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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업신여겨서는 큰코다친다. 살다 보니 어느 구석에서건 모른 체할 수 없이 딱 마주치는 순간이 있다. 그때 이전 행동의 값을 톡톡히 치르게 마련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이 나이가 돼서야 체험으로 알겠다. 다행히 아직은 악연으로 고생한 적이 없지만, 삶의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큰소리도 잘난 척도 할 처지는 아니다.
 어디에 숨었던 작은 불씨가 큰 화재로 번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서두를 매우 거창하게 떠들었지만, 이번에는 생각지 않은 만남으로 훌륭한 연극을 보게 되었다. 작년 큰딸 덕에 묻어갔던 멕시코 여행 일행 중 한 사람이 이 극의 작가다. 그녀의 초대다.

 생소한 숲의 이름이 제목인 극은 내용을 짐작할 수 없어 신비스럽고 궁금했다. 브루스니까는 눈보라 속에서도 꿋꿋이 견디며 빨간 열매를 맺고 있는 나무다. 낭만적인 상상을 배신한 의미는 사할린 동포들 마음의 생채기가 피멍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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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한국은 해방되었지만, 전쟁의 여운은 끝나지 않았다. 어린이들에게 더 가혹한 전쟁은 그들을 낯선 길을 따라 흐르게 내버려둔다. 한 소녀는 알 수 없는 순간에 아기 엄마가 되고 그 엄청난 굴레를 견딜 수 없어 미쳐버린다. 미치광이가 되어서도 잊을 수 없는 핏줄의 끌림은 굴레의 주위를 맴돌며 아들을 만난다.
 속절없이 태어난 아들은 의붓아버지의 딸 따냐에게 정(情)의 뿌리를 내린다. 그 뿌리가 자리를 잡을 무렵 예기치 못한 사고로 소년의 삶은 뿌리째 뽑히고 만다. 할 수 없이 택한 새 정착지는 북한이다. 같은 말을 쓰는 민족이 턱없이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보다야 낫지 않을까? 해서 내린 결정이었을까?
 남겨진 따냐는 버림받았다는 느낌에 믿을 수 없는 사랑보다는 안정된 삶이 나을 것 같아 택한 남자가 아버지 친구, 그의 남편이다. 평생 룸펜으로 한국만 그리며 사는 남자. 이제 따냐는 꿈도 없이 아이를 키우며 흘러가는 대로 그냥 산다.
 이때 다시 나타난 어린 시절의 남자가 따냐 마음에 사랑의 불씨를 끄집어내어 다시 지펴본다. 그녀도 잠깐 흔들리지만, 그는 이미 북한의 꼭두각시가 되어 폭탄을 품고 이곳에 왔다.
 인연의 끈은 다시 끈질기게 이어지고 눈 속에도 빨간 열매가 달린 브루스니까 숲에서 맞닥뜨려진다. 그들 자신은 이미 빨간 열매로 익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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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은 상처로 시간의 깊이만큼 마음이 파인다. 조국에 대한 마음은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도 훈훈함을 느끼며 자석처럼 끌려간다. 그 처절한 삶, 그 아픈 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시간의 엇갈림으로 살짝 비껴간 내 운명일 수도 있었던 그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복을 빌어본다.
 오늘을 잘 살아 선한 바람이나마 그쪽으로 불어가도록 애써본다.

* 김민정 작가, <브루스니까 숲> 연극 관계자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2-12-24 08:05 2012-12-24 08:05

Comments List

  1. 청학 2012-12-24 09:22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꾹꾹 추천하고 갑니다. 제목이 연극을 보고 싶어지게 합니다

    1. 박미령 2012-12-24 22:04 # 수정/삭제 퍼머링크

      의미 깊고 좋은 연극이었어요. 그런데 아쉽게도 끝났습니다. 저도 늦게 보게 되어 후기가 늦었습니다. 청학님의 헌신적인 사진 강의 감사합니다. 제 친구도 늘 감동하고 있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2. 나의 복숭 2012-12-24 09:44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미령님.
    편집위원 되셨단 소릴 친구를 통해 들었어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시니어 8기 임무 기간을 마치자말자
    개인적으로 힘든일이 생겨서 유어스테이지를 잘 못왔어요.
    그래서 인제서야 늦은 축하 인사를 드리게 됨을 양해해주시길...
    일단 추천부터 누르고 갑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셔요.

    1. 박미령 2012-12-24 22:06 # 수정/삭제 퍼머링크

      저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복숭님 힘든 일은 올해로 졸업하시고 축복받는 새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3. 후리지아 2012-12-24 16:29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전쟁의 상처가 우리들의 삶속에 크든작든 남겨진 그늘들이 이런 연극을 만들어 내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브루스니까란 열매가 인간에게 매우 유용한 신비의 약초로 알려져 있다는걸 처음 알았습니다. 좋은 연극들이 많이 만들어진다는건 참 좋은 현상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1. 박미령 2012-12-24 22:08 # 수정/삭제 퍼머링크

      저도 생소한 이름이에요. 후리지아님 새해에는 하시는 일이 더 번창하시길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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