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사박사박 내리는 저녁, 화로에 둘러앉은 우리 형제는 바느질하시는 외할머니의 옛날 얘기를 듣는다. 화로 속 고구마, 감자, 밤이 톡톡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나면 할머니는 긴 화젓가락으로 한 번 휘젓고는 바느질과 이야기를 계속하신다. 화로 속 숯불 사이로 할머니 이야기 장면이 떠오른다.
 
이런 오래된 기억 때문인지 소설, 드라마,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이야기가 있는 전시해설 스마트 큐레이터> 프로그램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어 얼른 달려갔다. 특히 이번 프로그램의 주제인 ‘사랑은 아름다워’는 박물관 전시품 중 사랑이 담긴 것들만을 둘러보며 설명을 듣는 것이다.
 
고대인의 사랑은 다산과 연결된다. 고대 농경 사회는 인간이 가장 중요한 노동력이므로 다산이야말로 큰 자산이었다. 그래서 다산을 염원하는 사랑 행위를 표현한 토우(土偶)를 많이 남겼다. 문명에 물든 현대인의 눈에는 민망할지 모르나 그들에게는 성스런 행위이므로 각종 기명(器皿)에 새겨져 유물로 남아 있다.
 
이런 고대 문명은 풍만한 비너스 조각이나 콩고 강 유적 중 여자의 가슴과 배에 일부러 새긴 상흔을 통해서도 알 수 있으며 모계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뱀과 개구리 등 겨울잠을 자는 동물을 곁들인 것은 다시 깨어나는 소생의 이미지를 부여하여 강한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했다.
 
사랑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고려의 유물로는 개성에 있는 고려 공민왕(현릉)과 노국대장공주(정릉)의 무덤이 있다. 합장한 두 무덤 사이에는 손 하나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는데 이는 영혼까지 이어지는 지극한 사랑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공주는 고려 말[言], 고려 음식을 배우며 공민왕을 극진히 내조했다. 감수성이 뛰어난 공민왕은 아기를 낳다 죽은 공주를 잃은 슬픔을 거문고를 켜며 달랬다. 그 거문고가 수덕사에 보관되어 있다니 거문고를 보기 위해서도 다시 한 번 수덕사에 들러봐야겠다.
 
사랑을 담은 엽기적인 유물로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도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1584년 조선 선조 때 병든 이응태가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와 관련된 유물인데 이응태의 애틋한 사랑도 감동적이지만, 임신한 아내가 자기 수명을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에 짚과 자신의 머리카락을 섞어 병든 남편의 미투리를 삼았다니 상상하기 어려운 애틋한 사랑이다.
 
1840년 추사 김정희가 후처인 예안 이 씨에게 보낸 편지 또한 절절하다. 먼저 간 예안 이 씨를 애도하며 지은 ‘도망처가(悼亡妻歌)’에서는 ‘내세에는 부부가 바꿔 태어나 내가 죽고 그대가 살아 나의 이 슬픔과 고독을 그대가 알게 하리.’라고 하여 죽음보다 더한 슬픔을 표현했다.
 
어떤 인연이면 부부로 60년을 함께할 수 있을까? 질서와 조화, 의리의 상징인 기러기에 맹세한 결혼은 표주박 술잔에 담긴 술을 나눠 마시며 하나가 된다. 그 사이 말 못 할 회한과 고통은 얼마나 많았으랴! 그래서 회혼례는 60번의 염량(炎凉)을 거친 곰삭은 사랑으로 김홍도의 <평생도> 중 가장 중요한 그림이다.
 
 
세계 불가사의한 건물 중 하나인 타지마할도 지고지순한 사랑의 산물이다. 이는 무굴제국 5대 왕 샤자한이 왕비 ‘뭄타즈마할’(궁궐의 보석이라는 뜻)을 위해 지은 아름다운 무덤이다. 그녀는 17년 동안 결혼 생활 중 15번째 아기를 낳다 죽었다.
 
안타깝게도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의 반역으로 아그라 성에 갇힌 샤자한은 죽는 날까지 지척에 있는 타지마할을 바라보는 낙으로 살았다.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른 건축물이지만, 오늘날 인도 후손들이 관광으로 먹고살게 했으니 이것도 사랑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나절 사랑이야기를 들으며 박물관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마음은 사랑으로 충만하여 사랑을 듬뿍 받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패드의 도움을 받아 해설을 들으니 사랑도 필요할 때 충전시켰다가 방전되면 다시 플러그에 꽂아 보충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70-01-01 09:00 2014-02-05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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