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끼리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드라마와 탤런트들 품평으로 접어든다. 아 참! 요즘은 나영석 표 예능까지 추가됐다. 아무튼, 지금 잘 나가는 연예인이나 TV 프로에 대한 이야기가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남자 탤런트로 온통 송중기, 박보검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세대 미남들인 신성일, 최무룡, 남궁원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일찍 결혼했으면 손자뻘인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다 떠는 것이 남부끄러울 법도 한데 무척 자연스러운 것이 도리어 신기하다. 필자도 젊었을 때는 남궁원을 흠모했지만, 지금은 잊혀진 지 오래다. 그 시절 미남들을 입에 올리는 자체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세상이 변한 것인지 여자의 마음이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인지 알 길이 없다.
 
하긴 미에 관한 인간의 의식도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과거 서양의 그림이나 조각에 등장한 미녀들이 오늘 거리에 등장하면 당장 다이어트를 고민했으리라 짐작된다. 동양에서도 한나라 비연은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다니 과장이라 하더라도 체구가 매우 작았을 것이며, 양귀비는 시녀가 부축할 정도이니 고도 비만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과연 아름다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또한, 시대마다 다른 아름다움의 기준은 도대체 누가 정했는가? 아름다움에 대한 공인 인증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김태희를 척 보면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곰곰이 생각할수록 의문투성이다. 누구나 아름다움을 원하는데 아름다워지는 비밀을 알기만 하면 단박에 최고 스타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진화생물학자들은 다윈의 ‘성 선택론’이 자연과학에서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최고의 이론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은 진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살아남는 데 유리해 많은 유전자를 남겼으므로 오늘날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이고 그런 까닭에 많은 이들이 앞 다투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설명을 들으면 뭐 그럴 듯도 한데 미남, 미녀들만 생존에 유리해 살아남았다면 온 세상이 미남, 미녀로 가득해야 마땅할 텐데 그렇지는 않찮은가. 또한, 누가 봐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데 ‘제 눈의 안경’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무엇보다 시대마다 다른 미의 기준을 진화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다. 도대체 아름다움의 비밀은 무엇이란 말인가?
 
생물학만으로 설명이 불충분하다면 문화적인 요인을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요즘 미의 기준이 몹시 서구화한 것도 따지고 보면 서구 문명에 대한 동경의 산물이 아닌가. 오늘날 남자들이 화장하기 시작한 것도 여자들의 경제력이 향상되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른 사회문화적 변화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남진의 노래에 “마음이 예뻐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하는 가사가 있었다. 말하자면 관념적인 아름다움을 찬양하던 시절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은 그까짓 마음이야 차후 먹기 나름이고 겉모습이 우선이라 ‘메이드 인 강남’ 미인들이 흘러넘쳐 애먼 유전자들만 곤혹스러워졌다. 
 
가부장적 일부종사, 삼종지도의 시절도 저 멀리 흘러가고 여자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시대가 도래하니 이젠 남자도 화장하고 결혼 상대로 연하도 너그럽게 수용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나이 좀 먹었다고 송중기, 박보검 좋아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몸은 늙었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젊은이 못지않게 건강한데 말이다. 
 
1970-01-01 09:00 2017-04-2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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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우리 아이들은 엄마를 다람쥐라며 놀린다. 다람쥐처럼 귀엽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끊임없이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물건을 사 모으기 때문이란다. 그리 많이 사는 것도 아닌데 그런 말을 들으니 억울하기도 한데 생각해 보니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 때문이다. 
 
다람쥐 소리를 듣는 또 다른 까닭은 다람쥐들이 도토리를 굴마다 쌓아두고 정작 한겨울에는 모아놓은 곳을 잊어버려 먹지 못하듯이 쓰지 않고 모아놓기만 한다는 데 있다. 그러고 보니 옷가지며 그릇이며 심지어 화장품 샘플까지 많기도 하다. 그렇다고 ‘내가 질소냐.’ “야 그래도 까먹고 잊어버린 도토리에서 싹이나 상수리나무 숲이 우거지지 않니?”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 집 물건들은 싹이 나기는커녕 곰팡이만 핀다. 아무튼, 버리기는 버려야 할 듯싶다. 그러나 버리는 것이 또 쉽지가 않다. 물건마다 각기 추억이 서려 있고, 언젠가는 꼭 사용할 날이 있으리라는 야무진 기대가 껌딱지 같이 엉겨 붙어 있기 때문이다. 샘플들도 늘 쓰고 버리기는 하는데 버리는 속도보다 모이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것이 문제다. 
 
필자만 그런가 했더니 주변에 그런 고민들이 널려 있다. 젊은 여성들도 그런 증세를 지닌 사람들이 많다는 보도를 보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어떤 학자는 원시시대부터 남자들이 사냥을 나선 이후 여성들은 거주지 주변에서 식량이나 살림에 쓸모가 있는 물건이면 사정없이 주워 모으던 본능이 남아서 그런 것이라 하니 병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어느새 일흔 살을 맞은 여성학자 박혜란 씨도 최근 출간한 <오늘, 난생처음 살아보는 날>에서 “한밤중에 우렁각시가 나와서 다 내다 버려 줬으면 좋겠다.”며 필자와 비슷한 증세를 드러냈다. 사실 나이 들어 보니 모으는 것도 육체적으로 힘들고 관리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왕성하던 소유욕도 제풀에 사그라진다. 정말 박 씨의 하소연처럼 누가 몰래 버려주었으면 좋겠다.
 
마음먹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의외로 정리 전문가나 정리 대행업체가 많다는데 놀랐다. 아니 이런 것도 돈벌이가 된다니! 몇 가지 조언이 나와 있었다. 제1의 원칙은 물건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 마나 한 소리다. 그걸 누가 모른단 말인가. 그나마 귀담아둘 만한 내용은 임시로 박스를 하나 만들어 덜 사용하는 물건들을 모아놓고 일정 기간 보관한 뒤에 그때까지 사용하지 않았다면 불필요한 물건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어떤 정리 전문가는 공간별이 아닌 물건별 정리를 추천한다. 이유는 정리가 잘 안 돼 있는 집일수록 물건이 이 방 저 방 나뉘어 있는 경우가 많아 공간별 정리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오늘은 옷, 내일은 책, 다음 날은 그릇 등 물건별로 정리하면 같은 종류의 물건이 여기저기 분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버릴 것과 남겨야 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긴 이론을 몰라 버리지 못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미 지난 이사 때 방 안 한가득 쌓인 옷가지를 보고 내심 놀랐던 기억이 아직 머리에 남아 있다. 이성적으로는 일찍부터 ‘미니멀 라이프’를 수용했지만, 우리 몸에는 아직 쉽게 버리지 못하는 DNA가 남아 있다. 조용히 마음속으로 타협한다. ‘그래 그렇다면 효과적으로 버리자.’ 딸들 몰래 인터넷 ‘중고나라’를 연다.
1970-01-01 09:00 2017-04-2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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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예능 프로 중 ‘복면가왕’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음악과 추리라는 두 장르를 이종 교배하여 만든 프로그램으로 융합과 잡종이라는 요즘 트렌드에도 잘 맞는다. 복면을 쓰고 벌이는 대결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도 백미는 복면을 벗는 순간이다. 복면 속의 인물을 각자 추리하도록 유도하여 채널을 돌릴 수 없게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이 프로의 장수 비결이다.
 
물론 재미를 우선으로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므로 판정단의 과장된 몸짓이나 참여자들의 과도한 리액션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프로듀서가 가장 중점을 두는 대목일지 모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프로가 주는 울림은 예능의 소란스러움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우리 내면의 편견을 조용히 성찰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동안 인간에겐 누구나 편견이 있을 수 있음을 당연시했고 서로가 공범의식 속에 은밀하게 안주해 왔다.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식사 후 디저트를 먹듯이 수다를 즐기며 그 편견들을 증폭시켜 왔다. 그러나 이 프로를 보면서 그동안 겉모습으로만 대충 판단해 낙인찍었던 편견이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폭력이었음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복면가왕이 시청자들에게는 잠깐이나마 반성의 시간을 주었다면, 출연자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울림을 주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자신에 대한 편견을 깨는 기회로 활용한 출연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출연자가 경험한 것은 의외에도 자신들이 가면을 쓰고 살아왔다는 깨달음이다. 많은 출연자가 복면을 벗으며 자신의 본 모습을 찾고 보여준 것에 기꺼워했다.
 
그것은 기묘한 경험이었다. 복면을 씀으로써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았다면 평소의 얼굴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의 얼굴을 가림으로 본 얼굴이 드러난다면 그는 필시 가면을 쓰고 있었을 터이다. 그러니까 가면을 벗는 것이 아니라 가면 위에 복면을 덮어씌움으로 민낯을 드러내는 복잡한 과정인 셈이다. 어쩌면 이는 흥미로운 심리학의 과제일 듯도 싶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가면을 쓰고 산다. 남에게 보이는 나를 치장하기 위해 다양한 분장을 한다. 없으면서도 있는 척을 하고,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고, 속으로는 약이 올라도 착한 척을 한다. 사회는 우리에게 계속 체면과 과시라는 가면을 쓰도록 요구하고 우리는 이에 순응한다.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허태균 교수는 이를 한국인에 유난한 ‘관계지향성’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민낯을 부끄러워하는 것일까. 여자들이 화장 안 한 얼굴로 밖에 나가기를 꺼리는 것은 화장 이후가 아름다울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착각일 때도 잦지만. 하여간 ‘민낯’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은 분명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가면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그 가면이 나를 돋보이게 한다는 묘한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마음가면>의 저자 브레네 브라운은 자기를 부정하는 가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히려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신이 취약해지는 상황에 부닥치면 무심결에 가면을 쓴다. 그러나 취약성을 가리는 순간 영원히 가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이 취약하다는 것을 드러내야 그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복면가왕에 등장하는 출연자 중 자신의 감춰왔던 비밀을 공개하며 후련함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함께 공감한다. 복면이 가면까지 치유한 놀라운 사례다. 앞으로 친구들과 노래방에 갈 기회가 생기면 꼭 복면을 준비해 가 볼 작정이다.
 
1970-01-01 09:00 2017-04-16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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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古都) 이스탄불을 여행하다 보면 도시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구도심으로 들어가면 원시시대에나 형성되었음 직한 좁은 미로가 오밀조밀하다가 그 외곽으로 동로마 시대의 유적이 남아 있고 멀찍이 현대적인 도시가 펼쳐진다. 그런데 모든 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원시와 현대가 공존하는 것이다. 우리 뇌의 구조가 이를 똑 닮았다.
 
인간의 뇌도 창조론자들이 들으면 고깝게 여길지 모르나 어느 한순간 누군가의 설계로 짠! 하고 탄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진화 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뇌가 형성된 것이라는 말이다. 즉 편도체와 같은 파충류 시절의 뇌에서부터 포유류의 뇌를 거쳐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한 전두엽까지 꾸준히 중첩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이 복잡한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억압의 역사로 본 견해는 탁월하다. 인간의 뇌의 발달 과정이 곧 이전 뇌를 제어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 이성과 각종 문화, 예술을 관장하는 전두엽이 발달하면서 점점 원시적인 본능의 뇌를 억압해왔다는 말이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은 결국 저 깊숙이 내재된 본능의 발현을 최대한 억제하는 기제가 된 것이다.
 
시작이 장황했지만, 외도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인간의 전모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외도를 꿈꾼다.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뇌에 그렇게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강력한 전두엽의 조종으로 이성을 동원해 억제하고 있을 뿐이다. 뒤집어 말하면 결혼이라는 제도는 인간이 본능의 세계와 결별하기 위해 선택한 눈물겨운 제도인 셈이다.
 
그러나 공고해 보이던 이 제도가 불합리하다는 의심을 받는 것은 그 안에 부조리한 권력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간혹 ‘작은집’을 두고 살았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들은 크게 저항하지 못하고 숨죽이며 살았다. 여성을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어두고 자신들은 원숭이 시절의 본능을 맘껏 누리는 셈이다.
 
외도가 꼭 원시적인 뇌의 산물만은 아니다. 전두엽으로 하는 외도도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외도를 꼭 성적인 욕구의 산물로 단정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문화와 문명은 새로운 아름다움과 매력을 생산했고 그런 아름다움에의 동경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안나의 탈출은 완고한 구제도가 주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물론 그 보복은 잔인했지만.
 
쉽게 일반화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원시적인 뇌의 충동으로 일어나는 외도가 남성에 가깝다면 전두엽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외도는 여성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남성의 외도가 가정으로 회귀하기 쉬운 반면, 여성의 외도가 가정 파괴적인 결과로 나타나곤 한다. 전두엽의 외도가 결혼이라는 제도에는 치명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억지로 막아놓은 둑이 오래 가기는 어렵다. 법으로 쌓은 간통죄라는 둑이 무너진 후 우리 사회도 선진국형 외도로 진화(?)해 갈 것이 틀림없다.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미명 하에 외도에 대해 관대해지는 경향에서 우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외도라는 용어 자체가 결혼을 신성시한 것인데 점차 솔로들이 많아지는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검색어에 ‘외도’를 치면 거제도 외곽의 작은 섬 외도가 뜰 만큼 우리의 외도는 그 세력을 잃어간다. 마치 지금은 사라진 원숭이 꼬리처럼 점차 퇴화하리라는 불길한 예감이다. 어쩌면 조만간 ‘외도’라는 언어가 ‘쿨(Cool)’이라는 말로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오! 외도여 정녕 어디로 가시나이까.”
1970-01-01 09:00 2017-04-11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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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의 위상이 올라간 건가 아니면 떨어진 건가? 최근 도깨비의 출몰로 여자들 마음이 뒤숭숭하다. 그런 멋진 도깨비의 등장이 전통적인 도깨비의 권위에 손상을 입힌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무섭기는커녕 데이트라도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인 도깨비라니! 도깨비뿐만 아니라 저승사자마저 팬클럽이 생길 정도니 저승의 권위가 온통 땅에 떨어졌다.
 
요즘 어린 애들이 저승사자를 몰라서 그렇지 저승사자가 얼마나 무서운가. 옛날 동네 뒷산을 올라가면 서낭당이 있었다. 서낭당 옆에 상여가 놓여 있는 상엿집을 지날 때마다 느꼈던 등골이 서늘한 기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염라대왕이 보낸 저승사자는 곧 죽음에의 초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무서운 저승사자가 그토록 귀엽다니 이런 도착이 어디 있단 말인가.
 
수천 년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음산한 전통이 드라마 한 방에 무너지는 것을 보니 드라마의 위력이 대단하다. 그러나 도깨비의 책임도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 그토록 열심히 활동하던 도깨비들이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서 모습을 감춘 것이다. 밤에 화장실에서 놀던 달걀귀신은 어디 갔으며 빗자루 귀신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사실 우리나라는 도깨비 친화적인 나라였다. 시골 마을마다 도깨비 설화가 없는 곳이 없고 동네 할머니들도 자신만의 필살기인 비장의 도깨비 이야기가 한 가지 이상은 반드시 있었다. 우리 외할머니도 이야기를 조르는 우리에게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도깨비 이야기를 풀어놓으시곤 했다. 늘 비슷한 이야기였지만, 들을 때마다 신기하기만 했다.
 
오죽하면 역사서인 삼국유사에도 도깨비 이야기가 나오겠는가. 경주 황천 언덕에서 밤마다 귀신들과 놀던 화랑 비형랑은 귀신들의 대장이었다. 진평왕의 명을 받아 귀신들을 동원해 하룻밤에 다리를 놓기도 했다. 그래서 이름도 귀교(鬼橋)라고 했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러나 진짜 귀신이 곡할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 같은 비형랑 출생의 비밀에 있다.
 
비형랑의 아버지는 신라 25대 왕인 진지왕이다. 그러나 이름처럼 진지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주색에 빠져 폐위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비형랑의 탄생과 관련된 기이한 이야기가 전한다. 진지왕은 경주 사량부에 사는 도화 부인을 흠모했으나 남편이 있는 도화 부인이 거절하자 만약 남편이 없다면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얄궂게도 진지왕이 먼저 죽었다.
 
2년 후 도화 부인의 남편이 죽자 깊은 밤에 죽은 왕이 찾아와 약속을 상기시켰다. 삼국유사에 이렇게 나온다. ‘왕은 7일간 머물렀다. 그동안 오색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7일 후 왕은 사라지고 여자의 몸에 태기가 생겼다.’ 비형랑이 이렇게 태어났으니 그가 귀신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 할머니는 귀신을 만나면 반드시 아래를 바라보라고 일러 주셨다. 귀신을 올려다보면 귀신이 산만큼 커져 무섭기 짝이 없지만, 내려다보면 좁쌀만큼 작아져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이셨다. 우리의 사랑스러운 도깨비들은 그러니까 우리들의 염원을 담은 피사체인 셈이다. 한국인들은 마음속의 소망을 도깨비에 의탁해 표현했던 것이다.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최고 기업 총수가 구속되는 현실은 마치 도깨비 장난 같기만 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마냥 남의 일로만 돌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각자의 마음에 깃든 사악한 기운들이 모여 도깨비 같은 세상을 만든 것은 아닌가? 그동안 잠잠하더니 멋진 두 사내 도깨비가 세상에 나와 도시를 횡행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 사진은 드라마 도깨비 광고 포스터입니다.
1970-01-01 09:00 2017-04-06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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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갈 땐 마치 UFO 우주선 안으로 끌려가는 기분이었고, 들어가 보니 우주의 다른 행성에 도착한 느낌이다. 바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DDP 이야기다. 밖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밀폐형임에도 하늘이 보이고 수풀처럼 곳곳에 아름다운 디자인 작품들이 널려있다. 지하철 한번 타면 도착할만한 거리에 이런 곳이 있는데. 알면서도 미뤄온 게으른 방문이었다.
 
피에로 포르나세티 PRACTICAL MADNESS(실용적인 광기) 전은 그의 작품이 프린트된 자동문으로 들어서며 광기의 세계가 확 펼쳐진다. 단번에 첨벙 또 다른 세계로 빠진다. 2013년 포르나세티(1913~1988)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밀라노 트리엔날레 뮤지움에서 전시한 이 작품들은 아들인 바르나바 포르나세티가 기획했다. 1,0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아이콘, 수집가의 방, 주제와 변형들, 트레이로 나눠 전시했다.
 
아이콘의 방에서는 주로 장식장과 병풍이 많았는데 이는 건축가 지오 폰티와 콜레보레이션 작품으로 예술에 대해 열려 있는 그의 자세를 알 수 있다. 서로 상대방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며 얻어진 최상의 시너지 효과다. 소재의 질감과 실용성을 살린 정교한 설계와 색다른 주제의 석판화가 어우러졌다.
 
드로잉, 잉크 작업, 프레싱 등 여러 단계를 거친 석판화는 유화나 수채화 등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섬세함과 실크스크린의 냉정한 정교함을 순화시킨 질감이 돋보인다. 이런 작품을 볼 때 필자는 약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그럴 때는 숨을 허투루 쉬지 않고 아주 조금씩 잘게 나눠서 쉬어야만 한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한 치의 오차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판화 작업 탓인지 판화가의 작업실은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다. 포르나세티도 마찬가지였다. 판화 도구는 마치 외과 수술실에서 크기 순서대로 누워있는 기구들 같아 기묘한 느낌이다. 피카소나 고흐의 어지러운 화실과는 대조적이다. 이런 단정한 생활 속에서도 광기의 예술이 탄생한다니 놀랍다.
 
이 모든 작품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은 그의 탄탄한 독서량에 기초한다. 그 위에 호기심, 흥미, 소질, 재치가 범벅되니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작품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는 한 가지 주제를 잡으면 그 주변을 맴돌며 누에가 실을 뽑듯 끊임없이 그 주제의 뿌리를 찾아 파 내려갔다. 
 
작품을 둘러보며 무척 이색적인 소재는 당시 오페라 가수 리나 카발리에리(1874~1944)의 얼굴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녀의 얼굴을 잡지에서 보고 350여 점이나 창작해 내다니. 초상화에서 모빌까지 그녀가 평생 지을 수 있는 각종 표정을 다 만들어놓았다. 갑자기 리나 카발리에리가 이 작품을 봤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해진다.
 
‘21세기 레오나르도다빈치’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작품은 그림이나 장식 자체로도 좋았지만, 실제 사용할 수 있는 트레이나 우산꽂이 등에도 적용했다는 점이 여자들의 마음을 확 잡아끈다. 2시간 넘게 1,000여 작품을 보며 이렇게 재미있었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의 재치 어린 붓 처리나 서명은 마치 패션의 마무리로 구두까지 꼼꼼하게 신경을 쓴 멋쟁이의 아우라다. 
 
“나는 절대 유행 타지 않을만한 유행의 멋을 창조한다.”는 그의 말이 현실로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다. ‘참 재미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전시장을 나서는데 뒤에서 그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며 배웅하는 것 같았다. 우주선을 타고 포르나세티 별에 다녀온 기분이다.
 
 
1970-01-01 09:00 2017-04-0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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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 인간의 삶은 찌질하다. 대부분 공들여 화장하고 멋진 옷 입고 외출하여 유행하는 브랜드 커피숍에서 온갖 있는 지식 없는 지식 다 동원해 그럴듯한 수다 떨고 귀가하는 순간 곧 무료한 삶을 마주한다. 집에 오면 아무거나 입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끝나면 TV 앞에 앉아 졸다가 침대에 올라 잔다. 간혹 ‘이러려고 태어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삶은 지루하다.
 
최근 미래 기술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다. 새로운 영상기술로 가상현실기기를 쓰면 눈앞에 다른 세계가 생생하게 펼쳐지는 기술이다. 사실 이런 기술은 오래전부터 영화를 통해 익히 보아왔기 때문에 그리 새로울 것은 없다. 우선 기억에 남는 <매트릭스>를 보면 황당하기는 하지만 알약 한 개를 먹으면 가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오래전 영화로는 <토털 리콜>이 생각난다. 그 영화에는 가상현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억을 이식해주는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영화 속 상상으로 시작해 현실이 된 것이 하나둘이 아닌데, 가상현실도 인간의 상상력으로 시작해 어느덧 현실 속에 실현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간혹 세상살이가 갑갑할 때 들어가 보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지루하다고 느끼는 현실은 과연 사실일까?
 
TV를 보고 있자면 가짜 상황을 만들고 즐기는 프로가 제법 많다. 대표적으로 ‘우리 결혼했어요’는 가상의 결혼 생활을 보여준다. 물론 이미 가짜라는 것을 알고 보니까 속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솔로에게는 감정이입을 통해 가상현실을 즐기는 셈이다. 보이지 않는 가상현실도 있다. 넘쳐나는 ‘먹방’ 프로그램들은 1인 가구가 30%를 넘어서는 현실에서 외로운 인간들의 대리 체험을 만족시키는 가상현실이 아닌가.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악마의 편집’이 된다. 편집은 선택의 기술이다. 확보된 영상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을 둘러싼 정반대의 스토리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현장을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짧은 인터뷰를 위해 보통 그의 열 배 정도의 인터뷰를 찍고 그중 편집자의 구미에 맞는 서너 개의 문장이 임의로 선택되어 방송에 나간다고 한다. 항의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가상현실이 아닌가.
 
역사는 또 어떤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알고 보면 승자들이 편집한 기록을 당시의 사실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탈북한 이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한결같이 남쪽에서 배운 새로운 역사에 충격을 받는단다. 김일성 삼부자가 역사의 전부인 줄 아는 가상현실 속에 살다가 새로운 현실을 접하며 받는 충격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실도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차원의 가상현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이미 진실은 다양한 주관적 시각에 의해 다층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우리는 주관적으로 왜곡된 현실을 진실로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설사 진실을 알고 있다 한들 우리가 그 누추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을까. 이미 진실에서 멀리 떠나온 인간은 차라리 가공된 세계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 모른다.
 
우울한 다큐멘터리보다 막장 드라마를 좋아하듯 이미 우리는 윤색된 가상현실에 중독되어 있는지 모른다. 지루한 삶이 진짜인가 아니면 달콤하게 각색된 세상이 진실인가. 지금도 TV 속 프로그램이 편집되듯 우리 삶도 어쩔 수 없이 끊임없이 스스로 편집하고 있는 가상현실인지 모른다. 
 
1970-01-01 09:00 2017-03-24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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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사랑의 계절이다. 겨우내 죽은 듯이 잠자던 고목에 생기가 돌듯이 움츠렸던 몸이 기지개를 켜고 기운이 생동하기 시작한다. 처녀들 볼이 발그레 물들고 총각들 장딴지에 힘이 넘친다. 새 생명의 싹들이 돋아나듯 가슴마다 사랑이 물든다. 그렇다 봄은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다. 그러니 어찌 방안에만 갇혀 있으랴! 모처럼 오페라 나들이를 했다.
 
이번 <사랑의 묘약>은 정확히 말하면 정식 오페라가 아니라 ‘오페라 콘체르탄테’다. 이는 콘서트 형식을 띤 오페라로 구체적인 연기나 배경이 없이 오케스트라와 성악이 중심이다. 오히려 오페라보다 오케스트라의 음을 제대로 들을 수 있어 더 좋기도 하다.
 
가에티노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은 ‘오페라부파(희극 오페라)’로 경쾌한 음악과 희곡적 스토리 덕분에 오페라를 잘 모르는 사람도 신이 나고, 낯익은 멜로디가 많아 친근감이 느껴진다. 스토리는 제목으로도 상상할 수 있듯이 사랑에 관한 것이다. 흔히 있을 법한 사랑의 삼각관계. 소박한 농촌 총각 네모리노(매튜 그릴스:테너)냐 아니면 멋진 하사관 벨코레(김주택:바리톤)냐? 이 두 사람 중 망설이는 절세미인은 아디나(이윤정:소프라노)다. 그녀 옆에는 친구 잔네타(윤성회:소프라노)가 있다.
 
첫 대목 아디아가 마을 사람들에게 <트리스탄>의 전설을 읽어주는 대목에서 ‘사랑의 묘약’의 복선이 깔린다. 그런데 애타는 네모리노에게 그 사랑의 묘약을 들고 둘카마라(사무엘 윤:베이스바리톤)가 구세주처럼 나타난다. 네모리노는 대뜸 가진 것을 다 털어 이 약을 사고 약효가 나타나기를 하루 동안 기다린다. 하지만 아디나는 표변한 네모리노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벨코레와 결혼을 선언한다.
 
마음이 급해진 네모리노는 다시 둘카마라를 찾아가 약을 더 사려 하는데 빈털터리다. 할 수 없이 입대하는 조건으로 벨코레에게 돈을 받아 묘약을 사 먹고 약효를 기다리며 아디아에게 또 무관심한 척한다. 그 사이 네모리노 삼촌이 거액을 네모리노에게 상속했다는 소문이 돌아 잔네타와 마을 처녀들은 모두 네모리노에게 친절히 대하고 그의 사랑을 차지하려 한다. 
 
이에 네모리노는 드디어 ‘약효가 나타나는구나!’라고 생각하는데 아디아가 돌아와 사랑을 고백한다. 네모리노가 자신을 모른 체하자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네모리노임을 깨달은 것이다.
 
속성 작곡가이고 한 번 작곡한 곡은 다시 보지 않는 도니체티는 이 오페라를 장장 2주에 걸쳐 고치고 또 고쳤단다. 그 때문인지 아름다운 아리아가 많다. 그중 백미는 2막에서 네모리노가 부르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다. 이 곡은 1832년 밀라노 초연 때에는 ‘희극 오페라에 웬 생뚱맞은 단조의 슬픈 멜로디냐?’라며 관객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단다. 하지만 언제 들어도 감미로운 그 멜로디는 공연이 거듭됨에 따라 사랑받는 명곡이 되었다.
 
이번 공연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둘카마라 역을 맡은 사무엘 윤의 분장과 코믹한 연기다. 약병으로 소주병을 들고 나온 것도 관객에게 친근감과 웃음을 더했다. 매튜 그릴스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에 혼을 다 쏟아 부었다. 
 
아름다운 벨칸토를 잘 소화해 낸 소프라노의 활약도 극의 완성도를 높혔다. 여기에 호세 미구엘 에산디의 부드러우면서도 절도 있는 지휘가 더해졌다. 전체적으로 매우 감동적이어서 관객 중 한 외국인이 기립박수를 치며 모두 일어서기를 권했지만, 양반 기질에 수줍음이 덧입은 우리는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그냥 마음속으로만 벌떡 일어났다. 
 
돌아오는 길은 밤인데도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봄날의 햇빛처럼 온몸에 속속들이 스며들었다. 본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등장하는 사랑의 묘약은 죽음을 불러왔지만, 흥겨운 오페라에선 진짜 사랑의 묘약이 되었다. 그렇다. 음악이야말로 진짜 사랑의 묘약이었다.
1970-01-01 09:00 2017-03-2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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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종편 보기다. 그것도 토론 프로그램이다. 평소 드라마 위주로 보던 사람이 매일 시사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으니 남편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래도 재미있으니 어쩌랴. 국가적 중대사를 논하고 있는데 재미를 운운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지만, 사실 까놓고 얘기하는데 재미가 없다면 그런 프로를 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하다.
 
종편 방송사들도 그 점을 의식했는지 토론을 거의 예능 수준으로 다양하게 꾸미고 OX 퀴즈까지 도입한다. 시청률도 많이 올라 이번 최순실 사건의 최대 수혜자는 종편방송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몇몇 단골 출연자는 벌써 유명인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속 시원하고 세상 보는 눈을 뜨게 해주는 듯싶더니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은 20세기 걸작 가운데 하나로 영화학도들의 교과서로 쓰이는 영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사무라이 한 명이 숲속에서 살해되고 어린 아내는 강간당한다. 용의자로 체포된 험악한 산적이 자신의 범행이라고 고백하면서 사건은 쉽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사건을 목격했다는 사람마다 모두 이야기가 다르다.
 
경찰 앞에서 자기가 벌인 일이라고 지껄이는 산적, 자신은 능욕의 슬픔으로 실신했다가 일어나니 남편이 죽어 있었다는 아내, 사건을 목격했다는 나무꾼, 그리고 무당의 입을 빌려 저승에서 이야기하는 사무라이까지 모두 다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실은 하나인데 사람마다 다르게 보고 기억한 것일까? 아니면 애초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종편 패널들도 처음에는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더니 갈수록 벌어지는 사건의 진행을 따라가며 해설하는 정도에 머무는 듯하다. 하긴 예측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거나 때론 자신의 말이 모순되는 지경으로 치달리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리라. 한때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 작가를 매도했는데 이 현실의 막장 드라마는 어찌할 것인가. 도대체 작가는 누구란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실을 ‘사실 그대로’라고 정의한다. 세상에는 사건들로 구성된 하나의 사실이 존재하며 그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정확히 표현한 것이 바로 진실이라는 말이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듯하지만, 우리 인간은 외부 현실 전체를 인식하기보다는 각자 차이 나는 지각과 기억을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할 뿐이다. 그러니 객관적인 진실은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 <라쇼몽>과 유사한 작가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오! 수정>과 최근작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가 특히 그렇다. <라쇼몽>이 살인사건이라면 홍상수의 영화는 남녀의 만남을 두고 기억이 갈린다.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한 사람의 시각도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영화와 현실이 뒤섞인 홍 감독의 요즘 처지를 보면 인생이란 영원히 진실을 모른 채 주관성의 감옥에 갇혀 사는 게 아닌가 싶어 갑자기 씁쓸해진다.
 
사실 역사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현대적 관점에서 늘 재구성되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승자의 주관적 시각으로 편집된 혹은 왜곡된 진실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이 사태가 어디로 흘러가고 어떻게 결말이 날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현재 세력이 강한 쪽의 주관성이 결정할 듯하고 끝내 진실은 첩첩산중일 듯싶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진실을 찾아서 지금도 방랑자처럼 끊임없이 종편 채널을 돌리고 있다.
1970-01-01 09:00 2017-03-11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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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영화라는 물건이 어떤 존재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종합예술의 ‘끝판왕’이며 표현되지 못하는 게 무엇일까 할 정도로 종횡무진인 데다가 최신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이제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영역까지 다 들추어낸다. 게다가 영화적 상상력이 과학 발전을 앞장서 이끌어 갈 정도이니 족히 이 시대의 주인공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영역 대부분이 그렇듯이 과학 발전을 인간 정신이 따라가지 못해 문화 지체 현상(아노미)을 보이는데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발전하는 표현양식을 스토리가 따라가지 못해 허접한 이야기에 끝없이 치고받는 자극적인 장면만으로 이루어진 영화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와중에 영화 <싱글 라이더>는 색다르다. 아니 심심하고 답답하다고 해야 하나?
 
겉으로는 기러기아빠로 표상되는 이산가족 문제를 소재로 했지만, 사회 문제를 다루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의 주제는 좀 더 먼 곳에 있다. 아내와 아들을 호주로 보낸 채 기러기 생활을 하던 증권회사 지점장 강재훈(이병헌)은 어느 날 부실채권 사건으로 모든 걸 잃고 최악의 상황에 부닥친다. 혼자만의 생활에 지친 그는 가족이 있는 호주로 날아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본 아내(공효진)의 모습이 이전과 너무 다른 데 놀란다. 그녀는 자신만의 새로운 삶을 준비하며 옆에는 이미 다른 남자들의 흔적만이 가득하다. 그는 아내와 아들 주위를 맴돌 뿐 변해 버린 현실 속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그의 자리는 아무 곳에도 없다. 영화는 줄곧 이런 상황을 일인칭 시점으로 강재훈의 감정선을 지루하지만, 집요하게 추적한다. 
 
사실 이런 유의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범람했다. 기러기 가장이 밤낮없이 열심히 벌어 돈을 보내 주었더니 아내가 현지에서 바람이 났다더라. 혹은 오래 떨어져 있다 보니 마음마저 멀어져 끝내 이혼하고 말았다더라 하는 사연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극적인 장치들을 외면한다. 그저 주변을 맴돌며 안타깝고 가슴 아파할 뿐이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강재훈은 이미 현실을 바꿀 능력을 상실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지막 반전은 영화 곳곳에 매설해 놓은 이상한 설정들의 아귀가 비로소 맞아가는 피드백의 재미를 준다. 지나간 장면들을 되새기며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샤말란 감독의 <식스 센스>에서 이미 경험했던 방식이어서 그런지 신선한 느낌은 덜 했다. 
 
그러나 영화를 관통하는 ‘사랑’과 ‘믿음’이라는 주제는 여전히 묵직하다. 이는 배우 이병헌에 힘입은 바 크다. 스산한 삶의 외로움과 안타까움과 공허함을 말없이 눈빛으로 표현한다. 최근 다양한 장르에 출연하고 있지만, 그의 초기작인 <번지점프를 하다> 이후 이룩한 내면 연기의 근사한 성과다. 시나리오를 읽고 직접 제작비를 투자한 이유를 알겠다.
 
이야기 중간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워킹홀리데이 문제가 등장한다. 기러기 아빠만이 아니라 삶의 무게로 지친 아픈 청춘들의 모습이다. 힘들게 새벽부터 일하며 돈을 모아 귀국을 기다리던 유진아(안소희)의 모습을 통해 젊은 청춘들의 삶도 그리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인생은 영원한 ‘싱글 라이더’인지 모른다. 마지막의 열린 결말이 그래서 더욱 마음에 남는다. 
 
* 사진은 사이트의 것입니다.
1970-01-01 09:00 2017-03-04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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