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려는지 종일 흐리다. 양말이나 기울까 하고 반짇고리를 꺼냈다. 조금씩 구멍 나서 모아 둔 양말이 몇 켤레 있다. 비싸서가 아니라 집에서 신는 내 양말은 종종 깁는다. 반짇고리에는 윷과 화투도 있다. 시어머니 손때가 묻은 유일한 물건이라 그냥 넣어둔 게 20년이나 흘렀다.

 

내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할머니와 윷놀이하는 걸 재미있어했다. 커가면서 학원이다 뭐다 해서 저녁부터 나오는 텔레비전을 낙으로 삼으셨으니, 낮에는 지루하다고 하셨다. 가끔 그 방에 들어가 보면 화투로 짝을 맞추고 그날의 패를 떼어보곤 하셨다. 때로는 윷놀이도 하시는데, 말을 업고 가기도 하고 당신 말을 잡기도 했다. 나는 문학을 배운다고 돌아다닐 때라 제대로 말동무를 해드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서른셋에 혼자되셨다. 친정아버지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보다 홀시어머니 모시기 어려운 거라고 결혼을 반대했다. 우리는 서두르지 않고 어른들의 처분만 기다렸다. 몇 년이 지나고 아버지는 허락하시면서 신중하게 말씀하셨다. ‘홀로 서 있는 아카시아나무를 보면 가시가 많더라. 그건 기댈 곳이 없으니까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네가 잘 처신하여야 한다.’고.

 

살아보니 시집살이는 부모님 걱정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사리분별 정확하고 꼿꼿하시어 친정에서 염려하는 쪽으로는 곤란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밥도 제대로 못 하고 연탄불 가는 것도 적당한 시간을 몰랐으니 내가 답답함을 드렸다.

 

부부로 살아도 의논할 일이 많고 어려운 일 천지였을 텐데, 남편 없이 반쪽으로 살자니 해결할 일을 만났을 때 괴로움과 힘듦은 얼마나 술렁거렸을까. 산모롱이도 겨울이면 추워서 조금씩 무너진다는데, 외로움이 갉아먹고 가난이 축낸 어머니의 일생 모서리는 얼마나 깎여나갔을까. 마음 놓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을 텐데, 그런 날은 어디에 털어놓으셨을지 나보고 그런 삶을 살라고 하면 자신이 없다. 철이 없었다고 해도 그 마음 많이 알아주지 못하여 죄송스럽다.

 

지구상에서 가장 무겁고 슬픈 단어가 ‘쓸쓸함’과 ‘외로움‘이라고 알고 있는데 79년을 어찌 다독이며 사셨을까. 나는 양말 깁기를 미루고 화투에 손을 댔다. 1월부터 12월까지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모두 48장이다. 할 줄 아는 게 짝 맞추는 것뿐이다. 그것도 두 명일 때, 세 명일 때 나눠주는 장수가 정해져 있었는데 잊었다.

 

마흔여덟 장이라 시어머니 몫으로 다섯 장, 내 앞에 다섯 장, 바닥에 열 장 깔고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때 어머니도 마주앉은 사람도 없는데 중얼중얼 거리며 나처럼 하였겠지 생각하니 슬펐다. 많은 게 사람인데 어쩌자고 당신과 시간 보낼 말동무 한 명 없었을까. 그게 운명이라고 해도 어떤 날은 화투장(花鬪張)을 뒤집듯, 아니 던지듯 부부연이 짧은 운명을 던져 버리고 싶으셨을 것 같다.

 

요즘 내 몸이 부실하여 의기소침하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시어머니는 재산도 없이 어린 아들 셋을 데리고 어떻게 사셨을지. 그 고통의 세월을 어떤 인내로 보내셨을지 생각할수록 안쓰럽다. 자신이 그 지경이 돼 보야 안다고 했듯이 요즘은 후회도 반성도 많이 한다. 참말이지 이렇게 금방 이 많은 나이가 내게 닥칠 줄 몰랐다. 설명이라도 해주셨으면 자투리 시간이라도 이용하여 조금은 덜 무료하게 해 드렸을 텐데, 왜 ‘너도 내 나이 돼보면 안다.’고만 하셨을까.

 

돌아가시고 처음에는 내가 미덥지 못하셨는지 꿈속에서 자주 다녀가셨는데 내가 이렇게 아픈데도 통 오시지 않는다.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남편과 아들을 만나 이곳은 잊으셨나 보다. 어째서 여기저기 아프니까 비로소 보이는 게 많은 걸까.

 

1970-01-01 09:00 2014-04-1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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