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 읽은 작품 중 교과서 외의 작품으로 기억되는 소설은 많지 않은데 제목 때문에 유독 머리에 남는 소설이 손창섭의 ‘잉여인간’이다. 50년대 후반에 발표된 작품으로 일명 전후소설에 해당한다.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주인공 치과의사와 무능한 두 친구 이야기였다. 여기서 두 친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무능한데 모두 사회에 쓸모없다는 의미에서 잉여인간이라는 말이다.
 
원래 잉여라는 말은 경제 용어로 사회주의 경제학의 시조인 카를 마르크스가 최초로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를 착취한다나 뭐라나 하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잉여는 ‘남는’ 혹은 ‘추가한’이라는 뜻이었는데 소설 속의 잉여는 ‘불필요한’ 혹은 ‘없어져야 할’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듯하다. 그러니까 ‘필요’하지 않으면 사라지라는 효율지상주의의 산물이다.
 
우리가 이 정도나마 살게 된 것이 7, 80년대 산업화와 효율지상주의 덕분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지금은 그 시절을 가리켜 틀에 박힌 군사문화와 획일적인 교육이었다고 비웃지만, 효율적인 산업화를 위해 일정 부분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 결과 대부분 크게 낙오하지 않고 삶을 지켜올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전후 사회에 우글거리던 잉여인간들이 빠르게 사라져갔다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10년 사이에 새로운 잉여인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수명연장과 고령화가 가져다준 고약한 선물인데, 일없이 오래 살아서 국가재정 축내고 자손들 고생시킨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모 신문의 독자 칼럼을 보니 65세에 이른 한 은퇴자가 노령 혜택을 받으려고 여기저기 관공서를 돌아다니며 느낀 수모를 토로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 자신이 코앞에 닥친 문제라 억울하고 화도 나지만, 나라 사정이 딱하기는 하다. 올해부터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노령 인구가 15세 미만 어린이 인구보다 많아진단다. 이런 기형적인 가분수 사회에서는 15세에서 64세 사이의 노동 인구에 속하는 젊은이 4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한다. 이렇게 계속 진행되면 우리 경제가 유지될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발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60세 전후로 은퇴해 이른바 전통적인 개념의 시니어로 100세까지 살아야 한다고 상상해 보면, 지극히 간단한 산수 계산만으로도 그런 사회 구도는 존재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인을 제대로 봉양하라고 목소리만 높일 게 아니라 스스로 잉여가 되지 않으려는 노력과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피터 드러커는 미래 사회를 지식사회라고 규정했다. 미래는 더 이상 근육이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말이다. 오랜 세월 폭넓은 경험을 하며 온갖 지식과 지혜를 터득한 노령 세대를 일터에서 몰아내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사회에 인식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그리고 고려장 당하지 않으려면 자기 자신도 자기의 가치를 입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최재천은 말한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제1 인생을 ‘번식 인생’이라 부른다면 제2 인생은 ‘환원 인생’으로 부르자.” 제1 인생이 성공을 위해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는 시절이라면 제2 인생은 삶의 의미를 찾으며 산에서 내려가는 여정이라는 뜻이다.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과정이 시야도 넓고 훨씬 멋진 인생이 될 수 있다. 젊은이가 모르는 나만의 보물 지도를 간직하자.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시인 고은)
1970-01-01 09:00 2017-06-27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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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심리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일전에 친구들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친구 A는 10여 년 전 남편 사업이 기울어져 그동안 어렵게 살아왔는데 최근 재기에 성공해 친구들이 모두 축하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A의 오랜 친구이며 유독 A의 어려움을 걱정하고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던 친구 B가 마지못해 함께 축하하지만, 표정에 혼란함이 역력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흔쾌히 축하하지 못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아 이런저런 말을 걸어보면서 한 가지 단서가 감지되었다. 그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마도 상실감이 아닌가 추측되었다. 어쩌면 그동안 B에게는 A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는 수단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누려오던 심리적 우월감이 사라지니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던 것이 아닐까?
 
사실 B가 평소 심성이 나쁜 친구가 아니었으니 한순간 동요했다고 해서 그 친구를 매도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런 심리를 조금씩은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팍팍한 삶 속에서 절대적인 행복은 얻기가 쉽지 않으니 타인의 불행에 나를 비교하면서 마음의 위안으로 삼는 상대적인 행복감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그 행복감을 빼앗겼으니 내심 억울(?)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자살률은 높고 행복 순위는 낮은 나라로 유명하다. 자살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행복량이 제로일 때 오는 충동일 텐데 도대체 우리가 이렇게 행복에 쪼들리며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하는 말로 가난했던 나라가 급격한 경제 발전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물질 만능에 빠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치열한 사회적 경쟁 때문일까?
 
어쩌면 우리가 행복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기 때문은 아닐까? 이를테면 ‘행복 총량의 법칙’ 같은 것이 있어 남이 행복하면 내 행복이 줄어드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물질만능적 사고가 행복을 물질로 측정하게 만들어 행복의 속성을 왜곡해 버린 셈이다. 물질은 나눌수록 줄어들지만,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이치를 우리가 망각한 것이다.
 
사실 쪼들린 생활에 물질을 나누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션, 정혜영 부부 같은 이는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다. 물질을 나누며 살기 어렵다면 까짓거 돈 안 드는 무형의 행복이라도 나누는 것이 현명한 삶이 아니겠는가. 정치의 세계에서 권력은 가까운 가족과도 나누지 못한다지만, 권력을 얻는 데 아무 소용도 없는 행복을 나누지 못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이든 나누는데 인색한 것은 가난 속에 터득한 생존본능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눈다는 말에 본능적인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면 행복을 존재가 아닌 소유로 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발상을 전환해 나누지 말고 합하면 어떨까. 
 
‘우분투’라는 말이 있다. 아프리카어로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뜻인데 보통은 “우리의 성공이 나의 성공, 모두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여성 선교사 한 분이 선교지 부족 어린이들에게 달리기 시합을 제안하고 큰 과일 바구니를 1등 상으로 내걸었더니 모든 아이가 손잡고 들어왔단다. 그 이유를 물으니 “우분투”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아마도 부탄이 행복한 나라 1위인 것도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생활 속에 ‘우분투’를 실천하는 까닭일 터이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 그러나 합할 때 더 커진다.
1970-01-01 09:00 2017-06-1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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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딸애들과 대화하다 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나는 기성세대가 잘 다루지 못하는 IT 활용 능력에 놀라고 또 하나는 젊은 세대가 누리는 정보의 편협성에 놀란다. 그러니까 하드웨어를 다루는 능력은 지난 세대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지만, 소프트웨어와 콘텐츠의 선별 능력은 조금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특히 여행을 준비할 때 딸애의 신기에 가까운 검색 능력은 눈부시다. 가성비 최고의 숙박 시설을 예약하고 특가 항공권을 찾아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럴 때마다 엄지의 움직임이 여의치 않은 지나간 세대의 마음은 주눅이 든다. 일단 새로운 기기에 대한 두려움과 기억력 쇠퇴로 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 채 그들의 장점에 놀라고 응원하며 존중한다.
 
그러나 세상일에 대해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이슈가 되는 뉴스에 관해 견해를 물으면 다소 한쪽으로 편협한 생각을 드러내곤 한다. 시사 정보뿐만 아니라 사소한 생활 정보에서도 이런 현상은 드러난다. 예컨대 전자레인지에서 생성되는 전자파는 눈으로 들여다보지 않는 한 인체에 해가 없다는 사실이 과학자들에 의해 검증되었음에도 전자레인지를 돌리려 하면 지뢰라도 발견한 듯 모두 도망간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니 우리 세대에게는 정보를 얻는 주요 수단이 신문이었던데 반해 요즘 젊은이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 신문이 전체를 보고 깊이 있는 분석을 해 주는 반면 스마트폰으로 전달되는 정보는 깊은 분석 없이 자극적인 제목으로 흘러가니 세상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잃는 것이다.
 
IT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요즘 신문에 오르내리는 제4차 산업혁명은 설명을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를 정도로 난해하다. 과거에는 기술이 발전하면 우리 삶이 나아진다고 어느 정도 믿었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인공지능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하지 않는가. 오히려 기술 발전이 무서워질 지경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바로 스마트폰의 기술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정보의 질적 저하다. 검색 포털은 물론이고 스마트폰을 통해 퍼지는 뉴스들은 그 출처가 어딘지도 모를 쓰레기 정보가 태반이다. 우리가 학교 때 배웠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이 여기도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온갖 허위 정보가 이곳을 통해 생산되고 유통된다. 
 
게다가 요즘에는 페이크 뉴스(fake news, 가짜뉴스)까지 난무한다니 차라리 정보가 가난하던 시절이 그리울 지경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젊은이들은 그런 뉴스에 쉽게 휘말린다. 휘말리는 정도가 아니라 증폭시켜 유통한다. SNS는 이런 가짜들이 숨어서 돌아다니는 온상이 된다. 그리하여 지금 세상은 진실보다 ‘유명인’이 대접받는 기형적인 세상이 되었다.
 
가끔 젊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논쟁이 될 만한 대목에 다다르면 어느새 입을 다물고 마는 경우가 있다. 조금만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는 내용임을 알 수 있는데 철석같이 믿는 모습을 보면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렇다. IT 기술은 현대판 귀신이다. 이 귀신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며 세대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다. 
1970-01-01 09:00 2017-06-13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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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설 명절에 그들을 볼 수 없다. 인터넷에는 그들끼리 ‘설 명절을 피하는 법’ 같은 정보를 주고받는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돈다. 이제는 세뱃돈의 유혹도 그들을 붙잡지 못한다. 더는 결혼에 대한 추궁을 받기 싫어서일지 모른다. 그들이 빠진 안방에는 노인들만 모여 한숨을 쉰다. “도대체 걔들은 왜 결혼할 생각을 안 하는지 몰라. 앞으로 어떻게 살려는지 원.”
 
새해 벽두부터 ‘인구절벽’이라는 생소한 말이 떠돈다. 미래학자 해리 덴트가 최근 저서 <2018년 인구절벽이 온다>에서 고령화 사회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사용한 ‘인구절벽’이라는 용어는 젊은 층의 인구가 어느 순간부터 절벽 같이 떨어지는 현상을 표현한 말이다. 그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사례를 통해 한국도 2018년을 기점으로 경제인구가 하락할 것을 예측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은 내년 이후 경제인구가 감소하며 일본이 겪었던 장기 침체를 경험할 것”이라며 출산율을 높이는 해법으로 보육비 지원을 언급했다. 사실 그들이 결혼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가 보육비를 비롯한 어마어마한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기를 키우며 직장 일을 병행할 수 없으니 이중의 고통이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우리 세대의 기억 속에는 10남매 가족이 그리 놀랍지 않다. 우리도 보통 5, 6남매의 일원이지 않은가. 소위 베이비 붐 세대에게는 오히려 오늘날의 인구절벽이라는 말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소함이다. 아이 낳는 것이 일상사였고 보조금 안 주어도 순풍순풍 아이를 낳곤 했는데 왜 그들은 아이는커녕 결혼마저 기피하는가.
 
하긴 인구 정책적 관점에서만 보면 인구를 늘리는데 왜 결혼을 장려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오늘날 미혼모 문제가 심각하지 않은가.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 보호받지 못하고, 만약 알려질 경우 받아야 할 지탄이 두려워 몰래 버리거나 출산 기록이 남을까 겁나 이름 없이 베이비 박스에 놓고 가지 않는가. 결혼만이 인구 정책의 외곬 길은 아니라는 말이다.
 
주제로 다시 돌아오면 그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이유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과거 다산을 권장하는 전통은 당시 경제력의 바탕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인력(人力)이었으므로 다산은 곧바로 미래를 보장하는 경제 행위였으나 지금은 과연 그런가? 우리만 해도 형제자매들이 취직하여 가정경제에 나름 보탬을 주었으나 이젠 노후에도 각자도생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야 할 필요성이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별로 필요도 느끼지 않는데 자꾸 결혼하여 국가 경제를 위해 자식을 낳으라니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이다. 게다가 꼭 자식이 아니라도 자신의 정신적 DNA를 남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글로 혹은 SNS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다. 
 
굳이 인구가 걱정이라면 트럼프와 반대로 이민을 받으면 되지 않겠는가. 젊은이들이 아이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이루기 위해 결혼할 때까지 조금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면 어떨까.
1970-01-01 09:00 2017-06-06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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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흑백 갈등을 다룬 영화는 많다. 그러나 솔직히 그런 영화들을 보는 일은 불편하다. 마치 우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는 것처럼 백인들의 원죄의식이 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잔혹하거나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 서서히 바뀌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오바마를 배출한 자부심 때문은 아닐까?
 
하긴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다. 아마도 이 소재를 60년대 그 시절에 다루었더라면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으리라. <히든 피겨스>는 그 1960년대 흑백 문제를 21세기식 시각으로 바라보았기에 훨씬 관대하고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이 영화는 페미니즘을 다룬 영화에 가깝다. 그래서 영화를 본 뒤에도 감정의 앙금이 없이 산뜻하다.
 
<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에 벌어졌던 우주개발 경쟁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는 케네디 대통령의 선언을 기폭제로 불붙은 이 경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끌었던 NASA 프로젝트에 숨겨진 천재들의 실화가 골격이다. 타고난 천재성으로 백인 남성들의 천국인 NASA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세 여성의 이야기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들은 수학 천재 캐서린 존슨(타라지 헨슨) 흑인여성 책임자이며 프로그래머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엔지니어 메리 잭슨(자넬 모네)이다. 
 
흑백 문제를 다룬 영화가 늘 그렇듯이 이 영화에도 흑백분리법이라는 현실과 편견이라는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 살아가는 세 흑인 여성이 등장한다. 그러나 첫 시퀀스부터 우리의 예상을 깨뜨린다. 세 여성이 출근길에 차가 고장 나고 백인 경찰이 등장한다. 익숙한 장면을 예상하던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고 경찰은 그녀들을 에스코트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탓에 이야기는 지루하다. 극적인 장치 없이 스토리는 자잘한 에피소드로 진행된다. 예컨대 그 당시 흑백분리 화장실 때문에 늘 800m나 뛰어가서 일을 보아야 했던 차별을 캐서린이 항의하자 잘생긴 상사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이 “NASA에서 모든 사람의 소변 색깔은 똑같아!” 같은 멋지고 속 시원한 대사로 상황을 수습한다. 화장실 가는 장면의 긴박감을 경쾌한 음악으로 승화(?)시킨 점은 데오도르 멜피 감독의 재치다.
 
물론 극적인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여성 특히 흑인은 회의석상에 참석할 수 없다는 불문율을 깨고 천재를 알아본 알 해리슨은 캐서린을 회의에 참석시킨다. 그녀가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수학 공식을 사다리 타고 올라가 칠판 꼭대기부터 써 내리는 장면은 실로 감동적이다. 그러나 전 퍼스트레디인 미셀 오바마의 “‘절대 포기하지 말고 자신을 믿어라.’ 이것이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라는 평이 이 영화의 존재 가치를 높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진보적인 메시지가 이 영화를 아카데미까지 끌어올리고 결국 NASA 최초 흑인 여성 책임자이며 프로그래머 역을 연기한 옥타비아 스펜서에게 여우조연상이 돌아가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분명 감동 실화임에도 여전히 미국지상주의적인 메시지가 마음에 걸린다. 또한 “이론이 아닌 숫자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 수학은 항상 믿음직하죠.”와 같은 대사가 어찌 우리 같은 수학 포기자들에게 감동을 주겠는가. 
 
오히려 마지막 엔딩이 문득 마음에 걸린다. 이렇게 치열하게 올라갔던 그들도 정작 컴퓨터의 등장으로 수학 천재의 빛이 가려진다. 마치 인디아나 존스에서 칼을 휘두르며 덤비는 적에게 당황한 척하며 총을 발사하는 해리슨 포드의 유머처럼 시대가 바뀌면 모든 것이 허망해진다. 그래서 그들의 비극과 분투도 한바탕 소극처럼 보인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 보면 희극이다.”(찰리 채플린)
1970-01-01 09:00 2017-05-26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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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머리털에 가장 민감한 연예인은 배우 이덕화와 가수 설운도가 아닌가 한다. 아니 이미 머리털이 없으니 가발에 민감하다고 해야 하나? 반듯한 가발을 쓰고 나오는 두 사람은 평소에도 머리에 신경 쓰는 모습이 유별나다. 머리에 관한 화제에 못마땅해 하는 모습도 비슷하다. 그러나 그 덕에 가발 캐릭터를 획득해 밥벌이에 도움을 받고 있으니 그리 불평할 일은 아니다.
 
갑자기 머리카락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나이 들면서 부쩍 머리카락이 빠지는 느낌이 들어서다. 나이가 들면 머리카락뿐 아니라 온몸 곳곳에 빠지고 부실해지는 게 수두룩한데 굳이 머리카락에만 민감할 이유는 없겠지만, 머리는 외모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반영되는 터라 더 신경이 쓰인다. 하긴 옛날에 어머니도 노년에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셨던 터라 그러려니 각오하고 받아들인다.
 
남편도 대학생 때는 베토벤이라 불릴 정도로 머리털이 풍성했었는데 세월의 풍상에 시달려 지금은 마치 황성 옛터처럼 황량한 모습이다. 그런대로 아직은 주변머리가 있어 소갈머리를 어느 정도 가려주고 있으니 버틸 만하지만, 언제 맨땅이 드러날지 알 수 없다. 그런 모습이 때론 측은하기도 한데 남편은 머리털 빠지는데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다. 
 
하긴 머리카락이 우리 인생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것도 아닌데 거기까지 신경 쓰며 살아야 하는가 싶기도 하다. 머리 모양이 아무러면 어떤가. 옛날에는 상투를 틀고도 살았는데. 게다가 요즘은 머리를 박박 밀고 다니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머리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바뀌고 있는지 모른다. 자주 보아서 그런지 유명인들의 삭발 머리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보인다.
 
얼마 전 국내 모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는 한국 거주 영국인 팀 알퍼의 글을 읽고 한참 웃었던 적이 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탈모에 대한 관념과 전혀 다른 서양 사람들의 사고를 흥미 있게 묘사했다. 대부분의 영국 남자들은 머리카락이 빠지기를 고대한단다. 왜냐하면, 머리털이 빠지기 시작하면 머리를 밀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황당한 이야긴가 하겠지만, 우리나라와 서양의 대머리에 대한 관념이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서양인들은 우리처럼 대머리를 부끄러워하는 법이 없다. 영어의 대머리를 뜻하는 ‘egghead'는 ’지성인‘ ’지식인‘으로 해석된단다. 심리학자 프랭크 무스카렐라 미국 배리대학 교수는 소크라테스, 다윈, 처칠 등 ’대머리 지식인‘을 언급하며 “대머리는 유전적으로 우성(優性)이며 사회적 지위가 높고, 정직하다는 인상을 준다.”고 말한다. 
 
그러니 할리우드 영화에 대머리가 그렇게 많이 등장했던 것이다. 자꾸 봐서 그런지 처음엔 이상했던 브루스 윌리스도 어느새 대머리가 매력 있게 보인다. 젊었을 때부터 멋있었던 숀 코너리는 대머리가 된 후 더 중후하게 보인다. M자형 대머리가 되어가는 주드 로는 또 얼마나 매력 있는가. 도대체 서양 대머리는 좋게 보면서 우리 대머리는 얕잡아보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성인 남성 대부분이 ‘탈모포비아(phobia, 공포증)’에 시달린다는 보도가 있다. ‘탈모가 염려된 적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99%가 ‘그렇다’고 답했다. 생각해 보면 외모지상주의에 물든 우리의 아픈 현실이 눈에 밟힌다. 그러나 어쩌랴. 머리가 빠지면 루저로 전락하는 이 나라의 형편에서 오늘도 애들 몰래 가발을 고르고 머리에 흑채를 뿌린다.
 
1970-01-01 09:00 2017-05-20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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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치 않은 시사회 초대를 받았다. 작가주의 소형영화지만 칸이 사랑하는 다르덴 형제의 새 영화라 시작부터 가슴이 설렜다. 다르덴 형제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에 7번이나 오르고 2번의 수상을 거머쥔 그야말로 칸의 황제라 할만하다. 어느 해인가 다르덴 형제가 작품을 출품하지 않은 해에 수상한 감독은 그들이 출품하지 않은 것에 깊은 감사를 표한 적도 있을 정도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대부분 사회 문제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집요할 만큼 물고 늘어진다. 그러다 보니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심심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달고 짠 외식에 시달린 미각이 평양냉면의 달관한 무미함에 위로받듯 할리우드의 속 빈 깡통 같은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 모처럼 영화의 세계에 진지하게 몰두한 시간이었다.
 
영화는 ‘다르덴 형제가 주목하는 가해자는 어떤 형상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집요하게 쫓는다. 그 역할을 주인공 제니(아델 하에넬 분)가 오롯이 감당한다. 그녀는 의사다. 그녀에게 잘못이 있다면, 진료시간이 끝난 이후 병원 문을 두드린 소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것, 그것뿐이다. 게다가 그녀의 죽음이 진료를 받지 못한 때문만도 아니다.
 
제니도 평범한 의사로 격무에 시달리는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며 좀 더 나은 종합병원에로의 탈출을 꿈꾸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사건은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며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제니는 죄의식을 느끼며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사건의 진상이 아니라 소녀의 이름이다. 단지 소녀의 가족에게 그녀의 죽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바로 이 대목에 다르덴 형제의 시선이 숨어있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칸이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 홍상수가 떠오른다. 그도 다르덴 형제 못지않게 수십 년간 인간의 문제를 끈질기게 추적해온 작가다. 그러나 홍상수가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 숨어있는 추한 진실에 천착해 왔다면 다르덴 형제는 사회문제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제니의 죄책감 속에는 유럽이 처한 가슴 아픈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죽은 소녀는 불법체류자로서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험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였다. 이는 유럽 사회가 외면하고 싶지만,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문제이다. 감독은 이 부분을 들춰내며 우리들의 각성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자극적인 장면이나 극적인 장치를 만들지 않으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그 마지노선이 바로 ‘이름 찾기’인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은 이름을 찾기 위해 다니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는다. 사실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 입장에서도 그녀의 죄책감은 과도해 보인다. 어쩌면 감독이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을 만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바로 이러한 우리의 감성이 얼마나 죄의식에 무뎌져 있는지를 생생하게 일깨운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어느새 우리는 타인의 문제에 무감각하게 되어버렸다. 사회적 정의는 누군가가 지켜야 하는 것이고 나와는 무관한 듯 살아가고 있다. 문명화된 선진국들도 예외가 아니다. 트럼프의 등장은 이런 현상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현실이 워낙 극적이라 오히려 다르덴의 심심함이 우리를 각성하게 하는지 모른다.
 
티저 포스터에 환자의 등을 응시하는 제니의 눈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마지막에 제니의 눈은 환자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다르덴의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극장을 나설 때 김춘수의 절창이 떠올랐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1970-01-01 09:00 2017-05-1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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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만난 지 오래된 친구 얼굴이나 보려고 전화를 걸었더니 시간이 없단다. 아니 하는 일도 없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시간이 없다니! 속으로 서운해하며 이유를 물었더니 아이를 봐야 한단다. ‘그 집 딸은 전업주부인데 무슨 애를 본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푸념을 늘어놓는다. 딸이 일이 생겨 나가느라 손녀를 자신에게 맡기고 가버려 힘들어도 꼼짝할 수가 없단다.
 
그 사연을 듣고 보니 학교 선생 하는 친구 생각이 났다. 뒤늦게 시작한 탓에 정년을 채워야 연금이 제대로 나온다며 환갑이 넘어서도 꼬박꼬박 새벽같이 학교에 나가는 친구인데, 언젠가 만나서 이야기 도중 요즈음 미칠 지경이란다. 이유인즉슨 학교에서 퇴근하면 딸네 집으로 출근하여 손주들 봐주느라 체력이 바닥나 제명에 못 죽겠다는 하소연이었다.
 
도대체 이 무슨 기구한 운명들이란 말인가. 말로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새끼들인데 기쁘게 봐줘야지. 더 늙기 전에.”라고 우스갯소리로 넘겼지만, 안 아픈 곳 없는 몸뚱이로 드센 아이들 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왜 모르겠는가. 살림하고 애들 키우고 더러는 시집살이까지 해가면서 지낸 기나긴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좀 쉴 만한데 고생은 끝이 없다.
 
옛날 같으면 대가족 속에서 직장 나가는 가장 빼고 다들 시간이 넘쳐나니 알게 모르게 서로 돕는 가운데 아이들이 저절로 자라났지만, 핵가족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나니 기껏 하나둘 있는 아이마저 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렇다고 소위 ‘경력 단절 여성’이 되고 나면 다시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니 만만한 게 할머니가 아닌가.
 
아니 그러면 돈 주고 보모 구하면 되지 왜 늙은이 고생시키느냐 하지만 생떼 같은 아이를 남에게 맡기는 것이 찜찜한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는 6~7명씩 낳아놔도 알아서 잘 자랐는데 이건 겨우 하나둘 낳는 것도 이렇게 키우기 어려우니 어렴풋이 ‘삼포 세대’라는 유행어가 괜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겠다. 모두가 가난을 이기고 잘살게 된 업보라 생각하니 삶은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최근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저출산’ 문제도 따지고 보면 누구 잘못이 아니라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사회가 변해가는 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물인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가 바뀌어 가는 과정에 애꿎게 중간에 끼어 고생하는 세대가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우리가 바로 그 세대라는 점이 불행이다. 젊어서 치이고 늙어서 부대끼는 꼴이다.
 
최근 젊은 인류학자 이상희 교수의 저서 <인류의 기원>에 ‘할머니 가설’이라는 ‘썰’이 등장했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자가 된 보이지 않는 힘의 근원은 바로 할머니의 존재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늙어서 폐경이 오는 이유는 이제 애 그만 낳고 자식의 애들을 키우라는 탁월한 진화적 선택이라는 말이다. 그 바람에 젊은 노동력을 확보한 인류가 지구를 정복했다는 이야기다.
 
그 글을 읽고 나니 인류를 위해 손주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싹트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직장 끝내고 다시 딸네 집으로 출근해 손주들을 돌보는 삶은 너무 고달프지 않은가! 인류를 위한 사명도 좋지만, 몸까지 바쳐 하기에는 우리의 신체는 너무 낡았다. 드러내 놓고 말은 안 했지만, 시집 안 가고 있는 두 딸이 정말 고맙다.
 
1970-01-01 09:00 2017-05-0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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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맹목의 뜨거운 싸움이 끝나면 이제부터 그 땅에 살아남아야 하는 개인들의, 살벌하고 차가운 또 다른 전쟁터가 열린다. 그래서 전쟁은 더욱 참혹하다. 전쟁은 늘 고상한 명분을 앞세우고 시작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고 불분명한 법이다. 전쟁은 그래서 더욱 추악하다.
 
전쟁영화 하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식의 영웅담이 먼저 떠오른다. 승자 의식을 고취시키고 역사의 주도권을 확인하는 주류 영화들이다.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스펙터클하고 승자의 미담이 주를 이룬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는 아픔을 이런 식으로 봉합해왔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가 아물면서 이젠 전쟁 그 자체를 똑바로 직시하는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랜드 오브 마인>은 전쟁이 끝난 이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총소리 한방 들리지 않지만, 전쟁보다 더 스릴 넘치고, 오감과 심장을 쥐어짜고, 정서의 참담함을 성취한다. 이 기이한 전쟁영화는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잔인하게 만들고 도덕성을 황폐시키는지, 그리고 그러한 폐허에서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잔잔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덴마크 서부해변은 독일군이 매설한 200여만 개의 지뢰가 남아 있었다. 승전한 연합군 측은 이 지뢰를 독일군 포로들을 동원해 제거하려 한다. 그중 영화 속의 ‘스캘링엔’ 지역을 담당한 것은 주로 독일의 소년병들이었다. 그들은 작업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죽음에 내몰린다.
 
소년병들이 지뢰 해체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장비도 없이 작은 탐지봉 하나에 의지하여 모래밭을 기어가며 생사의 기로를 넘나든다. 아름다운 해변의 모래사장이 그들에겐 죽음의 땅인 셈이다. 영화는 그들 중 일부인 ‘칼 상사(로랜드 몰러)’ 휘하 소년병들의 이야기를 통해 종전되었지만, 결코 끝나지 않은 전쟁의 깊은 상처를 증언하고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독일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는 덴마크 군인 ‘칼 상사’에겐 소년들은 소모품에 불과하다. 때문에 소년병들에게는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고 허름한 판잣집에 몰아넣은 채 지뢰 제거 작업에만 몰두하게 한다. 한때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나치 독일이라는 괴물과 싸웠지만, 이제는 그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원제는 덴마크어로 ‘모래 아래(under sandet)’라는 뜻이었지만, 영어 제목으로 바뀌면서 ‘지뢰의 땅’이라는 의미와 ‘나의 땅’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됐다. 그러니까 소년병들에겐 이 땅의 절망과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이 늘 교차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의 이 간절한 소망이 그들을 살리는 힘이며 칼 상사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지뢰가 폭발하면 팔다리가 찢어지는 이 지옥의 땅도 눈을 들어 보면 평화롭고 아름다운 해변이듯, 상사의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빛도 부모의 마음으로 보면 그들도 그저 순박한 아이들일 뿐이다. 상황이 만들어낸 잔인한 ‘칼 상사’도 소년들의 선한 눈망울을 보며 점차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며 구원의 길로 나아간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덴마크의 마틴 잔드블리엣 감독은 무명에 가까운 배우와 평범한 소년들을 통해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간하기 어려운 전쟁의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전쟁이란 본디 아이러니로 가득한 인간들의 맹목임을.
 
1970-01-01 09:00 2017-04-28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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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제법 각오하고 공자의 <논어(論語)>를 뒤적였던 적이 있다. 지금은 거의 생각나는 구절이 없지만, 첫 문장은 기억한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문장이다. 당시 해석에는 “배우고 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로 되어 있었다. 그때 우리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늘 배우고 익혔으나 재미는 별로 없다고 생각하며 넘어갔다.
 
선생님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며 “봐라! 공자님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셨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하니?”라고 나무라시면 그저 우리가 잘못했으려니 하고 열심히 공부할 각오를 다지곤 했다. 말하자면 공자님도 우리처럼 입시 공부를 하셨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당시에는 대학입시가 없었지 않은가! 도대체 공자는 무슨 공부를 그렇게 했는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 내막을 살펴보면, 필자가 나이 환갑을 넘기면서 공자님은 자신의 나이 60세를 ‘이순(耳順)’이라고 이름 붙이신 이유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도달한 위대한(?) 결과물인 셈이다. 그러니까 공자님이 나이에 붙인 별명들이 논어 첫 구절의 내용과 은근히 상통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공자님은 나이에 따른 학문의 과정을 언급하며 15세에 ‘지우학(志于學)’ 하고, 30세에 ‘이립(而立)’ 했으며, 40세가 되니 ‘불혹(不惑)’ 하게 되고, 50이 되니 ‘지천명(知天命)’ 했으며, 60세에는 ‘이순(耳順)’의 경지에 이르고, 70세가 되니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慾, 不踰矩)’라고 일렀다. 이런 언급이 나중에 나이에 따른 별명이 되어 유식한 척할 때 써먹곤 하는 것이다.
 
어릴 땐 이 말들을 학문하는 사람의 십계명인 줄로 이해하고 한번 그대로 해보려고 달려들었다가 30세 지나면서 대부분의 열정이 ‘이립’도 못하고 시들고 말았던 아픈 기억이 있다. 그러니 ‘불혹’이니 ‘이순’이니 하는 말들이 관심 있을 리 없었다. 그저 40세가 되면 바람을 안 피우게 되나보다 하는 정도로 이해하고 기다렸을 뿐이다.
 
그런데 환갑을 지나면서 이 말들이 그런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공자가 학문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다시 말뜻을 더듬어 보니 이는 사람이 살면서 깨달아가는 삶의 지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60을 넘기면서 조금씩 인간을 이해하게 되었다. 옛날 같으면 발끈했을 말도 조용히 듣게 되고 요즘 유행어로 “그럴 수 있지” 하며 넘기게 되더란 말이다. 그게 바로 ‘귀가 순해진’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40이 되면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50세 정도면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 정도는 알아야 할 게 아닌가. 다시 말하면 철이 든다는 뜻이겠지. 70세가 되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도덕 법칙에 맞는다는 말은 그 나이가 되면 지혜로운 경지에 올라 세상을 통찰하고 남을 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해 가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된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니까 공자님의 시대에 입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니 그의 공부 주제는 바로 ‘세상 공부’ ‘사람 공부’였던 셈이다. 사실 살다 보면 인간을 이해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어디에 있던가. 비로소 김형석 교수가 70이 넘으니 인생을 알게 되더라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지금껏 우리는 평생 인간을 공부해온 것이며 이 공부가 경지에 오를 때 노년이 행복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1970-01-01 09:00 2017-04-2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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