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추영탑

 

 

 

하늘 한 복판에 박힌 듯 굴러가는 달을 보네

쏟아지는 천곽의 조각들에 살며시 감싸인

허공이 차디차게 저를 식힐 때

 

 

 

겨우 실꾸리 하나와 빈 항아리 한 개의

길이와 부피의 빛으로

만들어 놓은 그림자 속

몇 겹인가의 허물을 벗어 던지는 어둠의 목격자들

 

 

 

혼자 굴러가는 속이 꽉 찬 염력의 굴렁쇠

칼이 되어 허공을 베고, 강물을 베

몇 겁(劫)을 베이고도 상처 없는 세월

 

 

 

어디쯤 굴러가다 툭 떨어질 것인지

빈 벤치를 오래된 제 방석인양

차지하고 있다가 풀잎들이 일어서 듯

빛의 소란으로 저 세상의 침묵을 깨우네

 

 

 

 

 

 

 

 

 

 

1970-01-01 09:00 2018-12-2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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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팥죽 /추영탑

 

 

 

죽음도 나이도 없는 세상이 있었으면 하고

상상해 보는 때가 사람에게는 꼭 있다

 

 

 

옛 어른들은 어린 나를 앉혀놓고

팥죽을 먹이면서 이걸 먹으면 나이 한 살

미리 먹는다고 하셨다

 

 

 

그날의 기쁨은 이제 슬픈 추억이 되었지만,

안 먹겠다고 못 먹겠다고 물러서지 못해,

오늘이 왔음을 나는 후회한다

 

 

 

오늘은 12. 22. 동짓날,

어머니께서 쑤어주시던 팥죽을 이젠 사다먹는다,

저를 으깨 보내준 눈물 같은 핏물에 나를 적시며

섣달그믐까지는 아직 한 달도 더 남았으니

정말 다행이라 안도도 하는 것인데

 

 

 

팥죽에 전혀 안 어울리는 소주 둬 잔 하고나니

미치게 글이 쓰고 싶어진다

시를 쓴다면 ‘동지팥죽’ 이라고 써야 할 일이다

 

 

 

또 한 해가 동지팥죽을 건너간다

내 기억이 팥죽 앞에 다소곳해질 때, 동지 밖에서

다가오는 춘추로 치장한 나이 한 살

 

 

 

 

 

 

 

 

 

1970-01-01 09:00 2018-12-2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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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을 놓아주다 /추영탑

 

 

 

손바닥으로 한 옴큼의 허공을 쥐어본다

허공의 촉수는 융모라서 얼마나 부드러운지

멀리서 만지는 수평선을

오가는 물길 같아서 감촉 없는 맨살

 

 

 

연애를 잃고 연애시를 쓰다가

 

 

 

 

오늘 헤어질 사람의 옷깃을 놓아주고

내일 만나게 될 누군가를 미리 데려와

옆에 세워, 가장 허술하고 가장 조밀한

섹스를 나누는 나룰 보면

저 넓고 높고 긴 사차원의 세계는 내게

방 하나를 던져 줄 것인데

 

 

 

아무리 난잡해져도 나무랄 얼굴이 없고

한없이 무구해도 칭찬의 말 한 마디 없으면서

지상의 모든 것을 대신 앓았으므로

허공에 한 철의 휴가를 선물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눈길 하나로 맞붙어 있으나

때로는 얼마나 허무한지

그가 죽는다 해도 나는 그를 장송할

노래가 없다

 

 

 

입김을 불어내 듯, 손에 쥐었던 허공을

놓아 주는 것 외엔

 

 

 

 

 

 

 

 

 

 

 

1970-01-01 09:00 2018-12-22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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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같은 볼, 볼 같은 노을 /추영탑

 

 

 

낙엽을 태우다가 저를 태우는 강을 보았네

서쪽 하늘에 타는 불은 왜 강물에 불붙은재를

뿌리는가

 

 

 

태양을 들어올리는 동쪽은 서쪽을 보지 못하고

불붙은 서쪽은 동쪽을 그리워하다가

저 혼자 사그라져 江心만 흔드는 붉은 울음

 

 

 

옷자락처럼 펄럭이던 붉은 만장

어제 떠난 이는

어딘가에 울음의 흔적으로 남아 있을 터인데

 

 

 

그와는 무관하겠으나 , 강물을

뒤적이던 부지깽이에 붙은 불로

한 순간 덩달아 붉어지던 나는

산 너머 살고 있을 너를 찾아가고 싶어진다

 

 

 

서로가 서로를 찾고 싶어질 때에는

더 이상 팽창되지 않고 머무는 그리움

딱 붉은 접시꽃 한 송이 위에 올려진 허공만큼만

부끄럽던 너의 볼은 아직도 타고 있을까

 

 

 

 

 

 

 

 

 

 

1970-01-01 09:00 2018-12-2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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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꽃멍울 앞에서 /추영탑

 

 

 

종려나무 부챗살 사이로 자목련 멍울에

붙들린 허공이 바람에 떤다

삶이란 무릇 준비하는 것

 

 

 

보라색 치마저고리 차곡차곡 개어

작은 보따리 하나에 숨겼는데

저고리만 같다가 치마만 같아서 차려입으면

결국 재두루미 날개 되어

봄나들이하기 딱 좋은, 그러나 아직은 날지 못하는 새

 

 

 

꽃이라 부르는 이 아직 없어

버들강아지처럼 미욱하게 옷 쟁여두고 떨고

있으나

때 되면 불려나와 환히 봄을 밝힐 터

 

 

 

너를 다시 사랑하게 될 거라는

일 년의 미망으로 사나흘 가장 뜨겁게 달굴

우리의 사랑

 

 

 

묵은 약속 손가락에 묻히고 만져보는

젖꼭지 같고 도토리 같고 대추씨 같아서

속내를 가늠할 수 없는 멍울 하나, 불현듯

열어보고 싶으나 지금은 열어서는 안 되는

찬바람 드는 너의 꽃방

 

 

 

 

 

 

 

 

 

 

 

 

1970-01-01 09:00 2018-12-18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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