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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화려하고 향기로운 꽃보다 억새가 좋다. 하늘공원을 여러 번 찾아간 것도 백발에 허리 굽은 억새가 있어서였다.

 

하늘공원은 월드컵공원 중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서울시의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난지도를 인공으로 바꿔놓은 것이 지금의 하늘공원이다. 서울의 생활쓰레기를 받아내느라 ‘썩어가는 일과 썩어가는 냄새’뿐이라고 불렀던 쓰레기 매립장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하늘공원 아래에서 정상까지 가는 맹꽁이 차(순환하는 차 이름)를 타고 갈까 하다가 지그재그로 놓은 291개의 나무계단을 택했다. 다리가 아프면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람 방해되지 않도록 중간중간 쉴 수 있게 되어 있는데도, 어른들 말씀처럼 작년 다르고 올 다르다. 하지만 숨차게 올라가 광활한 초지(草地)와 손에 잡힐 듯한 하늘을 바라보면 답답했던 속이 뚫리는 기분이다.

 

풍력발전기와 수세미 터널, 조형물과 원두막이 몇 개 있으나 초입에 있는 넓은 밭에 코스모스와 억새가 으뜸이다. 여기는 꼭 어느 계절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계절에 어울리는 꽃을 심기도 하지만 이미 터를 잡은 식물이 자라고 있어 어느 계절에 가도 실망하지 않는다.

 

이번에 가서는 귀화종 토끼풀이 다른 식물이 자라는 것을 돕는다는 것을 배웠다. 토양분해 작용을 도와 척박한 땅, 그곳에 알맞은 식물이라는 것이다. 또 하늘공원을 중심으로 노랑나비, 제비나비, 네발나비, 호랑나비 등 3만 마리 이상의 나비를 풀어놓는다고 한다. 명소가 되기까지 관계자들의 노고가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되었다.

 

나는 주로 혼자서 가기 때문에 억새 골목을 여유롭게 걷다가 쉬고 싶으면 억새 그늘에 신문 한 장 깔고 앉는다. 편안하다. 꽃향기와 다른 풀냄새가 정신을 맑게 해준다. 곁에는 귀화식물인 미국쑥부쟁이와 서양등골나물꽃이 억새와 동무하고 있다.

 

건물 그늘에 갇혀 바쁘게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 가을이 가기 전에 하루쯤 그곳 전망대에 올라가 보는 건 어떨까. 건물을 내려다보고 내 아래 건물이 있다고 큰소리쳐보는 건 어떨까.

 

우리는 억새를 표현할 때 쓸쓸함이나 나이 듦을 먼저 연상할 수 있지만, 내게 새겨진 억새의 이미지는 강인함과 푸근함이다. 약한 바람에 흔들려도 쉬 쓰러지지 않는 모습과 특히 결집되어 있을 때 ‘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몸짓은 속상한 사람도 한나절 그 속에 안기면 풀어질 것 같다.

 

내가 고향으로 벌초를 갔다가 억새를 잘라와 한 다발씩 항아리에 꽂아놓고 일 년을 바라보는 것도 물 한 방울 없는 그릇에서 버티는 끈질김 때문이다. 허허벌판에서 바람이 뼛속까지 드나들었을 텐데 스스로 부러지지 않는 강함 앞에서는 나도 스스로 포기하는 일 없이 강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고개 숙이는 모습도 아름답지 않은가. 이 가을 나도 내 메마른 가슴에 용기와 사랑을 심어준 이들에게 뻣뻣한 마음 버리고 굽혀보고 싶다. 늙마에 서로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억새처럼 변하고 싶다.

 

 
 
1970-01-01 09:00 2013-10-09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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