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보는 스필버그가 돌아왔다. 사실 스티븐 스필버그에 대해 무엇을 더 첨가하랴! <죠스>에서 시작된 그의 필모그라피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오로지 재미로 무장한 대중영화에서 인권을 다룬 진지한 영화까지 그의 영화는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간간이 아카데미에 맞춘 영화를 제작하며 수상 경력까지 관리하는 영리함도 보인다. <더 포스트>가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는 사실 아카데미에 부합하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아카데미가 좋아하는 배우 톰 행크스와 메릴 스트립이 출연하며 또한 소재가 흥미진진한 미국 정부와 언론의 대결이니 스필버그가 노골적으로 아카데미를 겨냥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정적인 소재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러로 바꾼 스필버그의 탁월한 연출력이 없었다면 아카데미가 관심을 보였을 리 없다.

 

영화는 70년대 닉슨 시절에 일어난 펜타곤 페이퍼 사건을 소재로 한다. 군사 전문가인 댄 앨스버그(매튜 리즈)는 국가기밀을 보관하는 연구소에 근무하며 베트남 전쟁을 연구하던 중, 베트남 현장을 방문한 뒤 잘못된 전쟁에 미국 젊은이들이 희생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전장에서 돌아와 전쟁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가 국민을 속인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일급 비밀문서인 맥나마라 보고서를 빼돌린다.

 

댄은 간첩혐의를 받을 것을 무릅쓰고 이 기밀을 뉴욕 타임스에 넘긴다. 낙종한 워싱턴 포스트는 사운을 걸고 이 보고서를 입수하려 한다. 열혈기자 벤 백디키언(밥 오덴커크)은 수소문 끝에 이 보고서의 출처인 댄을 만나 보고서를 입수하고 비행기 일등석에 두 자리를 만들어 이 서류박스를 편집장 벤 브래들리(톰 행크스)의 집으로 가져온다. 이 과정이 마치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이 넘친다.

 

급하게 쓸어 담아 가져온 까닭에 기자들이 모여 보고서의 순서를 맞추느라 벤의 서재는 난장판이 된다. 마감 시간을 놓고 싸우는 그 시각 또 다른 싸움이 전개된다. 이 기사를 보도할 것인가를 놓고 캐서린의 생일파티 자리에서 사주인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과 이사들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보도할 경우 이미 뉴욕 타임스가 당한 것과 같이 정부 당국의 기소가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 캐서린과 법무 담당 이사와의 통화를 반대 측인 이사회 의장인 프리츠(트레이시 레츠)와 편집장 벤이 함께 들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고성이 오가지만 결국 회사의 운명이 달린 결단은 사주인 캐서린이 내릴 수밖에 없다. 그동안 수줍어하고 우유부단한 듯했던 그녀는 단호한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보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고 국민이 지는 겁니다.”

 

이 영화는 겉으론 언론의 사명을 다룬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당시 여성들에 대한 편견과 사회적 지위를 부각시킨 페미니즘 영화로도 볼 수 있다. 남성 중심 시대에 여성 사주인 캐서린의 변화와 자각을 통해 여성들의 각성을 다룬 것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긴박한 취재 과정보다 캐서린이 결단하는 장면을 클라이맥스로 내세운 데서 감독의 의도가 읽힌다.

 

어쩌면 이런 페미니즘의 부각은 평소 지나친 애국주의로 비판받았던 콤플렉스의 소산인지 모른다. 아무튼, 오늘의 관객은 애국보다 여성의 권리 신장에 더 관심이 있을 것은 틀림없다. 사족으로 이 사건과 별 관계 없는 닉슨 대통령을 마구 매도하는 것은 오늘날 트럼프를 빗대 조롱하는 혐의가 짙다. 스필버그도 민주당이다.

1970-01-01 09:00 2018-05-24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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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영화 한 편을 만났다. 영화 속에는 의미는 있지만, 과도한 폭력이 난무하고 종잡을 수 없는 거친 분노로 가득하고 불분명한 대상에 대한 원망이 팽배해 있다. 그런데도 영화는 균형을 잃지 않는다. 마치 서부극의 도시 버전처럼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치안 취약지대로 보이면서도 묘한 설득력을 유지한다. 게다가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 서정적이기까지 하다.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은 오로지 아카데미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의 강한 흡인력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설명을 생략한 채 행동에 돌입하는 연출의 동적 에너지 때문일지 모른다. 시작부터 강렬하다. 한 작은 시골 마을의 쓸모없이 서 있는 대형 광고판 세 개에 자극적인 문구의 광고가 걸리면서 초반부터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딸이 강간당해 죽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경찰서장!” 대충 순화해서 이런 내용이다.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7개월째 미궁에 빠진 사건 때문에 분노로 가득하다. 자칫하면 흔한 모성의 절규와 애틋한 사연 같은 부류의 영화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측은 빗나간다. 엄마는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고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는 마을의 존경받는 인물이다.

 

게다가 경찰서장이 췌장암 말기임이 알려지자, 반감을 드러내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하는 밀드레드에게서 사람들은 등을 돌린다. 그러니까 밀드레드의 폭력은 그 원인이 모성인지 단순한 분노인지 모호하다. 어쩌면 뒤죽박죽 폭력으로 얼룩져 가는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은유일지 모른다. 총기 난사와 같은 맹목적 분노가 오늘날 미국의 현실이 아닌가.

 

여기 또 하나의 맹목적 분노가 있다. 경찰서장을 존경하지만, 흑인 동성애자 등 소수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찰 딕슨(샘 록웰)이다. 이 또한 소수자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이 일상화한 미국의 민낯이다. 경찰서장이 자살하자 딕슨은 이성을 잃고 밀드레드의 광고 요청을 받아준 광고업자 웰비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창문 밖으로 내던진다. 이제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밀드레드는 이에 대한 복수로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져 불태운다. 마침 그 안에는 딕슨이 경찰서장이 자신에게 남긴 유서를 읽고 있다. “진짜 형사가 되는 데 필요한 게 뭔지 아니? 그건 바로 참된 사랑이야. 사랑은 우릴 차분하게 하지. 증오는 아무것도 해결 못 하지만 차분함은 해결할 수 있어. 너 자신을 믿고 한 번 해 보렴. 넌 참 괜찮은 녀석이니까, 딕슨.” 어쩌면 이 대목이 영화의 변곡점일 터이다.

 

화상으로 입원한 딕슨 옆에는 자신이 구타한 웰비가 누워있다. 웰비는 그가 누구인지 모르고 연민을 보내다가 그가 딕슨임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딕슨의 진정어린 사과를 듣고 아픈 손으로 그에게 오렌지주스를 권한다. 사랑이 미움을 이기는 순간이라 할만하다. 이후 딕슨은 새 사람으로 변하고 경찰서에 불을 낸 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밀드레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몰래 협조한다.

 

이 영화에서 의미심장한 장면은 죽기 전 경찰서장이 밀드레드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대목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고 세상이 텅 비어 있으니,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우리 자신뿐이겠지. 세상 어디에도 의미가 없으니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의미가 되어야겠지.” 감독의 메시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밀드레드 전남편 애인인 19살짜리 입을 통해서 등장한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만들 뿐이에요.”

 

딕슨의 노력으로 알게 된 다른 강간범을 딕슨과 함께 찾으러 가면서 밀드레드는 처음으로 웃음을 보인다. 강간범을 만나면 죽일지 말지 가면서 생각해 보자며 영화는 열린 결말로 끝난다. 이 영화는 오로지 이 두 배우에게 빚졌다.

1970-01-01 09:00 2018-05-15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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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일종의 중독 현상이라면 그 중독지수는 어느 정도일까. 보통 중독이란 몸에 좋지 않음에도 짜릿한 쾌감 때문에 끊지 못하는 약물이나 행위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주변을 파멸로 이끌어감에도 멈추지 못하는 불륜적인 사랑은 중독이라 부를 만하다. 그러나 그 길만이 구원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모든 삶의 규칙을 파괴하고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중독인가.

 

영화 <팬텀 스레드>는 오로지 다니엘 데이 루이스를 위한 영화다. 그는 이미 아카데미를 세 번 수상했고 이 영화로 네 번째 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나의 왼발><링컨>으로 인상 깊었는데 난데없이 이 영화가 그의 은퇴작이란 기사를 보고 초조하게 상영관을 찾았다. 아카데미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를 복합상영관에서 찾을 수 없었다. 겨우 대한극장에 딱 한 회만 상영하는 걸 찾아냈다.

 

1950년대 영국과 주변 나라 왕실의 드레스를 만들어 사교계에 유명한 의상실 우드콕의 디자이너 레이놀즈(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틀에 박힌 나날들에 지쳐간다. 기분전환으로 간 시골 레스토랑에서 시골 처녀 알마(빅키 크리엡스)를 만난다. 둘은 첫눈에 호감을 느껴 함께 의상실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녀는 곧 다른 모델들처럼 그의 드레스를 걸친 한낱 마네킹 역할로 내몰린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디자인을 배웠고 거의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늘 어머니의 유령이 주위를 배회하고 오직 누나 시릴(레슬리 맨빌)에만이 의지한다. 그가 사랑을 느꼈던 여인들은 결국 그 두꺼운 장벽을 깨지 못하고 마네킹 역할에 머물다 버려지고 레이놀즈의 어두움도 점차 깊어간다.

 

그러나 알마는 달랐다. 자신의 삶이 저주받았다고 느끼는 레이놀즈를 강박의 세계에서 구해내기로 결심한다. 억압적인 상류 사회에 물들지 않은 알마는 천성적이지만 의도된 도발을 시작한다. 이쯤 되면 포스터에 내걸린 내 사랑이 너를 구원할 거야.”라는 문구가 누구의 말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갈등이 극에 달해 집에서 내쫓기기 직전 알마는 야무진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들에서 독버섯을 따와 그의 찻잔에 탄다. 레이놀즈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알마는 그의 곁을 지키며 자신만이 그를 지켜줄 수 있음을 증명한다. 죽지 않을 만큼의 고통은 그를 삶의 질곡에서 헤어 나오게 하며 드디어 그녀에게 청혼한다. 고통과 쾌감은 동전의 양면인지 모른다. 복어를 다루는 일식 요리사들이 복어 알의 독을 조금 맛보며 고통의 쾌락을 맛본다더니 독버섯은 그녀의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그러나 레이놀즈는 유령처럼 그를 에워싼 두꺼운 과거 삶의 관성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둘의 결혼생활이 파국을 맞을 무렵 그녀는 다시 독버섯의 충격요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전과 다른 것은 몰래 타지 않고 노골적으로, 그것도 그가 싫어하는 버터를 듬뿍 넣어 구운 독버섯요리를 내놓는다. 레이놀즈도 비로소 과거의 짜릿했던 고통의 본질을 알아차린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게 버섯을 먹는다. 그것이 자신의 지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구원임을 알기에.

 

다시 고통에 빠진 그에게 알마는 속삭인다. “난 당신이 바닥에 쓰러졌으면 좋겠어요. 무방비하게, 연약하게, 오직 나의 도움을 원하도록. 그리곤 다시 강해졌으면 해요. 죽진 않을 거예요. 당신은 휴식이 필요해요.” 때론 죽는 것이 사랑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완고한 내면의 죽음으로 진정한 관계가 완성되는 것이라면. 마지막 엔딩처럼 레이놀즈는 과거의 자신을 죽임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완성한다.

 

팬텀 스레드는 매우 중의적이다. 레이놀즈를 감싼 엄마의 유령의 실이며 놀라운 재봉 솜씨가 되기도 하고 결국엔 둘을 연결하는 마법 같은 유령의 바느질이 되었다. 다니엘에게 밀리지 않는 빅키 크리엡스의 연기도 탄탄하다

1970-01-01 09:00 2018-05-09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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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하던 20세기가 가고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낯선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하나둘 깨져나가는 경험을 하며 당혹감을 느낀다. 집값은 늘 올라가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어느 날부터 내려가기 시작하고 은행 이자가 애들 껌값으로 전락했다. 콩나물 교실이 당연했던 기억은 사라지고 아이가 없어 폐교되는 학교가 속출한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변화보다 더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것은 믿었던 가치 체계가 무너지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 이솝우화를 진리로 믿었다. 개미와 베짱이 중에서 개미가 진리이고 베짱이는 부도덕한 게으름뱅이일 뿐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서 개미들은 삶의 방향을 잃고 말았다. 믿었던 미래가 허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반면에 베짱이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어떤 인터넷 편지에서 읽은 글이 생각난다. 어느 사이좋은 부부가 정년 은퇴 후의 여유로운 전원생활과 여행을 꿈꾸며 현재 자신들의 삶을 한없이 인색하게 살기로 작정했다. 현재보다 노후 대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한 노후를 맞을 수 없었다. 남편은 정년을 2년 앞두고 폐암으로 죽었고 아내는 그 충격으로 우울증에 걸렸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시집간 딸이 혼자 사는 어머니 집에 들러 청소하던 중 벽장 속에서 종이 상자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두 부부의 전원생활에 대한 계획과 여행안내 책자가 들어 있었다. 딸은 차마 그것들을 치울 수 없었다. 부모님의 이루지 못한 꿈과 노후 계획들이 가득 차 있어서 감히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거웠기 때문이었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신파적 내용으로 여겨지겠지만, 이것이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현실이고 맹목이다. 우리 세대는 오로지 미래만을 보고 현실의 고난을 견뎌왔다. 그러나 그 파랑새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그런 허망한 미래를 위해 희생한 애꿎은 ‘현재’는 어찌할 것인가. 말하자면 지금 우리 세대의 좌절과 분노는 이런 바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은 인류 역사에서 극히 예외적인 ‘성장시대’에 나타난 기이한 신기루일 뿐이다. 영원히 성장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기대에 속아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말이다. 사실 인간의 계획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 그동안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계획한 대로 진행된 일이 얼마나 되던가. 계획이란 결국 충실한 현재의 누적일 뿐이다.
 
미래 언저리에 도달한 우리가 현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남루하다고 또다시 미래를 꿈꾸며 지금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를 보면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여자를 놓칠 것만 같은 제시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을 한다. “저와 함께 비엔나에서 내리지 않을래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이다.
 
 현명할 것을, 포도주는 그만 익혀 따르고. 
 짧은 인생, 미래에 대한 기대는 줄이게.
 지금 우리가 말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우릴 시기하며 흐른다네.
 현재를 잡게 Carpe Diem, 내일을 믿지 말고.
 
 - 호라티우스, 카르페 디엠 (기원전 65~8, 로마의 시인)
1970-01-01 09:00 2017-08-14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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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굳이 심각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한 시간 반을 영화에 투자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적지 않다. 사상이나 이념같이 불필요하게 무거운 지적 허세도 있지만, 우울한 마음을 위로하는 경쾌한 코미디도 있고, 말초 감정을 자극하는 쾌락도 있다. 심지어는 요즘 문화 트렌드에 맞춘 실용적인 영화도 등장한다. 예컨대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여행 가이드 영화, 먹는 걸 즐기는 이를 위한 먹방 영화. 
 
모처럼 영화 시사회에 초대되어 남편과 함께 참석했다. 의외로 남편이 순순히 따라나선 데는 주연인 다이안 레인의 힘이 컸다. 어떻게 늙어가나 보자는 핑계로 동행했다. 여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필자는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파리로 가는 길이라니. 이제는 오래되어 낡은 흑백 사진처럼 빛바랜 에펠탑이나, 샹젤리제 거리의 개선문 정도가 떠오르는 20년 전의 기억을 안고 시사회장에 들어섰다.
 
왕성한 홍보가 없어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스크린이 몇 안 되는 작은 영화였다. 다만 코폴라 가문의 영화라는 브랜드가 박혀 있어 짝퉁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다. <대부>를 만들어 할리우드의 자존심이 된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 가문의 딸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이미 상당한 필모그라피를 쓰고 있으나 엘레노어 코폴라 감독은 낯설다. 그녀는 프랜시스 코폴라 아내로 이 작품이 데뷔작이란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영화 제작자인 남편 마이클(알렉 볼드윈)을 따라 칸에 온 앤(다이안 레인)이 갑작스러운 귀의 통증으로 다음 행선지인 프라하로 떠나지 못하고 남편과 떨어져 마이클의 동료인 프랑스 남자 자크(아르노 비야르)의 안내를 받아 파리로 직접 간다는 자전적 이야기다. 그런데 하루면 도착할 길을 40시간이나 걸려 가게 된 것은 전적으로 대책 없이 낭만적인 프랑스 남자 덕분이다. 
 
대부분의 낭만적 로드무비가 그렇듯이 이 영화도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양한 명승지의 풍광이 있고, 곳곳마다 풍성한 음식이 있으며, 맥락은 없지만 적절한 로맨스가 조미료처럼 들어 있다. 게다가 미국 여자와 프랑스 남자라니! 캐릭터도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창의적이지는 않지만, 이미 익숙하고 우아한 미감의 엔틱 가구처럼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안락의자인 셈이다.
 
별다른 스토리가 없다 보니 프라하로 떠난 일밖에 모르는 남편은 줄곧 전화에다 대고 “프랑스 남자 조심해!”만 되뇌고 있고, 도덕적인 미국 여자는 “파리로 곧장 가요.”라는 대사만 읊고, 느글느글한 프랑스 남자는 “파리는 어디 안 가요.” 하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간혹 풀밭에서 피크닉 기분을 내며 세잔의 ‘풀밭 위의 식사’ 장면을 패러디 한다든가 하는 재치는 보이지만, 대체로 익숙한 기시감의 연속이다.
 
이야기의 빈곤을 느낀 감독이 끼워 넣은 장면들은 맥락이 분명치 않아 조화를 깨뜨린다. 예컨대 우연히 엿들은 전화 통화에서 돈에 쪼들리는 자크의 상황을 드러내는 장면은 그의 허세를 과장하려는 의도겠지만 뜬금없고, 서로 어두웠던 과거를 이야기하며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내용은 작위적이다. 아무리 프랑스라 해도 동료의 아내에게 필요 이상으로 들이대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나 코폴라 사단의 도움 때문인지 영화는 더 이상 일탈 없이 적절하게 마무리된다. 80대에 접어든 엘레노어의 데뷔작치곤 박수를 보낼만하다. 홍보의 필요로 그랬겠지만, 주연급으로 소개된 알렉 볼드윈은 사실 카메오라 해도 할 말 없는 정도로 5분 뒤 화면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러면 어떠랴 한 시간 반 동안 프랑스 관광과 음식 구경 푸짐하게 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 사진은 사이트의 것입니다.
1970-01-01 09:00 2017-08-0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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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문학작품을 고를 때는 작가가 누군가를 반드시 확인하면서 영화를 볼 때는 대부분 그저 제목만 보고 선택해 왔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영화를 보아왔으면서도 필자에게 영화는 감독의 메시지나 의도에 어떤 예술적 성취가 들어있는지보다 그저 한 시간 반 정도 즐기는 가벼운 문화적 소비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적어도 무더위가 절정에 오른 지난 주말까지는. 
 
더위에 지친 순간 영화 제의는 반가웠다. 적어도 영화관은 시원한 곳이니. 게다가 모처럼 남편의 제안이니 제목도 묻지 않고 따라나섰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전쟁영화란다. 남편은 감독의 전작들을 언급하면 그의 성취를 열심히  설명했으나 생소한 이야기였고 더욱이 전쟁영화는 필자가 선호하는 장르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랴. 이 더위와 싸우는 전장을 피할 수만 있다면.
 
상영 시간이 임박해서인지 좌석이 첫 줄밖에 없었다. 남편은 원래 아이맥스에서 보아야 하는데 오히려 앞줄이라 좋단다. 우리는 그렇게 그날의 <덩케르크> 현장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포위되어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된 연합군 40만 명을 도버해협 건너 영국으로 철수시키는 실제 있었던 기적 같은 작전을 재현한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스토리다운 스토리가 없다. 영웅적인 주인공도 없다. 곳곳마다 살아남으려는 아우성만 가득하다. 그렇다고 처절한 살육장면도 없다. 독일군에 포위되어 있다는 설정만 있을 뿐 독일군도 보이지 않고 본격적인 접전도 없다. 보통 전쟁영화에 흔히 다루는 익숙한 소재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 영화는 배경만 전쟁영화일 뿐 실제로는 재난영화라고 분류해야 할 지경이다.
 
감독은 영화를 배에 오르는 잔교에서의 일주일, 바다에서의 1일, 하늘에서의 1시간 등 세 가지 시퀀스로 나누어 각기 다른 서술자의 시각으로 교차해가면서 보여준다. 영화 전반부 내내 서로 소통되지 않는 각각의 상황에서 처절한 사투가 이어진다. 잔교에서 하염없이 배를 기다리다 적기의 사격으로 속절없이 죽어가는 병사들. 징발된 작은 배를 몰고 전장으로 가는 이름 없는 어선들. 연료가 떨어져 가는데 적기로부터 아군을 지켜야 하는 조종사. 거대한 전장을 교직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
 
이런 아수라장 속에 감독은 세 개의 작은 이야기를 배치한다. 수많은 병사 중 카메라는 토미(핀 화이트헤드)와 남의 이름을 도용한 깁슨(아뉴린 바나드)의 동선을 따라간다. 그들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행동하지만, 서로 돕는 인간애를 지닌다. 징발된 요트를 몰고 나가는 도슨 부자는 따라나선 소년 조지가 바다에서 구해준 병사의 우발적 폭력으로 죽게 되었지만, 임무를 완수한다. 
 
이 모든 흐름이 하나로 합일되는 시점은 조종사 콜린스가 적기에 격추되어 바다에 추락하고 도슨 부자가 그를 구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각기 자신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그들은 서로 돕고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감독의 시선은 선악을 판정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존엄하게 살아남으려는 평범한 인간들일 뿐이다.
 
이 영화는 전쟁을 정의하려 하지 않고 선악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아마도 감독의 메시지는 마지막 돌아온 병사들을 환영하는 어떤 시각장애인 신사의 입을 통해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 충분해.”라는 말 한마디일 것이다. 우리를 한 시간 반 넘게 이 품격 있는 전쟁터에 몰입시킨 것은 단연코 음악이다. 시계 초침 소리 등 다양한 소리들을 변주하며 줄곧 내장을 울리는 음악이 시간과 더위를 잊게 만든 공신이었다. 
 
이 영화는 단언컨대 감독의 영화다. 마지막 파리어(톰 하디)의 비행기가 연료가 떨어져 무동력으로 하늘을 비행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이 순간 일주일, 하루, 한 시간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의 부조화가 하나로 합일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놀란은 천재다.
 
* 사진은 사이트의 것입니다.
1970-01-01 09:00 2017-07-3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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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 학생들은 매우 오래 사신 분들이다. 평균 연령이 72세 정도이니 그야말로 아주 오래된 학생들이다. 이분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열심히 듣는 과목은 영어다. 왜냐하면, 필자가 그분들께 영어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목표는 입시나 공시가 아니다. 오로지 ‘배우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래서 진도도 없고 시험도 없다.
 
그렇다고 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멋진 세계여행을 설계하고 계신다. 그래서 강의 내용도 여행에 써먹을 만한 표현들을 많이 다룬다. 아마도 수업시간에 보여주는 그분들의 빛나는 눈동자는 그분들이 강의를 듣는 이 순간 상상 여행 중임을 증명한다. 그때 그들의 낡은 피부는 홍조를 띠고 어조는 들뜬다. 마치 고목에 새싹이 돋듯이 교실 분위기가 생기로 가득 찬다.
 
아, 상상! 그렇다. 우리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다람쥐가 열심히 한여름 더위도 잊고 도토리를 주워 모아 보관해둔 굴을 겨울이면 까맣게 잊어버리듯이 상상이라는 풍요한 창고의 존재를 잊고 현실에 찌들어 산다. 그런 상상의 즐거움을 일깨운 공로로 상상 여행을 안내한 가이드에 대한 감사의 팁이 심심치 않게 답지한다. 
 
연희 할머니는 채소 담당이다. 마당에서 키운 고소한 상추를 씻어서 바로 먹을 수 있게 갖다 주신다. 그날은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야 한다. 정순 할머니는 장류 담당이다. 가끔 된장을 플라스틱 통에 담아 가지고 오신다. 손수 담그신 귀한 된장은 그야말로 ‘금된장’이다. 그 맛이 놀랍게 맛있어 식구들이 그 할머니 된장만 기다린다.
 
유난히 조용하고 태가 고운 소원 할머니는 마늘 담당이다. 가끔 마늘을 갈아 한 통씩 가져다주신다. 그러고 보면 모두 식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들이다. 옛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반장 주도하에 학생들이 돌아가며 아침마다 교탁에 놓아주던 커피 우유니 오렌지 주스 따위들에 비하면 얼마나 정감 넘치고 영양가 풍부한가! 역시 연륜은 인간을 이해하게 만든다.
 
청일점 남학생은 명문대 출신이다. 사실 대졸 출신이 들을만한 강의는 아닌데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몸이 불편하면서도 보행기에 의지해 매번 열심히 출석하신다. 가벼운 영어회화나 가르치는 복지관 강의에 그들이 이토록 열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새로운 것을 배우면 치매 예방에 좋기 때문일까? 어쩌면 배움이란 인간 생명의 원동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 자신이 낡아가고 있다는 자각 때문인지 나이 들어갈수록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커진다. 모험이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육중한 메타세쿼이아가 세월이라는 두꺼운 껍질에 싸여 있듯이 다만 오랜 시간 쌓여온 삶의 무게가 도전의 의지를 누르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 학생들의 빛나는 생기를 보면 상상이라는 작은 모험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입증한다.
 
몇 달 전부터 소원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얼마 못 가실 것 같다는 가족의 전언이다. 그러나 할머니께서 마지막 날까지 새로움에 대한 열정과 상상 여행 속에 무척 행복하셨으리라 확신한다. 마늘을 찧을 때마다 소원 할머니가 많이 그리워질 것 같다.
1970-01-01 09:00 2017-07-23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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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역사적 인물을 영화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니 쉽다.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대로 연출하는 것이니 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사실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 그럴 리가 없다 예컨대 ‘성웅’ 이순신을 그리면서 어찌 여성 관계를 이야기한단 말인가! 그러나 <난중일기>에는 그와 여성과의 관계도 소상하다. 그래서 어렵다.
 
이준익의 역사물은 살아 있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살아 있다면 의당 그래야 할 행동들을 한다. 그런 연출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는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눙치며 해낸다. 영화 <박열>은 그런 의미에서 전작 <왕의 남자>, <황산벌>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첫 장면에 “이 영화는 고증에 충실한 실화입니다. 등장인물은 모두 실존인물입니다.”라는 문구는 사실인 동시에 이준익의 익살이다.
 
사실 박열이라는 사람은 이념으로 구축된 현대사의 감옥에 갇혔던 인물이다. 납북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찬란한 작품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정지용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고분을 발굴하니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유물들이 쏟아지듯이 역사에 묻혔던 그를 꺼내보니 미이라가 아니라 용수철같이 튀어 오르는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나쁜 남자’로 돌아왔다.
 
박열(이제훈)은 아나키스트로 일본에서 ‘불령사’를 조직해 활동했던 인물이다. 매우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20대 초반의 젊은 학생들이 반은 애국심으로 반은 치기로 뭉쳐 다니는 그룹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으리라. 그래서 독립투사라는 거룩한 시각으로 보면 불편하겠지만, 그들 간에 치고받고 그룹 간에 다툼도 있는 것이 진실이 자연스럽다. 그러니 ‘고증에 충실’한 것이라는 첫 장면의 진술은 옳다.
 
아나키스트라는 것도 세기말에 태어나 제국주의 간의 전쟁을 겪으며 탄생한 전위적 사조이기는 하나 따지고 보면 젊은 시절의 반항적인 일탈이 본질이다. 불령사라는 이름도 그런 반항의식의 소산이다. 히피가 그렇고 힙합이 그렇듯이 아나키스트도 그 시절의 ‘삐딱이’들인 셈이다. 그런 박열이 같은 과의 여자 삐딱이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를 만나 제국 일본의 한복판에서 대형 사고를 치고 만다.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박열은 진짜 독립운동가가 되어간다. 폭탄 반입을 논의하고 황태자 폭살을 모의하던 도중 일본정부에 의해 조선인 학살의 명분에 걸맞은 ‘불령사’의 박열이 지목된다. 이 지점부터 <동주>와 <박열>은 길이 갈라진다. 박열은 굴복하는 대신 ‘삐딱이’ 정신을 발휘하여 그들과 대결한다.
 
‘대마불사’라는 기훈처럼, 박열과 후미코는 사형판결을 유도하고 ‘쟁취’한 사형판결은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결국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그 과정에서 박열보다 한술 더 뜨는 삐딱이 후미코가 감형에 불복하다가 우쓰노미아 형무소로 이감되자마자 죽고 박열은 해방될 때까지 22년 2개월을 복역한다. 
 
비극적인 역사지만 영화는 내내 유쾌하다. 그것은 내일이 없는 삶에서 오늘을 즐기고 멋을 중시했던 아나키스트들의 낭만적 삶의 태도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준익의 낙관적인 역사관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사실 역사를 관통하는 힘은 비극보다 희극에서 온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해학을 잃지 않는 태도가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고작 20세 남짓에 불과한 젊은 청년들의 대담한 용기를 보며 오늘날 청년들을 생각한다. 이제훈과 최희서가 창조해낸 아름다운 청년들의 이미지가 영화관을 나서는 내내 머리에 맴돈다.
1970-01-01 09:00 2017-07-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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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 날, 팔고 남은 빵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봤어요. 멀쩡한 것을 버리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푸드뱅크에 기부하면 되지 않겠냐고 했더니 법적으로 안 된다고 하네요.” 대형마트 내 제빵 코너에서 일하는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유통기한도 남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식품이 이렇게 버려지는 것을 보고 우리가 과연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도대체 법이 어떻기에 그런단 말인가. 가공식품의 경우 유통기한 최소 3주 전 상품까지만 기부할 수 있고 두부나 콩나물 같은 신선식품은 유통기한 최소 3~4일 이전에 기부할 수 있도록 제한한단다. 수혜자가 유통기한 내에 기부받은 식품을 소비해야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게다가 문제가 생기면 푸드뱅크가 책임을 지도록 한다니 차라리 버리는 게 경제적인 셈이다.
 
물론 이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음식물 쓰레기가 가장 심각한 미국의 경우 음식물의 40%가 버려지며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년에 180조 원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일단 만들어진 음식물에 해당하는 것이고 생산에서 소비까지 과정에서 버려지는 양을 계산해 보면 거의 3분의 1이 버려진다고 한다. 아, 이 무슨 천벌을 받을 낭비 행태란 말인가.
 
<왜 음식물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라는 꽤 긴 제목의 저자 슈테판 크로이츠베르거와 발렌틴 투른은 “전 세계 식품 가운데 3분의 1은 이미 수확과 가공 그리고 유통과정에서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고 지적하며 “이는 식량 생산 시스템의 극단적인 상업화로 가속화하고 있으며 더불어 모든 문제의 상징이 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환경부 자료를 보니 우리나라 국민이 버리는 식품 폐기물로 인해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연간 885만 톤이며 이를 처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력이 연간 88억 KWh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최고 사용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 4개월 동안 전 국민이 사용할 수 있는 양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절반만 줄여도 2개월분의 전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다. 사실 유통기한이라는 것도 이 순간부터 먹으면 죽는다는 뜻이 아니다. 먹을 수 있는 기간은 실제로 훨씬 길다. 다만 생산자가 책임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는 가상의 기한일 따름이다. 다시 말하면 산업 경제적인 숫자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걸 정해 놓는 순간 넘기 어려운 찜찜한 한계선이 되고 만다.
 
상업적인 생산 시스템의 폐해는 이뿐만이 아니다. 시장에 진열되기 위해 과일은 영양보다 당도가 높아야 하고 찌그러짐 없이 보기 좋아야 한다. 가공식품은 빛깔이 좋아야 하니 각종 색소가 범벅된다. 누군가의 한 끼 양식이 될 만한 식품들이 이 과정에서 속절없이 버려진다. 소위 건강한 B급 상품들의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어떤 농산물들은 ‘수급불균형’이라는 이름 아래 폐기된다. 어떤 과일들은 못생겼다는 이유로 땅바닥에 뒹군다. 어떤 식품들은 순서가 뒤로 밀려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쓰레기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 식품이라도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 
 
불현듯 어떤 개그맨이 술에 취해 “일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외치던 개그콘서트 장면이 떠오른다. 인간이 만든 불합리한 시스템에 우리 인간들도 꼼짝없이 갇힌 꼴이다. 그러니 평범하게 보여서는 안 되기에 성형하고 화장에 목맬 수밖에 없다. 화장기 없는 건강한 B급 인간들이 존중받는 세상은 과연 올 것인가?
 
1970-01-01 09:00 2017-07-0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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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면서 노여움을 자주 느낀다. 과거 한창때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도 가슴에 맺히고 자꾸 곱씹게 된다. 글쎄 이런 현상이 나이를 먹으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아니면 늙어갈수록 마음이 옹졸해져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여하튼 이제는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도 듣기 싫고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자기 자랑하는 모습도 꼴불견이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마음을 접으며 하나둘 관계가 소원해지더니 이제는 멀어져간 관계들이 꽤 된다. 옛날에는 왜 그리도 잡다한 모임이 많았던가. 다양한 모임들이 모두 나름대로 필요에 따라 결성되었겠지만, 만나는 이유가 불분명한 모임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그때는 그런 만남을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부치는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점차 심신 양면으로 부대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열정도 체력에서 나오는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 노여움도 비슷한 때에 시작된 듯싶다. 하긴 애초에 긴밀한 인간관계로 맺어진 모임이 아니다 보니 작은 일에도 오해가 쌓이고 쉽게 심사가 뒤틀리는 것인지 모른다.
 
심리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한 사람이 관리 가능한 한도 내에서 맺을 수 있는 인간관계의 수는 약 140명 정도가 한계라고 한다. 물론 평균이 그렇다는 말이다. 만약 영업사원이라면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고 우리 같은 일반인은 절반에 못 미칠 수 있다. 아무튼, 그 정도 인간관계를 관리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별로 친밀하지 않은 관계라면 차라리 고통이다.
 
요즘 인간관계 관리가 어려워진 이유는 시대가 그래서인지 개인 사정들이 워낙 어지럽게 바뀌는 탓이기도 하다. 꿈에도 생각 못 했던 잉꼬부부 친구가 어느 날 불쑥 이혼하고 나타나기도 하고 남편 사업이 어려워진 사연을 모르고 있다가 말실수를 해 서운해 하는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일일이 사연을 점검할 수도 없으니 누구를 탓하랴. 그저 하 수상한 세월을 원망할밖에.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런 현상들이 자연의 섭리일 듯도 하다. 나무가 가을이 되어서도 한여름 무성한 잎을 두르고 서 있다면 짙게 화장한 노인처럼 얼마나 어색하고 꼴불견인가. 가을에는 잎을 흩날리며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 순리이듯 우리도 번잡한 관계의 옷을 벗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어차피 겨울이 오면 모두 떨어질 잎인데 떨어지는 순서가 무슨 상관이랴.
 
자연이 마음을 가다듬고 경건하게 겨울을 맞이하듯 우리도 인간관계의 떨켜가 수분을 잃고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 가을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고 자기 몸을 차가운 바람에 내맡기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고독으로 침잠하는 결단이다. 인간관계의 정리도 상실이 아닌 내적 성숙을 위한 결단이다. 불필요한 가식을 벗고 단단한 열매만 남기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나이 들어 미니멀 라이프 모드로 접어드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현명한 결단이다. 번잡한 물건들을 버리듯 추수를 마친 들판처럼 우리 삶도 간결해져야 한다. 인간관계의 정리는 아픔이 아닌 성숙이고 서로 고독해지는 연습이다. 기품 있는 고독은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자양분이다.
1970-01-01 09:00 2017-07-03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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