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겨울바다 /추영탑

 

 

 

씻을수록 검어지는 갯바위에 앉았던 석양은

앞서 가던 나그네처럼 훌쩍 비켜가고,

수만 년 무두질로도 부드러워지지 않는

내성에 흠뻑 빠진 잘 절간된 내장이 잠깐

반짝였을 뿐인데

 

 

 

바다가 자꾸 게워내 파닥거리는 파도 한 손을

갈매기가 물고 아디론가 간다

 

 

 

바다에 왔으나 내어 줄 것 없어 자꾸만

빈주머니를 털어내는데, 허기진 게 한 마리

거품 한 옴큼 꺼내어 밥을 짓다가

적빈(赤貧)이 그리도 부끄러웠던지

넘치는 밥물인 양 다시 들이키는 빈 겨울바다

 

 

 

 

 

 

 

 

 

 

 

1970-01-01 09:00 2018-12-1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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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夢中) 취흥 /추영탑

 

 

 

 

어느 날 낯선 꿈속에서

밥 대신 술, 술 대신 분위기라며

주석궁(酒席宮)이라면 다 좋다는

술 뒤에서 한 꿈속의 술 약속

 

 

 

쓰디쓰다고 얼굴 찡그리며 마셔도 가장 황홀했던

여운으로, 인생을 깨뜨리면 무엇이 될까를

골몰히 모의하던 날도 있었지만

계절의 낯빛이 밝아져 생각 털어 술 만나러

나서고 싶은 이런 날이면

 

 

 

좋은 볕 골라 두툼한 돗자리라도 하나 펴보고

싶어지는데

 

 

 

과거를 들이대는 싱싱한 활착의

시간들이 취흥의 부재를 깨운다

 

 

 

안주 한 점에 술 한 잔의 호기는 잊었지만

술 마시는 일을 눈으로 거드는 일은

또 얼마나 즐거운가

 

 

 

지느러미가 날개였던 어느 어족의 맨살이 파도의 호연지기도

데려다 주는 몽중 취흥

 

 

 

덜 마시고도 더 취할 줄 알라는,

주신이 남긴 주사(酒邪)를 삭제한 잠언

묵언의 경전 한 마디에 퍼뜩 잠이 깬다

 

 
 
 
 
 
 
 
1970-01-01 09:00 2018-12-12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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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디오니소스가 산다 /추영탑

 

 

 

닫지 못하는 목구멍을 문이라 한다

처음 들어가 비음을 익힌 바람이

아직도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다

 

 

 

껍데기의 부피로 희석된 취기

주정의 흔적만으로는 주정할 수 없으므로

빈 가슴만큼만 키우는 침묵

 

 

 

시체가 아니어서 화장을 면한 염습되지

못한 병 하나가

무리에서 쫓겨난 한 마리 원귀로

구석의 정물이 었다가

 

 

 

서서히 비워지던 내장을 버린 막창의 날부터

한 방울의 술냄새로 보골보골 괸다

 

 

 

오장육부가 다 드러났으나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디오니소스의 영혼이 살아 있어

속 찬 병들 사이에 대생이라도 되는 양

살며시 이웃으로 옆이 된다

 

 

 

 

 

 

 

 

 

 

1970-01-01 09:00 2018-12-1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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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에 끌려가다 /추영탑

 

 

 

생각을 놓쳤다

문을 박차고 나간 문은 나를 데려다

어디에 버려두었는지

개미 한 마리도 날리지 못하는 바람에

풍경이 밀려간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허망함을

나는 안다

 

 

 

흩어지는 비말보다 더 가벼운 바람에

방향을 놓친 먼지들이

서열을 다투며 행성을 이루는 거리

 

 

 

별, 별로 가득찬 12월의 거리

 

 

 

지금 나는 어디즘에서 민달팽이 걸음으로

나를 닮은 민달팽이를 찾고 있는지

 

 

 

골똘해져야 생각이 모아지는 인파 속에서

나온 문을 찾아 헤매는

문을 잃어버린 더듬이 두 개

 

 


 

 

 

 

 

 

 

 

1970-01-01 09:00 2018-12-0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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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버린 세상을 주워 보니 /추영탑

 

 

 

 

역사의 수급을 내리치는 칼끝을 피하지

못하였으므로

언질(言質)이 고르지 못한 붓으로 불의를

후려치는 일도 있었으니 ,

 

 

 

죄가 넘치는 저잣거리를 빗겨 가는 바람도 있다

존재의 길이가 한없이 짧아지는 몸부림에

흠뻑 젖는 것은 세상일뿐이어서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쓰다 버린

세상은 아직도 축축하다

 

 

 

고갈은 충일이 남긴 젖을 빨아 먹고

목숨을 부지하는데

아직 발설되지 않은 천기는 다시 구름 속으로

자취가 묻힌다

 

 

 

소낙비 오고 잦은 비는 그쳤으므로

몸 말라 우화를 꿈꾸는 벌레들 싸움에 귀퉁이 떨어진

세상 한 쪽,

언저리가 스멀거린다

 

 
 
 
 
 
 
 
 
 
 
1970-01-01 09:00 2018-12-0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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