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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이야기 ▶ 전통 문화의 거리 인사동(仁寺洞) |
| Posted on 2009/10/01 19:32 | |||
전통의 옛 정취와 현대의 신문화(新文化)가 어우러져 있는 인사동에는 텁텁함과 산뜻함을 함께 느끼게 한다.
조선초기 이곳은 행정구역상 한성부의 관인방(寬仁坊)과 인근 대사동(大寺洞)이 서로 물려있던 지역이어서, 이 두 곳의 "인(仁)"과 "사(寺)"가 합쳐 "인사동(仁寺洞)"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큰 절이 있었다는 대사동(大寺洞)에는 조선 11대 중종 때까지 원각사가 있었으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의 정교정책으로 인해 한양 내의 사찰과 승려들은 모두 도성 밖으로 쫓겨나게 되어 원각사는 없어졌고, 지금은 인사동 초입의 탑골공원이 되었다. 이곳 인사동 길은 삼청동에서 시작한 개천이 관훈동과 인사동을 거쳐 광통교로 흐르는 개울 길을 따라 생겨난 길이다. 청계천에서 인사동으로 가다 보면 [철물다리 길]이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는데, 도성 안의 물들이 모두 청계천으로 모이다 보니 청계천뿐만 아니라 종로에도 여러개의 다리들이 있었고, 이중 종로통을 건너는 철물다리가 바로 인사동 길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조선초기부터 지금의 조계사 옆에는 그림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청인 [도화서(圖畵署)]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과거시험(잡과)을 보기 위해 전국의 화공들이 이곳에 모여들었고, 근처 인사동은 물감과 종이, 붓과 벼루 등을 파는 점포들이 줄지어 있었으며, 몰락한 양반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읽던 고서들을 이곳 인사동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그림과 고서, 표구점들이 그대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일제 말부터는 골동품과 도자기 상가가 크게 형성되어 현재의 인사동 상가를 이루고 있다. 인사동은 우리역사의 어두운 단면이 깊게 서려 있기도 한 곳이다.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근대화를 꾀했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당시 인사동 우정총국(지금의 체신기념관 자리)의 개소식장에서 일어났고, 을사조약 체결을 통탄하여 충정공 민영환이 자결한 곳도 이곳이며, 일본의 식민지배에 맞서 33인의 민족대표가 모여 대한독립선언문을 낭독한 3·1운동의 현장 또한 이곳 인사동이었다. 유명한 학자 이율곡이 이곳에서 살다 죽었고,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궐이 가까이 있어 권세있는 양반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며 호의호식하던 곳 또한 인사동이었다. 지금은 면모가 크게 변하여 옛 자취를 찾기가 쉽지 않지만, 그러나 조상의 숨결을 가장 많이 느끼게 하는 곳이 바로 인사동이다. (사진은 한국의 전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문화의 거리, 인사동 길의 모습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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