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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 학생들은 매우 오래 사신 분들이다. 평균 연령이 72세 정도이니 그야말로 아주 오래된 학생들이다. 이분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열심히 듣는 과목은 영어다. 왜냐하면, 필자가 그분들께 영어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목표는 입시나 공시가 아니다. 오로지 ‘배우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래서 진도도 없고 시험도 없다.
 
그렇다고 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멋진 세계여행을 설계하고 계신다. 그래서 강의 내용도 여행에 써먹을 만한 표현들을 많이 다룬다. 아마도 수업시간에 보여주는 그분들의 빛나는 눈동자는 그분들이 강의를 듣는 이 순간 상상 여행 중임을 증명한다. 그때 그들의 낡은 피부는 홍조를 띠고 어조는 들뜬다. 마치 고목에 새싹이 돋듯이 교실 분위기가 생기로 가득 찬다.
 
아, 상상! 그렇다. 우리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다람쥐가 열심히 한여름 더위도 잊고 도토리를 주워 모아 보관해둔 굴을 겨울이면 까맣게 잊어버리듯이 상상이라는 풍요한 창고의 존재를 잊고 현실에 찌들어 산다. 그런 상상의 즐거움을 일깨운 공로로 상상 여행을 안내한 가이드에 대한 감사의 팁이 심심치 않게 답지한다. 
 
연희 할머니는 채소 담당이다. 마당에서 키운 고소한 상추를 씻어서 바로 먹을 수 있게 갖다 주신다. 그날은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야 한다. 정순 할머니는 장류 담당이다. 가끔 된장을 플라스틱 통에 담아 가지고 오신다. 손수 담그신 귀한 된장은 그야말로 ‘금된장’이다. 그 맛이 놀랍게 맛있어 식구들이 그 할머니 된장만 기다린다.
 
유난히 조용하고 태가 고운 소원 할머니는 마늘 담당이다. 가끔 마늘을 갈아 한 통씩 가져다주신다. 그러고 보면 모두 식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들이다. 옛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반장 주도하에 학생들이 돌아가며 아침마다 교탁에 놓아주던 커피 우유니 오렌지 주스 따위들에 비하면 얼마나 정감 넘치고 영양가 풍부한가! 역시 연륜은 인간을 이해하게 만든다.
 
청일점 남학생은 명문대 출신이다. 사실 대졸 출신이 들을만한 강의는 아닌데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몸이 불편하면서도 보행기에 의지해 매번 열심히 출석하신다. 가벼운 영어회화나 가르치는 복지관 강의에 그들이 이토록 열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새로운 것을 배우면 치매 예방에 좋기 때문일까? 어쩌면 배움이란 인간 생명의 원동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 자신이 낡아가고 있다는 자각 때문인지 나이 들어갈수록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커진다. 모험이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육중한 메타세쿼이아가 세월이라는 두꺼운 껍질에 싸여 있듯이 다만 오랜 시간 쌓여온 삶의 무게가 도전의 의지를 누르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 학생들의 빛나는 생기를 보면 상상이라는 작은 모험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입증한다.
 
몇 달 전부터 소원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얼마 못 가실 것 같다는 가족의 전언이다. 그러나 할머니께서 마지막 날까지 새로움에 대한 열정과 상상 여행 속에 무척 행복하셨으리라 확신한다. 마늘을 찧을 때마다 소원 할머니가 많이 그리워질 것 같다.
1970-01-01 09:00 2017-07-23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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