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東星)' 의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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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다됐어]

  “아무래도 이젠 다됐어. 다됐어.”

  친정어머니의 전화 첫 마디다. 나는 혼자 계시다가 안 좋은 일이라도 났는가 놀라서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이틀 전이 증조할머니 기일인데 깜빡 잊으셨다는 내용이다.

  나는 친정어머니를 뵐 때마다 결혼생활 60년이 넘도록 온갖 구듭을 치르고도 정신을 놓지 않고 살아오신 것만도 신기하다. 4대가 한집에 살았던 틈바구니에서 칠남매의 맏며느리로 겪었을 일도 속속들이 알 수 없지만, 나 같으면 해내기 어려운 시집살이였기 때문이다.

  이제 시할머니 기일을 한 번 놓쳤다고 탓할 사람도 없는데 어머니는 긴 한숨을 내쉬고 ‘이젠 다됐어. 다됐어’만 연발 하신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씀이,

  “며칠 뒤면 네 아버지 가신 날이 아니냐. 나는 영감 제삿날만 따지고 있었단다.”

  “괜찮아요. 엄마는 증조할머니한테 하실 만큼 했어요. 다 이해하실 거예요.”

  나에게라도 털어놓아야 시할머니에 대한 죄스러움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내 덮어줌의 말을 듣고 싶으셨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은 어쩌다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분가를 하고 증조부모를 어머니가 모시게 되었다. 장수까지는 괜찮은데 증조할머니가 치매와 풍으로 4년 동안 누워계셔서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고무장갑도 없는 시절에 냇가에서 어른 지저귀빨래까지 하시는 걸 나는 수없이 봤다. 그런 어머니를 누가 잘못했다고 하겠는가.

  나는 ‘이젠 다됐어.’ 하시는 어머니의 말끝이 걸려 친정엘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현관에 들어서는 나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 ‘이젠 너도 늙었는데’하시면서 혀를 차신다. 그 말은 당신 때문에 늙은 딸을 오도록 했나 해서 하시는 말씀인 걸 왜 모르리.


  지금은 어머니의 손 한번 잡아보고 오는 시간이 왕복 너더댓 시간으로 충분한데, 이 만남이 언제까지 이어질는지 날로 불안하기만 하다.

[글/사진/naroo]

2009/01/07 15:08 2009/01/0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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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털이풀꽃]

[염치없는 부탁]

  막내아들이 수학능력고사를 보는 날이다. 전철을 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아들이 혼잣말처럼 온몸이 떨린다고 한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조마조마한데 가슴이 철렁했다.

  아이가 춥다고 함은 입시 때만 되면 영하로 내려가는 기온 탓만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잔뜩 껴입은 어미의 속도 춥고 진정이 안 되는데 저라고 어떻게 안정이 될 것이며, 고3 내내 독서실에서 보낸 결과가 단 몇 시간에 판가름 나는데 숙면인들 제대로 했겠는가.

  슬쩍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니 새벽에 일어나 면도한 구레나룻 자리에 소름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나는 그거라도 녹여주고 싶어서 목도리를 풀었으나 끝내 고집을 피우며 말을 듣지 않는다.

  쳐다보지 말 것을. 키만 컸지 볼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수험생의 어미로서 해준 게 없었다. 절대로 먹지 않을 거라고 강조한 아들의 말만 듣고 보약 한 제 먹이지 못한 걸 수험장으로 가면서 후회했다.

  시험장소인 모 중학교 정문 앞에는 영하의 날씨에도 선생님과 후배들이 그룹을 지어 나와 있었다. 언제 준비했는지 여러 종류의 뜨거운 음료와 과일을 권했고 은박지로 싸서 만든 대형 포크와 ‘모두 합격’이란 단어가 적힌 플래카드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었다. 정말 그 커다란 포크로 정답만을 찍어낼 수 있을 것 같아 잠시 위안이 되었다.

  아들도 뜨거운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제야 다소 가라앉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운동장까지 따라 들어가 아이의 언 손을 잡으며,

  “지금까지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라고 힘주어 안심시켰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교실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제발 당황하지 말고 지금보다 월등히 잘해주길 바랐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동시에 운동장에 있던 사람들은 교문 밖으로 나갔고 문은 닫혔다. 갑자기 기온이 더 내려간 것처럼 발이 시렸다. 아이는 시험지를 받고 얼마나 떨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내 발 시림은 문제가 아니었다.

  교문의 창살을 붙들고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틈에 나도 끼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염주를 돌리면서 발원을 하거나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도 급한 마음에 그들이 믿고 있는 절대자라는 분을 찾고 싶었지만 교회도 절도 다니지 않으면서 몸이 단다고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데다 오늘 같은 날은 하나님이나 부처님을 찾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텐데, 내가 염치 불구하고 애타게 찾는다고 해도 나와 아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게 아닌가.

  나는 나의 간청을 거절하지 못할 분이 누구일까 골똘히 고민했다. 아무리 전지전능하고 대자대비한 분이라고 해도 혈연관계만큼은 효험이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아들과 나의 소원을 들어줄 사람은 단 한 사람, 시어머니밖에 없었다. 살아계실 때 잘 모시지 못한 것이 걸리고 염치없지만 그건 다음 문제이고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큰아들을 낳고 5년 후에 이 아이를 낳아서 그랬던지 많이 예뻐하셨다. 내가 아이를 데리고 나가지 않는 날은 어머니의 손끝에서 놀았고, 업고 나가면 사람들이 당신을 닮았다고 한다며 은근히 좋아하셨다.

  더구나 이번 부탁은 처음이면서 나를 보아 들어달라는 게 아니고 그냥 들어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이 손자가 장성하면 당신의 산소를 지금보다도 잘 돌보도록 할 것이고, 제사도 정성껏 모시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 생전에 이 아이를 사랑하셨듯이 시험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지켜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 나는 아들이 시험 볼 장소라고 가르쳐 준 3층 교실을 바라보며 텔레파시를 보냈다. ‘엄마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고 할머니께서 네 곁에 계시니 아는 것과 배운 것을 잘 기억해서 실수 없기를 바란다. 너는 할 수 있다’라고.

  시험이 한 시간쯤 끝나갈 즈음 햇살은 많이 퍼져 등이 따스워졌다. 내 염치없는 부탁이 잘 전해진 것처럼.

[글/사진/naroo]

***
이 글은 몇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제 염치없는 부탁이 전해졌던지 아들은 합격을 했고

저는 이 글로 제1회 ‘프론티어문학상’을 받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 글이라 올려봅니다.

2009/01/06 10:35 2009/01/06 10:35

시골내기

글과 사진 2009/01/0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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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내기]

   

                                                         

  서울에는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들만 사는 줄 알았던 적이 있다. 시골 사람들이 서울말, 서울물 하니까 어린 나이에 서울에서 쓰는 말이나 먹는 물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신문도 안 보고 탈것이라고는 소달구지밖에 없는 마을이었으니 바깥세상과 소통할 매체가 없었다. 이웃마을에서조차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동네 사랑방에서 듣고 오는 소식은 누구 네 소가 새끼를 낳았다거나, 뒷집에 사는 아들이 가을에 혼인을 한다는 등 나와는 무관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줄이 닿았는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서울로 간 친구가 다니러 와서 어딘가가 우리와는 다른 억양의 서울말을 놓고 갔다. 내 또래는 물론 동네가 술렁거렸다. 보릿고개에 입 하나 줄인다고 수양딸로 보내졌다지만 무엇으로 간 게 중요하지 않았다. 발전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촌구석을 떠나 서울로 갔다는 자체가 부러움이었고 호기심이었다.

  그 애가 못 먹은 겉기를 벗은 얼굴로 다녀간 다음날은 그날이 그날이었던 촌구석에도 약간은 유식해진 듯한 변화가 일어났다. 빨래터와 우물가에는 친구가 흘리고 간 서울 소식이 뉴스로 부풀려 돌아다녔다. 그 중에서 내가 미심스러웠던 것은 대낮에도 대문은 꼭꼭 걸어 잠가야 하고, 물은 꼭지만 돌리면 나온다는 말이었다.


  그때 우리 동네는 나무대문인 집 몇을 빼고는 거의가 빈 통조림깡통을 매달아 문을 여닫을 때 딸랑거리도록 한 사립문이었다. 그나마 밤이 되어도 문을 지쳐놓는 집이 많았고 문 높이도 낮아 낙엽 굴러들어오는 거나 막을까 형식적이었다. 

  또 물이 꼭지만 틀면 나온다니 말이나 되는 건가. 가뭄이 계속될 때 우리 마을 사람들은 밤을 새워가며 두레박으로 물을 짜 먹다시피 했고 심할 때는 기우제를 지내도 효과가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꼭지만 돌리면 물이 쏟아져 나온다는 말인가.

  그런데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지어낸 말일 거라고 했던 사람들도 채 일 년도 안 되어 다니러 온 그 애의 얼굴이 뽀얗게 된 원인은 서울물 때문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내가 서울 땅을 처음 밟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다. 서울에는 살만하다 하는 친척이 있었고 우리는 해마다 농사지은 잡곡을 갖다 주었다. 그 해는 증조할머니가 혼자 가시기가 힘에 부치셨는지 잡곡을 나에게 들리고 서울구경 시켜주겠다고 하여 따라나섰다. 서울은 차들과 다닥다닥 붙은 집들로 정신을 빼놓았다.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말이 맞는 듯했다.

  친구의 말처럼 친척집의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문틈으로 들여다 본 정원에는 작은 송아지만한 개가 묶여 있었는데, 무슨 낌새를 챘는지 컹컹 짖어댔다. 몇 번 와본 할머니가 초인종을 눌렀고 일하는 여자가 나왔다. 그 여자의 얼굴도 뽀얗다.

  나는 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지 화장실에 가서 확인했다. 밤에도 낮처럼 환했다. 석유 등을 키던 내 눈에는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너무 자세히 보이는 게 오히려 어색하였다. 시골 사람들은 이렇게 편리한 세상이 있는 줄도 모를 거라고 나는 비밀이라도 알아낸 듯 설레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같은 나라에 태어나 누구는 힘들이지 않고 물을 사용하고 있다는 불공평함에 화가 났다. 그뿐인가. 성냥이 귀하던 시절이라 그것 한 개비 아끼려고 등잔을 가지고 할아버지 방으로 건너가 불을 붙여 오면서 살아온 날들이 속상했다.

  더구나 서울 학생들은 공부를 잘한다고 선생님이 늘 비교를 하셨는데 공부 잘하는 이유가 있었다. 불을 때지도 물을 긷지도 않고, 소꼴을 베는 것도 모를 테니 공부하는 시간을 빼앗길 일이 없지 않은가.

  어린 소견에도 이런 곳에서 살면 한겨울에 엄마를 따라 빨래하러 곱은 손으로 냇가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등잔불을 켜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안하겠나 하는 희망을 갖고 나는 어른이 되면 서울에서 살리라 다짐했다.

  그 결심은 결혼을 하면서 이루어졌으나 지금도 수도꼭지를 틀 때는 물 한 동이 채우기 위해 모여 있던 고향의 공동우물이 떠오른다. 번거로워도 세탁기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물을 받아놓고 쓰는 습관도 내가 물을 길어보아서이다. 땅속을 돌아 나온 샘물을 먹고 자라서이다.  
  요즘 아이들의 사고로는 어둡고 힘들어서 어떻게 살았을까 하겠지만, 시골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도 강해지지 못했을 테고, 따스한 글 한 가닥 나오기 어렵지 않았을까. 지나간 일이라서가 아니라 시골내기임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물과 불, 모든 절약을 시골에서 살며 경험했기 때문이다.


[글/사진/naroo]

2009/01/05 08:50 2009/01/05 08:50

글과 사진 2009/01/0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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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 눈매.

깊은 되새김.

나도 너처럼 순한 눈매를 한 적 있었는데,

분명 있었는데

지금은 순한 눈매는 없고

후회만 되새김하며 산다.

[글/사진/naroo]

2009/01/04 14:38 2009/01/0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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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칼미아>
 

[문자를 받았어요]


님들도 며칠 동안 복을 받이 받으셨겠지요?
비록 문자 한 통이고 전화 한 통이지만,
행복을 수십 통 받은 기분이더라고요.
그 중에서 이런 문자를 받았어요.

*어떤 것도

바라보는 눈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


그런데 이 문자는 지난 가을 어느 날

내가 그 사람에게 보낸 것이었는데

차마 지울 수가 없어서 마음속에 간직했다가

되돌려주는 거라고 했습니다.

잊고 있었던 문자인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도 내가 문자를 보냈을 때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그동안 인색했던 말, 또는 글로 인심 쓰며 살려고 합니다.

모든 것은 부메랑처럼 나에게 돌아온 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글/사진/naroo]

2009/01/03 09:39 2009/01/0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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