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대학로의 화사하던 벚꽃이 가냘픈 봄비 한 번에 털 빠진 강아지 꼴이 되었다. 파장한 오일장처럼 을씨년스럽게 봄비에 젖은 선거 벽보가 시간의 무상을 웅변한다. 새삼 로마 개선장군의 수레에 함께 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노예로 하여금 외치게 했던 그들의 죽음에 대한 절박이 가슴을 친다.
 
꽃비를 맞으며 대학로 길을 방황한 이유는 이강백의 연극 <심청>을 보기 위해서다. 이강백이 누군가. 한때 연극판에 군림하던 시절이 있었다. 숱한 문제작으로 대학로를 지배하던 그가 오랜만에 연극 한 편을 들고 나타났다. 그런데 고작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심청>이라니! 이강백의 무게로 볼 때 <심청>에 대한 새로운 해석일 것은 당연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극장에 들어섰다.
 
예측한 대로 고전 <심청전>을 비틀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우선 흥미로운 것이 극 중의 선주가 실제 <심청전>의 작자로 나온다. 당시의 선주는 오늘날의 재벌에 해당하는데 풍파에 배가 가라앉는 것을 막기 위해 늘 산 제물이 필요하다. 그러니 일반 대중이 제물이 되는 것에 거부감이 없도록 <심청전>을 통해 ‘효’라는 이데올로기를 퍼트린다는 해석이다. 
 
 
극은 제물로 팔려온 간난과 선주의 대화로 시작된다. 선주는 간난을 왕비 대하듯 절을 하고 식사를 극진히 권한다. 이 부분은 아마도 예부터 제물을 귀하게 대해야 제사의 효과가 크다는 당시의 미신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포장되어 있다. 물론 간난을 인당수까지 끌고 가기 위한 전략이 더해졌을 것이다. 또 제물이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야 용왕님의 분노를 더 가라앉힐 수 있다는 믿음도 한몫했을 것이다.
 
선주 정성은 끝도 없이 이어지지만, 간난은 끄떡도 안 한다. 고전 <심청전>의 심청과 다르게 간난은 죽음을 거부한다. 아마도 그것이 합리적이라고 해석한 듯하다. 여기에 후임 선주 자리를 노리는 세 아들이 각각 자신의 역량을 맘껏 펼칠 양으로 사후 영생, 왕비 환생 등의 감언이설로 꼬드기지만, 그것도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시간이 가며 상황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선주와 간난이 서로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납치범에 동화되어 가는 ‘스톡홀름 신드롬’이 떠오른다. 스톡홀름 신드롬은 1973년 스톡홀름에서 일어난 은행 강도 사건 인질극에서 비롯된 정신적 이상 상태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전문 용어다.
 
 
간난이 선주에게 사랑을 느끼고 선주는 간난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고 그녀를 도망시키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한다는 전개는 분명 붙잡힌 인질이 자신을 납치한 범인에게 동화되고 연민의 정을 느끼고 납치범의 행동을 사랑이라고 해석한다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의심케 한다.  
 
결국, 선주는 노환으로 죽고 간난은 선주의 설득에 감화되어 여러 사람을 살리는 의미 있는 죽음이라는 생각에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심청전>의 결말을 완성한다. 여기서 두 사람의 행동은 대비를 이룬다. 평생 죽음을 권유했던 선주는 삶의 애착 때문에 발버둥 치고 간난은 독립투사처럼 의연하게 죽음을 선택한다.
 
극은 이제까지 알고 있던, 상투적인 효를 강조하는 유교 이데올로기적 스토리가 아니고 선주와 간난 등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파헤쳐 신선하게 관객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더욱이 <심청전>은 제물을 쉽게 얻기 위해 선주가 써서 퍼뜨리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력도 퍽 재미있다. 그러나 마지막을 죽음에다 방점을 찍은 것은 다소 의외다.
 
 
기존의 <심청전>을 스톡홀름 신드롬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 매우 신선했고, 작중 인물 간난의 심리가 역동적으로 묘사된 것은 훌륭했지만, 결론이 다시 거룩한 죽음으로 귀결된 것은 다소 상투적이다. 아울러 선주의 죽음을 오버랩시킨 것은 너무 작위적으로 몰아간 느낌이다. 서로 다른 주제가 어색하게 결합하여 일관성에 흠을 남겼다.
 
이강백은 <북어 대가리> <파수꾼> 등으로 연극계에 널리 알려졌다. 대한민국 문학상, 서울연극제 희곡상 등도 받았다. 운명적 조건 아래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작가로 유명한 그는 이 극에서도 심리를 낱낱이 꿰뚫는다. 다만 마지막에 선주와 간난의 비뚤어진 사랑이 미화된 것이 옥에 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폭력적 사랑도 사랑이라는 시각은 위험하다.
 
극의 양념은 ‘떼아뜨르 봄날’의 북, 기타, 종, 판소리 구음 등이 맡는다. 등장인물의 등퇴장을 알리는 청아한 종소리는 관객의 마음을 잡아끈다. 심장을 두드리는 북소리와 고전극에 맞지 않을 것 같았던 기타 선율은 극 속에 녹아들어 분위기를 쥐고 흔든다. 이따금 들리는 판소리 구음도 관객들의 마음속에 스민다.
 
선주 보좌의 마임 속 춤사위 짙은 동작도 일품이다.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것은 선주의 절이다. 그렇게 곱고 정성스럽게 절하는 자태는 평생 처음 본다. 그것도 남자가. 몇 가지 흠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잘 만들어진 ‘웰메이드 연극’이라는 느낌이다. 연극이 끝나고도 죽음에 대한 상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1970-01-01 09:00 2016-04-30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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