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와 여행 중에 한 장]

 

여자가 결혼하여 김장을 서른 번 담그면 할머니가 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마흔다섯 번을 담갔으니 할머니 축에 낀 지도 오래다. 그래도 강단이 있어서 김장철이 되어도 겁나지 않았는데 삼사 년 전부터는 배추 40여 포기를 혼자 하려니 엄두가 안 나 아들과 동서의 도움을 받고 있다.


작은집은 같은 경기도라도 남쪽에 있고 나는 2년 전 서울에서 경기도 북부로 이사하여 전철로 두 시간 넘게 걸린다. 명절과 제삿날에도 전날 와서 척척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나보다 여섯 살 아래라고 해도 몸을 아끼지 않는다. 욕심이라도 있으면 덜 미안하겠는데 내가 맛보라고 된장, 고추장을 준다고 해도 힘들 게 만든 것 두고 드시라고 극구 사양한다. 몇 해 전부터는 청국장이나 고추장 된장은 되도록 만들어보라고 했더니 그 말에 용기를 냈다면서 아파트에 사는데도 담가 먹는다.


올해도 장거리라 피곤할 텐데도 하루 미리 와서 배추를 절이고 속으로 쓸 채소를 다 썰어주었다. 올 때 배낭을 지고 오라고 했더니 수육 거리와 빵을 잔뜩 짊어지고 왔다. 나는 줄 게 없어서 김장하면서 한 겉절이와 생채, 내가 말려서 덖은 가지 차, 시골 사는 동생이 준 볶은 참깨를 반강제로 싸 보냈다. 무거워서 싫다는 말은 핑계기에 내 고집대로 했다.


남남이면서 시동생으로 인해 한 가족이 되었으나 점점 혈육처럼 느껴진다. 나만 그런 줄 알았다고 하니까 동서도 자기 동기간한테 하지 못한 말을 내게 한다면서 언니나 다름없다고 한다. 내가 시동생한테 남다른 애착이 있는 건 제대하고 몇 년을 나와 한집에서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 신혼 방을 우리 집 근처에 얻어 신접살림을 차리게 했다. 가까워 이웃집 마실 다니듯 하면서 밥도 같이 자주 먹으면서 정이 더 들었다. 


그 집에서 첫아들을 낳던 해였다. 산바라지할 사람이 마땅하지 않기에 데리고 와서 산모 밥을 해줬다. 그때 나는 막내아들을 낳은 지 6개월밖에 안 되었기에 휴식이 필요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아기(조카)를 데려오는 날 밖에서 본 얼굴은 샛노랬다. 첫아기라 황달이 그렇게 심한 줄 몰랐다고 한다. 서둘러 집 근처에 있는 K 대학병원에 입원시켰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좀 더 잘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올봄에는 내가 많이 아파서 은근히 걱정했단다. 큰형님도 돌아가시고 둘만 남아서 외로운데 자기 혼자 살아간다면 너무나 슬플 것 같아서 불안했단다. 수술받던 날도 바쁜 동생들을 오라고 할 수 없어서 동서한테 부탁했다. 수술 시간이 이른 오전에 잡혔고 하필 비가 쏟아지는 길을 허겁지겁 달려왔다고 했다. 밤새 고통스러워하는 내 짜증과 요구를 말없이 받아주며 불편한 간이침대에서 밤을 새웠다. 그뿐인가. 씻기는 시중까지 들어줄 때는 형님 같았다.


이런 글을 읽었다. 거리에서, 일터에서,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서 진정 현명하게 살아가는 일이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겠냐는. 동서를 두고 한 말 같아 오래도록 잊히지 않지만, 사람으로 태어나 이보다 훌륭한 실천은 없다고 본다.  


나는 어떤 인복을 타고났기에 이런 착한 사람과 인연이 되었을까. 급하고 까다로운 내 성격을 넉넉한 웃음으로 받아주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고 하지 않는 그 너그러움이 나를 느긋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믿을 사람 없다는 이 세상에서 부르면 언제든지 찾아줄 동서가 있기에 내 삶은 든든하고 한결 따스하다.

1970-01-01 09:00 2018-12-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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