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학교 앞이나 소풍 간 유명 관광지에는 ‘우정을 영원히...’ ‘영원한 사랑’ 등의 거울이나 기념품 등이 종종 있었다. 인간이 유한한 운명이라는 사실이 무의식중에 ‘영원’을 사모하게 하나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영원’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안다. 그 ‘영원’을 제목으로 단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 그래서 흥미를 끌었다.
 
이 영화는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비평가들의 평가는 좋아 영국 미국 여러 시상식에서 각본상(찰리 카우트만), 제30회 새턴 어워즈 (2004) 최우수 SF영화 감독상, 제25회 런던 비평가 협회상 (2005)에서 영국 여우주연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게 아까웠는지 이번에 10년 만에 다시 재개봉된 것이다. 늦게나마 놓치지 않고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첫 장면에서 출근하다 문득 몬탁에 가고 싶어 기차역으로 달려가는 남자 주인공 조엘(짐 캐리)이 뭔가 일을 벌일 것 같아 관객의 마음을 확 잡아끈다. 여주인공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의 반쯤 푸른빛 염색 머리도 예사롭지 않다. 뻔한 멜로 영화를 상상했던 관객들의 예상은 기억을 지우는 회사를 찾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신선하게 반전한다.
 
 
남녀 관계가 늘 그렇듯이 호기심은 사랑이 되고 화학적 결합의 시간이 지나면 사랑도 일상이 된다. 그 일상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남녀는 헤어진다. 헤어진 후 허전함과 고통은 시간만이 해결책이다. 그러나 이런 건 어떨까? 강제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SF와 뒤섞인다. 조엘은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라쿠나’ 사를 찾는다.
 
라틴어로 라쿠나(Lacuna)는 잃어버린 조각’이라는 뜻이라니 이름마저 기발하다. 거기서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라쿠나 사의 단골이라 이미 조엘과의 추억을 모두 지워버린 걸 알게 된다. 조엘도 유감없이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싹 다 지우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영화는 다시 반전을 시도한다. 조엘은 클레멘타인과 사랑이 절절했던 순간의 기억만은 간직하고 싶어진다.
 
공교롭게도 조엘의 의사가 잘 전달되지 않아 기억 지우는 과정을 멈추지는 못하지만, 조엘은 기억 속에서 끝까지 도망 다니며 저항한다. 멈추고 싶은 몸부림에서 내뿜는 애틋한 진실은 사랑의 끝 간 데 없는 표현으로 이어진다. 이 부분이 네티즌이 다시 보고 싶은 멜로 영화의 정수에 이른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추억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실험 정신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자 과연 이들은 다시 만났을 때 처음처럼 똑같이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흥미 있는 설정이다. 만약 서로 소 닭 보듯 한다면 사랑은 우연의 산물이 될 것이고, 또다시 서로에게 빠진다면 운명론이 될 터이다. 이들은 어떨까? 미셀 공드리 감독은 운명론의 손을 잡는다.
 
망각은 진정 신의 선물인가? 추억은 늘 더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인가? 어쩜 사랑은 그 순간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 잃어버린 사랑 조각이 모여 추억은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공된다. 역사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는 ‘진실은 구성되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모두 자신의 가공된 기억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뇌는 자기가 관심 갖는 것을 기억한다든가?
 
게다가 다시 기억이 백지인 상태에서 만나도 다시 그 사람을 사랑한다니 이 무슨 조화인가? 그럼 모든 것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하지만 운명도 우리의 선택이다. 선택은 자신의 유전, 교육, 경험, 우연, 필연, 습관, 기호 등의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결합하여 결정된다. 이런 선택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운명이 된다. 그럼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인가? 자발적인 것인가? 어쨌든 지금의 짝이 최선이라는 얘기다. 마음은 편해진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에 따라 클레멘타인의 머리카락 색이 바뀌는 섬세함은 신세대 감독 특유의 감각이 더해졌다. 기막히게 아름다운 해변 장면과 관객의 마음을 적시는 음악이 영화의 감칠맛을 더한다. 개인적으로 여주인공 이름 클레멘타인이 맘에 든다. 어린 시절 부르던 노래 속 낯익은 이름 아닌가?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어린 시절 기억을 자극하는 영화의 애피타이저로 그만이다.
 
영화 속 대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잊는 것으로 세상은 잊힌다. 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 어느 이뤄진 기도, 어느 체념된 소망.”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의 시 "Eloisa to Abelard(엘로이즈로부터 아벨라르에게)"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영화를 다시 한 번 보며 음미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나의 이해력 부족 때문인지도 모른다.
 
* 사진은 <이터널 선샤인> 영화 사이트의 것 입니다.
 
1970-01-01 09:00 2016-01-03 10:45
댓글
2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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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황수현 2016-01-04 16:09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영화 한편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이 사랑의 망각이 전해주는 쓸쓸함이 아닌..긍정의 반전을 시키시는군요.
    행복한 새해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1. 박미령 2016-01-14 17:59 # 수정/삭제 퍼머링크

      그저 망각으로 없애버리기에는 안타까운 사랑입니다. 더 활기찬 새해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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