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중 산책(醉中 散策)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중에 올해부터 내 습성이나 행태가 바뀐 한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산책’이다. 물론 그 전에도 가끔씩 운동 삼아 걷기를 한 적은 있지만 올 초부터 다양한 형태로 산책을 시도(?)하고 있다. 그중 한 가지가 추운 겨울인 올 2월부터 한 달 넘게 새벽에 일어나 아침 산책을 해 본 것이다. 언젠가 글로 쓴 적도 있지만 평일에는 4-5Km, 주말에는 10Km이상의 ‘아침 새벽 걷기’를 해 보았다. ‘아침산책’은 평일에는 방배동 내 집에서 동작역을 거쳐 동작대교에서 반포대교까지 왕복하는 코스나 구 반포 옆 산책로를 왕복하는 코스를 걸었고 주말에는 동작대교에서 한강대교를 거쳐 여의도까지 왕복하는 코스나 내가 회사까지 출근하는 도로를 보도로 걸어서 왕복 해 보기도 했다. 몇 번 하다가 지루해지면 조금씩 코스를 바꿔 보기도 하면서…….
추운 겨울인지라 새벽에 하는 산책은 운동엔 별 도움이 안 되었지만 추운 새벽의 거리풍경이나 해 돋는 모습을 보며 매우 색다른 감상도 느꼈다. 특히 텅 빈 도로 위를 질주하는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이름 모를 서민들의 움츠린 모습에서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칙칙하기도 하고 빛의 색 감촉이 유별난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도 생각났고 한강변에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춥지만 막 떠오르는 태양에서 따뜻한 온기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열이 많은 나는 상쾌하기까지 하였다.
특히 여의도 코스에서는 긴 88도로 교각 밑의 긴 터널을 걸으면서 영화 ‘괴물’에서 나오는 괴물이 어디선가 불쑥 나오지 않을까하는 걱정 아닌 걱정도 하였고 강변도로 옆 벤치에 앉아 강 건너 아파트의 불빛을 보며 바보 같이 눈물도 흘려 보았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아침 산책이었지만 날마다 뭔가 다른 파도가 내 가슴 속에 들어와 새겨졌고 여러 가지 공상도 하고 추억도 음미해 봤으며 무념의 상태도 맛보았다.
그러나 한 달을 넘긴 시점에서 추운 겨울 몸도 제대로 풀지 않은 상태로 한 아침산책이 운동이 아닌 노동이 되어 오히려 몸이 아프게 되었고 그래서 차츰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고 또한 동작대교에서 반포대교 사이에 두 개의 큰 공사가 시작되어 온통 불도저로 파재끼는 바람에 핑계거리가 생겨 아침산책을 중단하고 말았다. 비교적 다른 한강공원보다 자연적이었던 이 지역이 완전히 인공적으로 바뀌는 몸살을 겪고 있어 얼마나 좋은 환경이 조성될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아쉬움이 있다.
결국 나의 아침산책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수백 장의 사진이 남아있고 그중 극히 일부를 공개한 적도 있다. 그래도 가끔 주말이면 산책을 하였는데 무더운 여름부터 또 하나의 다른 ‘산책’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취중산책’이다.
운동 겸 산책을 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저녁 먹은 다음 부부동반 산책이라든가 좀 늦은 밤에도 혼자 산책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나도 가끔 밤에 한강변에 나간다든가 서래마을을 거쳐 몽마르트 공원에 오르는 적이 있지만 전문적(?)이지는 않았다. 내 친구 한명은 ‘직장인 점심등산’을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한 명은 저녁등산을 매일매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같이 게으르고 바쁜(?) 사람에게는 왠지 맞지 않다고 생각하던 차에 내가 어느 샌가 ‘취중산책’을 하게 되었다.
‘취중산책’이란 식사약속이 있는 저녁에 술을 적당히 먹고 내 집에서 4-6Km 반경에서는 꼭 걸어서 귀가하는 것을 말한다. 즉, 강남역 쪽이나 신사역, 압구정, 논현동 쪽에서 저녁을 먹는 날이면 꼭 걸어서 집으로 귀가한다. 처음 여름에 시작했을 때는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와이셔츠는 물론 양복까지 후줄근하게 젖어 집에 오곤 했는데 가을이 오면서 다소 여유가 생겨 귀가하면서 주변의 경관도 보고 때론 이것저것 사색도 하고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을 생각해 내곤 한다.
같은 길인데도 차를 타고 가면서 보는 차창 밖의 풍경이랑 길거리를 걸으면서 와 닿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특히 행인들이 많은 강남역이나 신사동, 가로수 길, 압구정동에서 느끼는 각박함과 법원 앞, 정보사길, 신 반포 지역, 성모병원 옆길에서 느끼는 한가로움은 서로 다른 세상을 가는 것 같다. 수많은 차량으로 주차장이 된 밤거리를 보며 행인이 드문드문 있는 길을 혼자 걸어가면서 느끼는 (군중속의)고독감, 해방감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또한 적당히 취해 있기 때문에 수많은 행인들 속에서, 황량한 포도 위에서 조금씩 다른 시각과 사고, 감성이 생겨서 때론 담백하게 때론 복잡하게 머리가 정리되는 것을 느끼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얼마 전에는 강남역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교보빌딩을 거쳐 고속도로 밑으로 하여 신반포를 지나 성모병원 옆으로 해서 방배동으로 가는 ‘취중산책’을 한 적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강남역에서 교대역, 법원 길, 정보사 길로 해서 가곤 했는데 코스를 다르게 선택했다. 시간이 10시 30분쯤이었는데 강남역에서 교보빌딩까지는 정말 인파가 많았다. 그 군중 속을 헤치며 걸어가면서 난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을 생각했다. 바쁘고 붐비는 인파 속에서는 바쁜 회사업무 밖에 생각이 안 난다. 좌회전해서 고속도로 밑을 지나면서부터 다소 한가해지고 오가는 행인들이 뜸해질 때쯤 난 같은 집에 살면서도 도통 마주칠 기회가 없는 내 딸 지윤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문자를 보냈더니 답이 왔는데 아직 회사란다. 그래 계속 몇 번 문자가 오가고……. 바쁜 회사생활에 정말 고생이 많은 지윤이와 오랜만에 문자대화를 나누며 걸었더니 재미있어 군대에서 휴가 나온 승원이에게도 하고 와이프에게도 하고 그러면서 집으로 온 적이 있다. 모두 싱거운 대화였지만 이렇게 ‘취중산책’에는 평소 생각하지 못한 재미도 있다.
사실 혼자 걸으면서 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끔 방향을 보기 위해 앞을 바라볼 뿐 대부분은 발밑을 보고 걷는다. 따라서 걸으면서 친하게 되는 것은 유일한 친구인 내 그림자다. 여러 가지 가로등과 조명 때문에 내 그림자는 시시각각 변한다. 어떤 땐 한 네 개가 되고 어떤 땐 하나밖에 없다. 어떤 땐 진하고 어떤 땐 흐릿하다. 어떤 땐 바로 옆에서 오고 어떤 땐 뒤 따라 온다. 어떤 땐 난장이고 어떤 땐 키다리다.
오늘 밤도 회사근처에서 걸어왔는데 논현동 사거리쯤에서 플라타너스 낙엽 하나가 어둠속에서 쑥 내 앞으로 기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치 어둠의 자식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평온을 되찾았는데 그것은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나오는 ‘사랑의 동기(밤)’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였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하여간 ‘낮의 동기(빛)’보다는 어둠이 나같이 나약한 영혼을 가진 자에게는 위안이 된다고 스스로를 자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별 생각을 하지 않고 걸어도 그 내면에는 아주 치열한 감상이, 감정이, 생각이, 느낌이 나 모르게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기는 이유를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기야 3년 전 여름 난생 처음으로 혼자 일주일동안 하안거에 들어간 유명한 선방 열 곳을 돌아본 적이 있는데 그때 느꼈던 고독감은 이러한 취중산책에서는 전혀 리바이벌 될 수 없다.
하루 종일 산림이 우거져 칠흑 같은 밤길을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어두운 산길을 걷고 있노라면 유일한 친구가 길 옆 개울가를 흐르는 물소리요, 가끔씩 불청객에 놀라 숲으로 숨는 다람쥐였다. 그 일주일간의 고행은 너무도 외로워 꼬박꼬박 노트에 적고 사진에, 동영상에 담았건만 그만 꼼꼼히 기록한 노트를 잃어버려 영원히 내 가슴속에만 담아 두고 있지만 요새 하는 ‘취중산책’은 그 만행에 비해 너무도 도시적이고 먼지투성이이고 삭막하다.
그래도 계속 하노라면 언젠가는 무언가 잡히는 그 무엇인가가 있으리라고 소망해 본다. 마치 3년 전 일주일간의 만행중 반나절 기록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일주일치가 마저 채워질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처럼 무엇인가 소득도 있으리라고 기대하면서 취중산책을 계속 하련다.
그리고 3년 전 그때 문득 생각해낸 글 제목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다. ‘길가는 나그네에겐 아무도 길을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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