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장르가 애초 그렇다.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다양한 주제들을 녹여 내며 각자 취향에 맞게 찾아서 보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봐도 졸작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화가 다름은 있을지언정 우열을 말할 수는 없을 듯싶다. 딸이 이벤트에 당첨되어 같이 가자고 하기 전까지 이 영화의 존재를 몰랐던 것은 단지 필자의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관심이 없다 보니 어떤 선입관도 있을 리 없다. 다만 우월하게 멋진 현빈이 출연한다는 것이 조금 기대되기는 했다. 그밖에 유해진과 김주혁이 동반 출연하는데 최근 그들이 방송 연예 프로에 자주 얼굴을 내밀어 자칫 몰입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영화는 생각 이상으로 진지했다. 두 배우의 내공이 영화를 완성도 높게 이끌었다. 
 
주요 줄거리는 남북의 공조 수사를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이야기다. 북한의 특수요원 차기성(김주혁)은 북한이 은밀히 제작하는 위조달러의 동판을 차지하려 부하 림철령(현빈)을 대기시킨다. 차기성의 지시를 어기는 바람에 사랑하는 아내와 동료를 모두 잃은 림철령은 동판을 탈취하여 남한으로 도주한 차기성을 잡으러 남한에 공조 수사 요원으로 파견된다.
 
한편 하는 일마다 말썽이 끊이지 않는 남한 형사 강진태(유해진)는 상사의 주선으로 이 공조 수사에 남측 파트너로 참여하게 된다. 북한 형사 림철령은 차기성을 찾아 복수하고 동판을 회수하려 하며, 남한 형사 강진태는 그것을 저지하여 국정원이 차기성을 체포하고 동판을 압수하는데 시간을 벌어 주는 역할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일이다.
 
둘이 공조 수사라는 목표는 같지만 서로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다는 역설적 상황에서 갈등구조가 만들어지고 재미가 탄생한다. 과거에도 형사물 버디무비는 제법 만들어졌다.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꽤 되는데 우선 <투캅스>가 떠오르고 유사한 설정의 <의형제>가 있었다. 그러나 같은 목적이 아닌 동상이몽을 지향하는 영화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이 영화는 현빈과 유해진을 먼저 전제로 해놓고 영화를 제작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둘의 역할과 캐릭터는 선명하다. 이들에 의해 동상이몽이 제대로 작동하고 절묘하게 표현되었다. 유해진의 장기인 유머는 적시에 치고 들어오고 현빈의 과묵한 액션은 현란하다. 특히 도로 추적 장면과 총격신은 우리 영화 수준이 이미 할리우드에 근접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 가지 보는 내내 떨치기 힘든 찜찜함은 기시감(旣視感)이었다. 대부분의 장면이 거의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표현들이라는 점 때문이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브루스 윌리스의 영화 <다이하드>의 문법을 따른 느낌이다. 유해진의 능글능글한 유머는 브루스 윌리스를 닮았으며, 마지막 발전소 총격 장면은 <다이하드>에서 익숙하게 보던 설정이 아닌가.
 
우리나라의 영화 제작 환경이 할리우드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하여 시나리오에 큰돈을 들이지 못하는 사정이 비슷비슷한 영화가 짜깁기 형태로 등장하는 이유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공조>도 그런 혐의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서도 이런 정도의 완성도 있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평가해 줄만 하다. 
 
김성훈 감독은 자기가 의도한 것은 모두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듯이 과잉 의지로 스릴러, 액션, 코미디뿐만 아니라 심지어 눈물 나는 가족애까지 남김없이 쏟아부었으나 그것들을 반죽하는 공을 들이지 못하는 바람에 전체적으로 어설픈 느낌을 주었다. 그렇지만 재미라는 영역에서는 합격점을 받았다. 엄숙한 평론가들은 의미만 강조할지 모르나 재미가 큰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 사진은 사이트의 것입니다.
1970-01-01 09:00 2017-03-0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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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인사를 나눈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새해가 오면 무언가 기적 같은 일이라도 일어나 달라지는 것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건만,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정치권은 여전히 싸우고, 경제는 여전히 나쁘고, 주말마다 촛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새해를 맞으며 매섭게 결심했던 다이어트의 약속은 여전히 예년과 다름없이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물 건너갔다.
 
기나긴 열두 달 중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뭘 그리 초조해하느냐고 젊잖게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눈치 빠른 우리는 현실이 늘 인간의 기대를 배반해 왔으므로 이번에도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미 알아버린다. 그리고는 그 책임을 인간의 무책임한 기대 때문으로 돌린다. 기대가 지나치게 크거나 지나치게 앞서가다 보니 늘 현실과 동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주역(周易)>은 세상 이치를 ‘변치 않는 유일한 진리는 만물은 변한다는 사실이다.’라는 한 줄로 요약한다. 인간의 운명은 우주의 천변만화(千變萬化) 속에서 역동적으로 결정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세상은 무섭게 변하고 있는데 우리만 그 변화를 모르면서 세상에 변하는 게 없다고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쑥스럽기도 하다.
 
하긴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적도 기준으로 시속 1,670Km로 돌고 있고, 동시에 시속 10만 8,000Km로 태양의 둘레를 회전하고 있고, 태양계는 시속 82만 8,000Km로 은하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어지러워 정신을 차리지 못해야 마땅한데 인간들은 아무 움직임도 느끼지 못하고 바뀌는 게 없는 것으로 오해하며 변화가 없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닌지.
 
사실 우리 인간의 지각이란 게 믿을 게 못 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파란 약과 빨간 약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파란 약을 먹으면 지금처럼 편한 세상에서 맛있는 것을 먹으며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 늙어갈 수 있다. 하지만 빨간 약을 택하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정한 현실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매트릭스>를 끝까지 본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진정한 현실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현실이 아니면 어때? 아무리 허위라도 내 혀가 맛있는 스테이크의 육질을 느끼면 그만 아닐까?’라며 파란 약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은 나의 오감으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세계니까. 그러나 그 안락한 지각의 세계가 사실은 가짜라고 영화는 말한다.
 
변화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현실의 하루하루가 쌓이면 역사가 된다. 누추하고 타락한 현실들이 쌓이면 누추하고 암울한 역사가 된다. 역사를 새롭게 하는 힘은 그나마 매번 우리를 배반하는 ‘지나친’ 기대 덕분은 아닐까? 1월에 못했으면 어때 2월에 하면 되지. 그렇지 그렇게 하면 되겠군. 다시 편안한 마음으로 기대 가득한 새로운 2월을 맞이한다.
 
 
 
 
 
1970-01-01 09:00 2017-02-26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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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 야아 정초부터 희한한 소리 들었다 아이가.”
“또 뭔 소리를 들어 아침 댓바람부터 이 난리랴?”
마을 소식통 갑순이 엄마가 새벽부터 설레발을 떤다. 그래도 이 산골의 유일한 뉴스제공자니 이야기는 들어봐야 한다.
 
“긍께 읍내 그 김 사장 님댁 말이여. 그 김 사장이 여태 두 집 살림을 허잖여.”
“그 기야 뭐 온 마을이 뚜루루 다 아는 비밀 아니여.”
“근디 그 사모님이 한 달에 한 번 오는 사장님을 위해 그 전날 장을 보고 한 상 떡 벌어지게 채려낸다는 거여.”
 
“뭐여? 그 사모님은 밸두 없나? 대체 와 그런댜?”
“그 사모님이 원캉 음식 솜씨가 좋찮여. 서울 어딘가 뭐 황 뭔가 하는 문화··· 뭐라더라. 응 응 그려 그 문화재한테 요리를 배웠다쟎여.”
“문화재는 뭐 절이나 그런 거 아녀. 내는 문화재가 요리 가리친다는 야그는 금시초문이랑께”
“암튼 뭐 이름난 요리 선생인가 벼.”
 
“그려? 그건 그렇다 치고 아이고 본처 망신도 유분수지.”
“그뿐이 아니여. 그 사장님이 첩한테 갈 때는 또 바리바리 싸준다쟎여.”
“뭐야!”
그제서야 산나물 다듬던 순남이 엄마가 바구니를 엎어버릴 정도로 열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순 어매 눈을 똑바로 맞추며 희한한 얘기에 분기탱천했다.
 
“이게 뭔 말이여? 그 불여우 대글팍을 다 뜯어놔도 시원치 않은 판국에······ 그 사모님 좀 맛이 간 거 아녀?”
갑자기 순남 어매는 순남 아베 아침 해줄 생각도 잊고 갑순 어매 얘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뿐 인 줄 알어? 아주 집을 홀까닥 뒤집어 소지도 하고 젤로 이뿐 옷 입고 기다린댜.”
“오매 오매 남사스럽어라. 그기 참말이여?”
 
“뭐가 남사스러워?”
언제 왔는지 순남 할매가 말을 거들었다.
“니들은 안 늙어봐서 모르는 겨. 늙으면 사내 세끼 밥 채리는 게 월매나 귀찮은지 알어? 그런께 핸편으로 생각하면 그 작은댁이 고마울 수도 있는겨. 글쿠 그려도 냄편이 따박따박 돈 대 주구 봉급날 오듯 찾아오잖여. 그럼 반갑재. 그러니께 그렇게 하는 겨. 갈 제 싸주는 건 담에 또 오라는 소리여. 그래두 느그 냄편들은 하루하루 사느라 코가 대자 오치나 빠져 딴생각 할 겨를두 없는 건만도 고맙게 생각혀.”
 
그 말에 길게 코가 빠진 갑순 어매는 슬그머니 뒤돌아 나가며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뭐 그럴 주제나 되간디여. 허긴 워디 외간여자를 볼 수나 있어야제.”
  
1970-01-01 09:00 2017-02-19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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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는 찬란한 영화의 시대였다. 종로 을지로 충무로는 물론이고 심지어 영어 자막에 간신히 의지하는 프랑스 영화를 보기 위해 반은 겉멋으로 프랑스문화관을 드나들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중에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영화 두 편이 있다. 하나는 알랭 들롱이 주연한 <태양은 가득히>이고, 또 한 편은 라이언 오닐과 알리 맥그로우가 함께 나온 <러브 스토리>이다. 
 
풋풋했던 젊은 시절의 알랭 들롱은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선과 악이 교차하는 미묘한 눈빛으로 푸른 바다 하얀 요트 위에서 작열하는 태양을 올려다보는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러브 스토리>는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눈이 오는 하버드 교정에서 아이들처럼 눈 장난을 하며 즐거워하던 장면을 배경 음악과 함께 잊을 수 없다. 
 
<태양은 가득히>는 훗날 훈남 배우 맷 데이먼을 내세워 <리플리>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했지만, 가슴에 새겨진 알랭 들롱의 강렬한 눈빛을 이길 수는 없었다. 얼마 전 <러브 스토리>의 실재 인물의 거짓이 드러났다. 알리 맥그로우가 연기한 그녀는 래드클리프 여대를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의 영화 <러브 스토리>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첫사랑은 그런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마음에 각인되어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기억을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고 읊었다. 서정주 시인은 <국화 옆에서>에서 국화를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라 노래했다. 첫사랑은 알랭 들롱의 눈빛처럼 강렬하고 <러브스토리>의 눈싸움으로 언제나 마음속의 국화처럼 아름답고 포근하게 남아 있다. 
 
첫사랑은 우두 자국과 같다. 어린 시절 우리는 몇 가지 예방주사를 맞곤 했다. 지금은 그럴 리 없지만, 의료 기술이 낙후했던 시절 우두 주사가 제일 말썽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대부분 어깨에 희미한 우두 자국을 낙인처럼 지니고 살게 되었다. 첫사랑도 우리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것은 첫사랑이 아니다. 
 
첫사랑은 대개 일방적이다. 때로는 쌍방통행의 무르익은 사랑이 어쩔 수 없는 저항에 부딪혀 이루지 못한 첫사랑도 있다. 그래서 첫사랑은 늘 안타깝고 수줍어서 다가갈 수 없는 그 어디쯤에 있다. 첫사랑은 신이 인간에게 번성의 필요충분조건인 사랑의 마법을 알게 하려고 인간에게 놓아준 사랑의 예방주사다. 예방주사를 맞고 병에 걸리지 않듯이 첫사랑의 열병이 진짜 사랑으로 번지면 그것은 이미 첫사랑이 아니다. 
 
어린 시절 거의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가 버린 정유년을 60년 만에 다시 맞았다. 김용택은 그의 시 <첫사랑>에서 ‘인생은, 사랑은 시든 게 아니라네/ 다만 우린 놀라움을 잊었네/ 우린 사랑을 잃었을 뿐이라네’라고 읊었다. 
 
정월 아침 새해라는 새하얀 눈길에 첫 발자국을 찍으며 마음속에 희미해진 첫사랑의 우두 자국을 찾아보자. 풋풋했던 시절 수줍은 첫사랑의 설렘이 잃었던 우리 삶의 열정을 되살려 줄지 누가 알겠는가.
1970-01-01 09:00 2017-02-12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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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공조>에 이어 딸 덕분에 <더킹>마저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본의 아니게 설 극장가를 휩쓸고 있는 두 편을 모두 본 셈이다. 1+1 티켓이 생겼다니 안 보면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 선호하는 취향의 영화가 아님에도 보고야 만 것이다. 마트에 가서 1+1이라면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사 들고 나오는 심정으로 딸과 함께 영화관으로 향했다.
 
물론 지난번 <공조>를 볼 때도 주인공 현빈으로 마음을 위로하며 극장으로 향했지만, 뜻밖에 재미와 함께 새로운 김주혁을 얻었듯이, <더킹>에서도 정우성과 조인성만이 아닌 새로움과 재미를 어느 정도 기대하긴 했다. 더욱이 감독이 <연애의 목적>(2005), <관상>(2013) 등을 연출한 한재림이라니 어느 정도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다. 
 
영화는 <베테랑>이나 <내부자들> 같은 영화의 계보를 잇는 정치 풍자극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흥행에 성공하는 사회적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 그것이 선진국으로 향한 대중의 열망 때문이라면 좋겠는데 갈수록 양극화로 삶이 팍팍해지고 거기에 기름을 쏟아부은 최 모 씨 덕분에 이런 영화들이 잘 된다고 생각하니 입맛이 조금은 씁쓸하다.
 
줄거리는 이렇다. 싸움질만 하던 문제아 태수(조인성)는 사기꾼 아버지가 검사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아 “저게 힘이다. 진짜 힘!”이라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다. 그리고 마치 영화처럼(?) 서울대 법대에 합격하고 사법시험에 패스한다. 게다가 방송국 아나운서이자 재력가의 딸인 상희(김아중)와 결혼까지 한다. 
 
그러나 검사가 되고 나자 현실은 99%의 검사들이 온종일 서류뭉치와 씨름하는 월급쟁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다 학교 선배이자 전략부에서 일하는 검사 양동철(배성우)의 소개로 차기 검사장 후보라는 한강식(정우성)을 알게 된다. 이 나라 고위층을 기획수사라는 미명으로 쥐락펴락하는 한강식을 보며 태수는 권력의 편에 서기로 마음먹는다.
 
그 뒤로는 다른 영화에서 익히 본 듯이 조폭이 등장하고 어두운 정치 현실의 뒷이야기가 펼쳐진다. 유사한 장르의 전작들과 비슷비슷해 보이는 장면과 스토리가 반복된다는 것은 어떤 문제의식보다 어느새 이런 스토리들이 소비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닐까 의심하는 근거가 된다. 지나치게 무거운 문제의식은 명절흥행에 도움이 안 된다는 영리한 생각이리라.
 
영화를 보는 내내 한 편의 시대극을 보는 느낌이 든 것은 실제의 역사가 배경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김대중과 이회창이 겨룬 15대 대선이 나오고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등 현대사가 기본적 뼈대를 이룬다. 감독은 그런 현대사에 디테일한 인물을 심고자 했지만, 역사의식보다는 재미를 앞세우다 보니 어정쩡한 팩션 사극을 보는 느낌이 되고 만 것이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몰락한 태수가 다시 일어서죠. 부패한 정치검사들의 천박과 부조리를 보여주면서 그들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과 국민이 의뢰한 힘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어요. 그러니 우리가 모두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요.”라고 말했다. 가벼운 스토리 전개치고는 너무 과한 메시지를 바란 것은 아닐까.
 
극 중 30년이 지났음에도 도통 늙지 않는 인물들이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정우성의 절제된 악역과 온몸으로 비열함을 뿜어내는 배성우의 연기가 기막히다. 어떤 옷도 가뿐히 소화해내는 조인성의 변화무쌍한 연기에 관객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친구가 열광하는 류준열(최두일)의 몰입연기도 한몫했다. 재미도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니 명절 종합선물세트로는 나무랄 데가 없다. 다만 급급한 흥행실적 때문에 유능한 감독이 제빛을 다 발하지 못하는 우리 현실이 안타깝다.
 
*사진은 사이트의 것입니다.
1970-01-01 09:00 2017-02-04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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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살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요즘 ‘백세시대’라는 구호가 더 이상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 흔한 세상이 되었지만, 막상 그 나이를 겪어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또한, 백 세를 경험했다 한들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한 백 세라면 그 또한 무의미할 것이다. 그러니 ‘백 세’가 아직 추상의 영역에 남아 있는 현실에서 김형석 선생은 소중하고 희귀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연세대 명예교수인 철학자 김형석 선생은 우리 나이 97세인 지난해 <백 세를 살아 보니>라는 책을 내고 지금도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니 김 선생님이야말로 백 세의 삶을 생생히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가 아닌가. 어린 시절 김 선생님의 수필들을 읽으며 밤을 새웠던 우리 세대는 그래서 김 선생님의 건재가 반가운 것이다.
 
얼마 전 신문에 김 선생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반가운 마음에 읽으면서 그동안 몰랐던 그분의 역사를 새로 알게 되었다. 우선 놀라운 점이 역사적인 인물들이 그의 주변을 스쳐 갔다는 사실이다. 1920년 평안남도 대동 출신인 그는 대동강 남서쪽 만경대 가까운 그곳에서 창덕소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은 바로 역사적 문제의 인물 김일성이 다녔던 곳이다.
 
우리가 잘 모르는 김일성의 어린 시절 스토리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김일성이 본격적으로 권력을 잡기 이전 32살 김성주와의 조우는 매우 흥미롭고 긴박하기까지 하다. 숭실중학교에서는 시인 윤동주와 한 반에서 공부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을 성격이 매우 착하고 양순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어지러운 세상에 휘말려 요절한 것을 아쉬워한다.
 
교과서에서나 만날 수 있는 역사적 인물들을 인생길에서 조우했다는 것이 역시 백 세 프리미엄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몇 해 전 읽었던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라는 소설 내용이 떠올랐다. 100년 동안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수히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물론 허구지만.
 
백 세 프리미엄이 그런 외적인 체험만은 아니다. 백 년을 살다 보면 내적인 고뇌가 어찌 한둘이겠는가. 부모님들이 20세까지만이라도 살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체념했던 어린 시절의 병약했던 경험을 통해 그것이 어쩌면 장수하게 도와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감사한다. 그 이후 그는 매사에 조심조심하게 되었으며 무슨 일이든 미리미리 하는 습관이 붙었다고 회고한다.
 
젊은 시절 기독교와 실존철학을 접하며 죽음과 영원이라는 주제를 붙들고 평생을 살아온 노교수는 살면서 더불어 살았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는 인생을 아름답다고 보는 낙관주의자다. 인간은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동안은 누구나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고생도 사랑이 있는 한 행복하고 의미 있다고 믿는 백 세 노인의 회고가 가슴에 와 닿는다.
 
1970-01-01 09:00 2017-02-0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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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밤새워 읽은 책 중 철학 에세이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특히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책의 저자가 바로 철학계의 대부인 김형석 교수이다. 그 뒤로 까마득히 잊고 살았는데 최근 그분의 책이 나왔다. 그런데 책 제목이 나를 놀라게 했다. <백 년을 살아보니>! 아니 그냥 약간의 과장이겠지 하며 찾아보니 와우! 그분이 무려 97세가 되셨단다.
 
출간 기념 인터뷰를 읽으니 아직도 정정하시기 이를 데 없다. 하기야 그 나이에 책을 내셨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그런데 인터뷰 중에 유독 관심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선생님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언제였냐는 기자의 질문에 놀랍게도 65세부터 75세까지가 가장 행복했단다. 그 대목에서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아니 나는 아직 경험도 못 한 나이잖아!
 
보통 나이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는데 나도 어느새 추억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친구들을 만나 수다 떨 때도 미래보다는 옛날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또한, 자신의 이야기보다 자식 이야기나 남편 이야기가 많아졌다. 아니 나는 도대체 어디 간 거지? 그러고 보니 젊은 시절과 애 키우며 아등바등했던 시간을 빼면 나만을 위한 시간은 긴 공백으로 남아 있다.
 
김형석 교수님에게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분이 현재 연세에서 얼마 멀지 않은 60~70대를 행복했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그 나이가 되자 비로소 인생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생겼다는 고백이다. 한창 젊었을 때 인생을 다 안 것처럼 철학 에세이도 쓰고 했지만, 만년에 바라보니 다 멋모르고 날뛰던 치기가 보인다는 이야기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칠십이 되니 모든 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더라.’는 고백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그러면 그 나이가 되기까지는 행복은 언감생심이라는 말인가? 물론 그런 뜻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 말의 깊은 뜻은 먼 기억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와 가장 가까운 나이와 시간을 사랑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나는 가까운 나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살았다. 
 
나의 시간이 사라지고 없는데 어찌 행복한 기억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문득 나의 최근 시간을 부랴부랴 검색하기 시작했다. 최근 10년간 나는 무슨 일들을 했던가.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은 블로그를 만들고 글을 쓰기 시작한 일이었다. 하나하나 다시 읽어보니 그 속에 내가 잃어버린 시간들이 고스란히 모여 있었다. 
 
그동안 흘러간 시간과 함께 행복도 잃었음을 깨달았다.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느끼는 순간 속에 있으며 그 시간들이 모여 가치 있는 삶을 구축하는 것이다. 나는 모처럼 그 동안의 글쓰기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글쓰기는 나의 존재 가치를 알려준 귀중한 도전이었다.
1970-01-01 09:00 2017-02-02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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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가 반려동물, 반려식물에 이어 이젠 ‘반려악기’의 시대가 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취업 포털 ‘사람인’이 성인 남녀 3천5백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 중 ‘악기 배우기’가 34.4%로 1위를 차지했단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속희가무(俗喜歌舞)’라고 기록될 정도로 예로부터 노래와 춤을 즐겼고, 오늘날의 고도로 발달(?)한 노래방 문화를 보더라도 사실 그동안 음악을 좋아하는 민족치곤 의외라고 느껴질 정도로 우리의 악기 문화는 초라한 수준을 면치 못했다. 
 
평소 모임에 나갔을 때 누군가 앞에 나가 피아노라도 치게 되면 다들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사람이 다시 보이는 경험을 했을 터이다. 게다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색소폰 연주라도 할라치면 아주 별종을 보는 듯했다. 그만큼 주위에 악기 다루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20~30대 직장인들에게 무료로 악기 강습을 하는 ‘미생 응원 이벤트’, 은퇴한 시니어들이 자녀의 결혼식이나 은혼식 등 의미 있는 날 축가를 연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축주 선물 강습 이벤트’ 같은 행사가 열릴 때마다 과거와 달리 신청자들이 대거 몰린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 요즘 ‘반려’가 시리즈로 등장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깊다고 본다. 그동안 고도 성장기에 오직 앞만 보고 달리며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우리 국민들이 비로소 주변을 바라보고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반려’라도 반려동물과 반려악기는 그 의미가 다르다. 반려동물의 등장은 1인 가구가 늘어나는 등 가족의 해체와 관련이 깊은데,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가 점차 고독하고 우울한 사회로 향하는 징표이므로 바람직하지 못한 반면, 반려악기는 오히려 성숙한 선진국으로 다가가는 징표이므로 긍정적인 지표라고 볼 수 있다. 
 
반려악기는 나만의 취미이기도 하지만, 음악이 궁극적으로 화합과 소통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고독한 사회를 치유할 수 있고, 자신을 성찰하고 정서적 안정을 선사하므로 사회적 갈등의 치료제가 될 수도 있다. 베네수엘라의 빈민가 아이들에게 기적을 선사한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의 엘 시스테마(El Sistema)가 이러한 힘을 입증한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의 교양 있는 중산층 가정에서는 대부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동네 피아노 선생님한테 보내셨는데 도통 음악은 재주가 메주라 지겨워서 체르니인가 치다가 그만둔 기억이 난다. 60을 넘으니 악기 연주의 즐거움도 맛보고 싶어 쉬운 악기가 없을까 기웃거리게 된다. 더욱이 악기 연주는 우울증과 치매까지 예방한다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1970-01-01 09:00 2017-02-0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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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평균수명이 늘어 백세시대로 진입하면서 기나긴 은퇴 후의 시간 관리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사실 이런 사태가 인류 초유의 일인 데다 미처 대비할 시간도 없이 닥치는 바람에 대부분 어찌할지 모르는 채 허둥지둥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계속 일을 찾아 헤매야 하는지, 아니면 놀고먹어도 괜찮은 것인지 쉽게 판단이 안 선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사회로 들어선 일본은 이미 적응을 시작해 6, 70대 노동 인구가 빠르게 늘어난다고 한다. 그걸 보면 역시 계속 일하는 게 맞는 방향인 것 같은데 우리는 아직 그에 대한 대책이 많이 부족한 느낌이다. 우선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하고 또 청년실업 문제 때문에 일자리 구하러 다니기도 왠지 눈치가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일찍 은퇴하고 아직 싱싱한 몸으로 어정쩡한 상태에 놓인 시니어들이 택하는 틈새 일거리가 재능기부다. 필자가 취재하고 있는 서울시나 기타 지자체 혹은 복지 관련 단체들에 소속된 재능기부 모임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 모임에 참여하는 시니어들은 대체로 즐거워하고 하는 일에 만족해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일거리’지 ‘일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상황이 분명 문제가 있지만,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껄끄러운 것은 재능기부 자체가 매우 아름다운 일이며 칭찬받을 일일지언정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최근에 출간된 크레이그 램버트의 <그림자 노동의 역설>은 이와 유사한 ‘무보수 노동’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시니어들의 생존 문제와 결부되어 우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림자 노동’이란 오스트리아의 사회사상가 이반 일리치가 주장한 개념으로 현대인들이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에 내몰리고 있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예컨대 ‘셀프’라는 미명 하에 매장 곳곳에서 유행하는 노동을 이른다. IT의 발달로 이런 식의 노동 봉사는 갈수록 확대되는 추세이다.
 
대형 레스토랑의 샐러드 바에서 직접 음식을 담고, 공항의 터치스크린 키오스크에서 셀프 탑승 수속을 밟고, 극장에선 티켓 자동발매기 앞에 줄을 선다. 그 전에는 매장이나 창구 직원이 처리했던 일들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셈이다. 마치 생활이 더욱 편리해지고 소비자에게 자율을 선사하는 듯이 포장하지만, 결국은 기업의 인건비 절감이 목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햄버거 먹고 스스로 치우는 순간 일자리 하나가 날아간다는 뜻이다.
 
오늘날 일자리가 줄어들고 많은 젊은이가 실업으로 고통받는 이면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구조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재능기부가 이런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아주 선한 마음으로 베푸는 행위가 비슷한 일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어느 누군가의 일자리를 뺏을 수도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일이 단순한 것이 거의 없다. 뉴욕의 작은 나비 날갯짓이 북경의 태풍을 몰아오듯이 모든 사회현상은 촘촘한 인과관계로 얽혀 있다. 나이 들었다는 게 뭔가. 이런 세상사를 폭넓게 보는 지혜가 아닌가. 즐겁게 재능기부를 하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는 안목이 필요하지 않을까.
1970-01-01 09:00 2017-01-31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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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수다가 많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개그 프로나 코미디 콩트에도 여자의 수다는 늘 재미있는 소재가 되곤 한다. 나도 스마트폰으로 수다를 떨다가 팔이 아파 제발 좀 끊었으면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 확실히 심하긴 하다. 그래도 스마트폰 약정 시 남편은 음성 통화 50분이면 된다는데 나는 음성통화 무제한을 선택하고야 만다.
 
무료국제 전화가 일반화되기 전, 스위스 친구가 늘 먼저 전화를 해서 그녀의 생일 즈음에 내가 보답 전화를 한 적이 있다.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보니 그만 한 시간을 넘고 말았다. 그때부터 내심 전화요금이 걱정되어 노심초사했다. 
 
그 후로 먼저 전화하지 않고 오는 전화만 받았다. 전화로건 만나서건 그 끈질긴 화제가 어디서 나오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때로는 얘기를 끝내고 헤어진 뒤 정작 할 말은 못한 것이 생각난 적도 여러 번이다. 
 
수다도 체력이 필요한지라 나이 든 요즘은 수다 시간이나 열정이 과거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수다는 여성들의 정신적 양식인지라 빼먹지 않고 정기적으로 친구들을 불러 모은다. 수다도 대물림인지 요즘은 여고생들 사이에 수다클럽까지 생겼단다. 도대체 왜 여자들은 이리도 수다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 안에 여자만의 비밀이 숨어 있을 법하다.
 
 
수다라는 문화적, 생물학적 특징이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수다의 기원은 아마도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듯하다. 수렵시대 남자들은 사냥을 통해 식구들의 주식을 해결해야 했다. 사냥은 며칠이고 짐승을 쫓는 중노동이었으므로 조용한 집중이 요구되었고 사냥감에 대한 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으로 본다. 물론 수다가 필요할 리 없다.
 
집을 지키고 자녀를 키우는 임무를 부여받은 여자들은 생존을 위협하는 주변의 정보를 알아야 했고 다양한 부식을 마련하기 위해 여자들끼리의 소통이 중요했을 것이다. 아울러 집단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해 서로간의 공감능력을 키우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을 터이다. 많은 정보를 틀어쥔 여성들이 주도권을 잡는 것은 당연하니 모계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남성들이 주도권을 쥔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수다가 억압적인 사회를 버텨나가는 해방구 역할을 했을 법하다. 우물가에 모여 빨래방망이를 두드리며 수다로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않았더라면 여성의 수명이 이처럼 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수다로 끈질기게 키워온 공감능력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는 필수 키워드가 되었으니 세상은 공평하다.
 
오늘날 세상이 이리도 시끄러운 것은 수다의 깊은 의미를 모르는 남성 마초들과 골방에 틀어박혀 수다를 잃어버린 수첩공주님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니 모처럼 수다 떠는 여자들이 기 좀 펴게 생겼다. 게다가 여자가 돈벌이 하는 세상에 수다 좀 떤다고 누가 여자들을 박해할 것인가. 다만 나이 들어 팔이 아프니 이어폰이나 블루투스라도 하나 장만해야겠다. 
 
1970-01-01 09:00 2017-01-3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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