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영화 한 편을 만났다. 영화 속에는 의미는 있지만, 과도한 폭력이 난무하고 종잡을 수 없는 거친 분노로 가득하고 불분명한 대상에 대한 원망이 팽배해 있다. 그런데도 영화는 균형을 잃지 않는다. 마치 서부극의 도시 버전처럼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치안 취약지대로 보이면서도 묘한 설득력을 유지한다. 게다가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서정적이기까지 하다.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은 오로지 아카데미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의 강한 흡인력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설명을 생략한 채 행동에 돌입하는 연출의 동적 에너지 때문일지 모른다. 시작부터 강렬하다. 한 작은 시골 마을의 쓸모없이 서 있는 대형 광고판 세 개에 자극적인 문구의 광고가 걸리면서 초반부터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딸이 강간당해 죽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경찰서장!” 대충 순화해서 이런 내용이다.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7개월째 미궁에 빠진 사건 때문에 분노로 가득하다. 자칫하면 흔한 모성의 절규와 애틋한 사연 같은 부류의 영화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측은 빗나간다. 엄마는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고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는 마을의 존경받는 인물이다.

 

게다가 경찰서장이 췌장암 말기임이 알려지자, 반감을 드러내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하는 밀드레드에게서 사람들은 등을 돌린다. 그러니까 밀드레드의 폭력은 그 원인이 모성인지 단순한 분노인지 모호하다. 어쩌면 뒤죽박죽 폭력으로 얼룩져 가는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은유일지 모른다. 총기 난사와 같은 맹목적 분노가 오늘날 미국의 현실이 아닌가.

 

여기 또 하나의 맹목적 분노가 있다. 경찰서장을 존경하지만, 흑인 동성애자 등 소수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찰 딕슨(샘 록웰)이다. 이 또한 소수자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이 일상화한 미국의 민낯이다. 경찰서장이 자살하자 딕슨은 이성을 잃고 밀드레드의 광고 요청을 받아준 광고업자 웰비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창문 밖으로 내던진다. 이제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밀드레드는 이에 대한 복수로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져 불태운다. 마침 그 안에는 딕슨이 경찰서장이 자신에게 남긴 유서를 읽고 있다. “진짜 형사가 되는 데 필요한 게 뭔지 아니? 그건 바로 참된 사랑이야. 사랑은 우릴 차분하게 하지. 증오는 아무것도 해결 못 하지만 차분함은 해결할 수 있어. 너 자신을 믿고 한 번 해 보렴. 넌 참 괜찮은 녀석이니까, 딕슨.” 어쩌면 이 대목이 영화의 변곡점일 터이다.

 

화상으로 입원한 딕슨 옆에는 자신이 구타한 웰비가 누워있다. 웰비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고 연민을 보내다가 그가 딕슨임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딕슨의 진정어린 사과를 듣고 아픈 손으로 그에게 오렌지주스를 권한다. 사랑이 미움을 이기는 순간이라 할만하다. 이후 딕슨은 새 사람으로 변하고 경찰서에 불을 낸 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밀드레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몰래 협조한다.

 

이 영화에서 의미심장한 장면은 죽기 전 경찰서장이 밀드레드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대목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고 세상이 텅 비어 있으니,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우리 자신뿐이겠지. 세상 어디에도 의미가 없으니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의미가 되어야겠지.” 감독의 메시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밀드레드 전남편 애인인 19살짜리 입을 통해서 등장한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만들 뿐이에요.”

 

딕슨의 노력으로 알게 된 다른 강간범을 딕슨과 함께 찾으러 가면서 밀드레드는 처음으로 웃음을 보인다. 강간범을 만나면 죽일지 말지 가면서 생각해 보자며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 이 영화는 오로지 이 두 배우에게 빚졌다.

1970-01-01 09:00 2018-05-15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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