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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시아 향기가 나비처럼 날던 날, 치마 위 반짝이는 반지의 꿈을 타고 다영이가 우리에게 왔다. 외아들과 결혼해서 첫딸을 낳은 후라 아들을 간절히 원했지만 내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차 향기처럼 은은히 스며들어 사랑받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에서 다영이라고 이름 지었다. 아들 낳기를 간절히 바란 내 마음 때문인지 다영이는 좋아하는 장난감, 옷, 행동 등이 모두 사내아이였다. 인형보다는 로봇을, 치마보다는 바지를, 긴 머리보다는 커트를 좋아했다. 태교의 중요성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다영이에 대한 첫 기억은 3살 때인가 어둠 속에서 베개를 껴안고 나를 응시하는 모습이다. 엄마와 함께 자고 싶다는 표시를 그렇게 했다. 말 없는 다영이는 그냥 내가 봐주기만 기다리다 인기척을 느낀 내가 "이리 와." 하면 얼른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수줍음이 많은 다영이가 유치원에서 '동화 구연'을 하는 날이었다. 나는 무척 자랑스러워 동네 사는 친구를 대동하고 작은 꽃다발도 만들어 유치원으로 향했다. 다영이는 단 위에 오르자 앞만 뚫어지라 쳐다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수줍어 그렇나 보다 하고 기다렸는데 내가 아무리 웃으며 권하고 친구를 비롯해 많은 엄마가 응원했지만
그 애는 끝까지 아무 말도 못 하고 내려와야 했다. "엄마와 아줌마를 보니까 다 까먹었어." 나중에 들은 다영이의 변명이다.
 
   언니가 있어 매일 아침 학교 가는 연습을 하고 따라가겠다고 칭얼대던 다영이는 초등학교를 입학한 지 일주일쯤 지난 후 "엄마, 방학이 언제야?" 했다. '이 애는 공부에 취미가 없구나.'라는 생각을 한 나는 눈만 마주치면 그 애에게 물었다. "제일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니?" "으음......  노는 거." 끈질긴 내 물음에 간신히 받아낸 대답은 "그림 그리는 것은 조금 재미있어요." 그 길로 미술학원에 보내고 나는 한 시름 놓았다.
 
   다영이의 성격은 지나치게 느긋하다. 초등학교 때 준비물은 꼭 밤늦게나 학교 가기 직전에 말하기 일쑤였다. 하루는 나뭇잎이 준비물인데 그 애가 내게 말한 시각은 밤 10시였다. 할 수 없이 우리 삼 모녀는 오밤중에 수상한 사람이 없나? 아파트 주변을 둘러보는 경비아저씨와 마주치며 화단에서 살짝살짝 나뭇잎을 따야 했다. 또 "엄마, 신주머니 안 갖고 왔어요. 갖다 줄 수 있어요?" 물론 나는 쏜살같이 가져다 학교 경비실에 맡겼다. 주문도 다양해서 체육복, 숙제, 미술 도구, 우산, 실내화, 화분, 꽃삽 등등 수없이 많았다.
  우리 부부를 닮아 아침잠이 많은 아이를 아침마다 깨우기도 만만치 않았다. 나쁜 습관은 더 강성이 되어 자식에게 이어지고 그걸 견디는 것으로 부모를 괴롭힌 벌을 받나 보다. 아이들을 깨울 때마다 나를 깨우시던 아빠, 엄마 생각이 절로 났다. 준비물 빠뜨리는 습관은 수능 날까지 이어져 "엄마, 시계를 안 차고 왔어요." 나는 수능 시험 시작 5분 전에 교문 창살 너머로 시계를 디밀어야 했다.
 
 재수할 때는 폭탄이 되어 아주 숨죽이며 1년을 보냈다. 다행히 본고사 1달 전쯤 수시로 붙어 겨우 그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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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숨을 좀 맘 놓고 쉴 수 있었다. 서영의 발레 개인지도비도 많이 들었지만
미술 전공도 학원비와 재료비가 만만치 않았다. 불쌍한 남편! 
   그런데 다영이 대학 3학년 때 우리 집이 어려워졌다. 선비 같은 성품에 남을 잘 믿는 남편이 알지 못하는 사업에 손을 댄 것이다. 내가 두 딸에게 한 마지막 선물은 '유럽 배낭여행'이다.
친한 친구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미쳤다!'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은 예약이 끝났고 그 돈이 있다고 우리 경제 사정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첫 외국여행에서 나는 '결혼 전에 외국여행을 했다면 내 삶이 더 풍요로워졌겠다.'라고 느꼈기 때문에 그 여행을 강행했다. 물론 다영이가 결혼 후 갈 수도 있겠지만 가는 시기에 따라 영향력은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서영이는 대학 때 한 번 간 적이 있지만 우유부단한 다영이를 혼자 보낼 수 없어 미리 둘이 가도록 계획한 여행이었다. 서영이 때 처럼 매일 기도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여행 후 다영은 학자금 융자와 아르바이트로 어렵게 대학을 졸업했다.
 
   막 한숨을 돌리려는 차에 다영이가 말했다. "대학원 시험 보면 안 돼요? 교수님이 대학원 가래요." 서영과 나는 그냥 서로 '큰일 났다.'라는 눈빛만 주고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일 중의 하나가 자식이 하고 싶다는데 능력이 안돼서 막아야 할 때이다. 나는 차마 반대할 수 없어 "시험은 한번 봐. 그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다영이는 덜커덕 붙었다. 대학보다 많은 입학금은 또 학자금 융자로 내고 온 가족이 아르바이트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옛말에 '죽으란 법은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다영이는 2학기 등록 직전, 졸업 때까지의 전액 장학금을 '한국 지도자 육성 장학회'에서 받았다. 졸업 전후 작품을 인정받아 여러 차례 상을 받고 '초청 전시회'도 몇 번 열어 나는 지킴이로 차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가정 형편상 작가의 길을 갈 수는 없었다. 디자이너로 취직한 다영은 학자금을 제힘으로 다 갚았다.

   "작가는 나중에도 할 수 있어. 때가 되면 꼭 다시 하렴. 세계적인 작가, 홍다영!" 내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다.
   미처 말하지 못한 다영이의 큰 장점은 아빠를 닮아 재치있고 남의 마음을 잘 읽는 점이다. "엄마, 언니가 짜증 내서 기분 나쁘셨지요. 언니는 엄마 생각 참 많이 해요. 엄마한테 밖에 마음을 내보일 수 없어서 그런 거예요. 엄마도 아시죠."
 내 마음의 보약! 다영아,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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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1 21:23 2012-08-02 22:03

Comments List

  1. 모과향기 2012-08-03 13:59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모전여전이란 말이 딱 맞네요.
    미령씨의 글을 보면 항상 느긋함과 씩씩함이 느껴져요.

    1. 박미령 2012-08-03 14:44 # 수정/삭제 퍼머링크

      그런가요 ㅎ ㅎ 고맙습니다

  2. 후리지아 2012-08-03 14:03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가슴뭉클하게 또 코끝이 시큰하게 눈가가 촉촉해지는 이 느낌은....
    진솔한 글 잘 읽었습니다. 다영이 서영이가 있어서 미령님은 행복하시겠습니다.^^

    1. 박미령 2012-08-03 14:45 # 수정/삭제 퍼머링크

      맞습니다 고맙습니다

  3. 장현덕 2012-08-03 15:02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다영이에 대한 사랑이 잔잔하게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자식 키우는 재미가 그런건가요?
    앞으로는 더 큰 기쁨이 오리라 생각됩니다.
    기대하세요.

    1. 박미령 2012-08-03 16:37 # 수정/삭제 퍼머링크

      큰 희망 주셔서 감사합니다

  4. 초록바다 2012-08-03 19:33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두 따님이 모두 예술 분야에 특기가 있었군요.
    만만치 않은 뒷바라지를 하신 미령님 대단하셔요.
    사랑으로 최선을 다해 키우신 보람이 날로 나타날 것입니다.^^*

    1. 박미령 2012-08-03 21:20 # 수정/삭제 퍼머링크

      아닙니다.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지요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5. 추영탑秋影塔 2012-08-03 20:35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한 편의 다큐멘터리네요. 역시 박미령 님은 엄마다운 어머니이십니다. 가스레인지에 가스 떨어졌을 때의 경우를 보고
    전 이미 짐작했답니다. ㅎㅎ 둘째 따님이 꼭 작가가 되는 날이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웃어야지요? ㅎㅎㅎ ㅎㅎㅎ !!

    1. 박미령 2012-08-03 21:21 # 수정/삭제 퍼머링크

      웃겠습니다. 복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6. 어진수니 2012-08-04 09:45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마음의 보약 다영에게 홧팅을 보냅니다.
    "세계적인 작가, 홍다영"
    엄마의 소원의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1. 박미령 2012-08-04 14:44 # 수정/삭제 퍼머링크

      축복해주시니 감사합니다.

  7. 장명신 2012-08-05 04:58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다른 건 다 냅두고라도 일단 외모가 빛이 나는 아름다운 다영양, 앞날을 축복합니다^^

    1. 박미령 2012-08-05 12:58 # 수정/삭제 퍼머링크

      예쁘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축복해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8. 배꽃 2012-08-06 11:51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내가 채하님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돌아보게 됩니다.
    참 멋진엄마를 닮은 멋진 딸들이네요~~
    세계적인 작가 홍다영...기대합니다~~

    1. 박미령 2012-08-06 22:20 # 수정/삭제 퍼머링크

      닥치면 다 하게 마련입니다. 축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9. 로즈마리 2012-08-07 15:33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저도홧팅을 외치고싶습니다.
    엄마는 언제나 자식앞에선 용기가생기는가봅니다.
    두딸들에게 축복을 빌어봅니다.

    1. 박미령 2012-08-07 16:37 # 수정/삭제 퍼머링크

      그렇지요. 용기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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