

캭 캭

 

하고 날카로운 송곳 이를 들어 내 보이고 등에 난 털을 곤두 세웠다.

내가 한 발자국씩 커멍 이 에게 다가가면서 이제는 머리도 쓰다듬고 목덜미 아랫부분을 긁어주면

 

갈그랑

 

거리면서 눈을 스르르 감는다.

날씨가 추워져서 집밖에 놓인 화분을 집안 마루와 이층으로 화분 200개를 옮겨 놓으려고 현관문을 비롯하여 이층 문까지 모두 열어 놓고 화분을 들어 집안으로 옮기는데 꺼멍 이가 나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집밖으로 나가면 같이 따라 나가고 날 즐겁게 해주었다.

꺼멍이가

 

할아버지 나도 같이 집안에서 살게 해 주세요

 

말 하는 것 같이 야웅 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1970-01-01 09:00 2016-11-0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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