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볼 때 차(茶) 문화가 정신(精神) 문화에 끼친 영향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차 문화가 융성할 때 정신 문화가 꽃을 피웠고,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그런 면에서 차 문화와 정신 문화는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거듭 확인할 수 있듯이 유사 이래 민족의 정신사(精神史)를 이끌어온 위대한 선현(先賢)들은 모두 차와 더불어 생활했다. 즉, 선현들은 차를 통해 맑고 깨끗한 정신세계를 더욱 고결한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차(茶) 나무는 중국의 남쪽 지방인 운남성(雲南省) 산악지대가 원산지인 상서로운 나무로, 키는  60~90cm 정도지만, 100cm 이상인 것도 있어 다양하다. 차 나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42대 흥덕왕 때(828년), 대신 김대렴(金大廉)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종자를 들여와 지리산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경상남도 하동군과 사천군, 전라남도의 장흥군·영암군·보성군·구례군·순천시 등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다경(茶經–중국 당나라의 육우-陸羽가 엮은 차 전문서, 3권으로 구성된 불휴의 고전이다)에 의하면, 차 나무의 모양은 과로(瓜蘆–과로나무는 중국 광주 지방에서 나는데 그 맛이 몹시 쓰고 떫다)나무와 같고, 잎사귀는 치자(梔子)나무와 같으며, 꽃은 흰 장미와 같고, 열매는 병려(櫚–종려나무)와 같으며, 꼭지(줄기)는 정향(丁香–정향은 고대부터 내려온 대표적인 향료 나무)과 같고, 뿌리는 호도(胡桃–호두)나무 뿌리를 닮았다고 비유한다.
이런 비유의 의미는 차나무는 기본적 성향을 나무(木)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풀(艸)이라 할 수도 없는 미완성(未完成)의 나무인데, 이 미완성은 중용(中庸)의 현상을 일컬을 수 있어 학문을 하는 사람의 성향과 유사하고, 완성체인 나무가 되기 위해 부단히 정진하는 모습이 흡사 학자(學者)의 구도(求道)과정과 닮았다는 뜻이다.
 
차(茶)는 물과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수양(修養) 도구이며 신(神)과 인간의 영성(靈性) 소통하는 매개체라고 선현들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한 잔의 차에는 인간의 마음을 중심으로 우주와 만물의 본질을 느끼게 한다고 말한다.
식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는 차 문화는 각종 음식물의 섭취로 오염된 오장육부를 세척한다는 의미도 있고, 생활에 찌든 인간의 마음을 맑게 씻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한 잔의 차는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정화하여 생각의 싹을 키우는 사유(思惟)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차나무 잎을 따는 순간부터 찻잎을 가공하여 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지극한 정성이 필요한데, 지극한 정성은 곧 예절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차에는 차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덕성과 의식이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지조와 절개, 겸손과 인내의 한국 전통의 선비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한국의 선비들은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하늘을 섬기고, 마음을 닦고, 학문의 발전과 실천을 점검하는 등의 일인삼성(一人三省) 수양공부를 하였다.
 
인류가 차를 즐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는 인류 최초로 차를 마신 사람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신농씨(神農氏)라고 기술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농씨는 야생의 풀을 일일이 씹어서 약초의 성질과 용법을 자세하게 기술하였는데 어느 날 독초를 씹어서 독이 온 몸에 번져 죽음의 직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때 눈앞에 나무도 풀도 아닌 가지 하나가 보였는데, 그 잎을 따서 씹으니 순식간에 해독이 되어서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신농은 그 나무를 차(茶) 나무라고 이름하고 해독을 첫 번째 가는 효능으로 전하게 되었다. 풀(艸)과 나무(木) 사이에 사람(人)이 있는 ‘차(茶)’라는 글자는 바로 그 때 신농씨를 죽음에서 살려낸 것에 기인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조상들은 차를 즐겨 마셨는데, ‘다반사(茶飯事–매일 밥 먹고 차 마신다는 말에서 유래한 예사로운 일)혹은 ‘항다반사(恒茶飯事–일반적이고도 당연한 일)라는 말이 있을 만큼 차를 즐겼던 민족이었고, 다문화(茶文化) 또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삶의 통과의례나 각종 제례 때마다 한 잔의 차를 정성껏 올렸을 만큼 우리나라의 조상들의 숨결에서는 차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 나온다.
 
초의선사(艸衣禪師–조선후기의 대선사이자 한국 다도의 중흥을 이끈 인물)가 쓴 동다송(東茶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는 고래로 장백산(長白山–백두산)에 백산차(白山茶)가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단군(檀君)시조가 백두산에 개국한 이래 한국의 차 역사가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인(新羅人)에게 있어서 차는 군자(君子)의 기질과 덕(德)을 지니고 있어서 맑고 곧은 예지와 함께 관용의 미덕을 기르는 것이라 하였고, 그러므로 맑고 고매한 인격과 학덕과 예(藝) 갖춘 사람을 다인(茶人)이라 칭하는 풍습이 있었다.
 
백제(百濟)의 차문화는 이웃나라인 일본에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백제의 질 좋은 차나무와 맑고 향기로운 물, 그리고 오랜 불교의식을 통한 차 문화는 후세에 초의선사(艸衣禪師)의 동다문화(東茶文化)를 꽃피게 한 뿌리가 되었다.
 
고려의 다인(茶人)들은 차 도구를 화려하게 만들어 사용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려청자의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 찻잔 속에는 선적(禪的– 마음을 한곳에 모아 고요히 생각하는 일)무(無)와 ‘공(空)의 정신이 깃들여져 있다고 믿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불교를 억압하면서 한국의 차가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역시 모든 의식에 차가 쓰여졌다. 왕조실록에만 차에 대한 기록이 1500여 회가 넘는 것을 보면 차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차 문화는 영조(英祖) 때 차 대신 술이나 끓인 물로서 대신하라고 왕명을 내림으로써 관혼상제(冠婚喪祭) 때나 명절 때에 차 대신 술을 올리게 되었다. 그 후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초의선사(艸衣禪師) 다산(茶山) 정약용, 秋史 김정희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차문화 중흥이 계기가 되어 새로운 차 문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들은 선(禪) 시, 서예와 그림 등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나 그 우정의 밑바닥에는 차의 향기가 스며있었다.
 
차는 인간이 즐기는 가장 맑고 깨끗한 것 중의 하나로 천지만물(天地萬物)의 모든 것을 나의 마음과 같이 여겨, 사사로움으로 오염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 잔의 차를 통하여 몸과 마음이 청정(淸淨)하게 하나가 되는 것을 평생의 도(道)로 삼는 것이 다도정신(茶道精神)이라 할 수 있다.
 
다도(茶道)란 한 잔의 차를 마시고 고요하게 앉아 현실의 온갖 잡념을 버린 채 절대적 무아의 지경에 이른다는 좌망(坐忘–조용히 앉아서 모든 걸 잊는다)과, 세속의 온갖 구분과 구별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을 초탈하여 세상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된다는 망형(忘形–형체를 잊는다) 정신으로 귀결된다.
 
                          <조선 후기 화가 심사정(沈師正)이 그링 송하음다(松下飮茶)>


1970-01-01 09:00 2015-10-27 20:19
댓글
3 개

Comments List

  1. 이현경 2015-10-28 19:17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선생님~다도에 따라 차를 마실 때는 조금씩 그 맛을 음미하며 마음을 정화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차의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 이효일 2015-10-29 22:02 # 수정/삭제 퍼머링크

      단풍이 붉게 물든 산에서 언제 내려오셨나요?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2. 오영세 2016-12-30 17:15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차에 관한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댓글 쓰기
조선 법궁인 경복궁(景福宮)으로 들어가다 보면,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을 지나 중문인 흥례문(興禮門)을 들어서게 되고, 곧이어 서(西)에서 동(東)으로 흐르는 금천(禁川)을 만나게 된다.
북악산(北岳山) 정기를 품은 명당수(明堂水)로 알려져 있는 금천의 주변에는, 아름답고 그윽한 향기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여러 그루의 매화(梅花)나무가 방문객을 맞아준다.
이른 봄의 향훈(香薰)을 사람들에게 인상 깊게 전하는 꽃은 단연 매화가 아닐 수 없다.
 
북풍한설(北風寒雪)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운다고 해서 설중매(雪中梅)라고도 불리는 매화는, 어떤 어려움도 이기고 견디며 절개를 지키는 나무로 흔히 비유된다. 매서운 한파(寒波)의 끝에, 심지어 철 늦은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에, 선인(先人)들은 고결한 품격과 꿋꿋한 절개라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매화는 선비들이 추구하는 이상(理想)을 갖춘 꽃이다.
충효(忠孝)와 절개(節介)를 으뜸 덕목으로 치는 선비의 나라 조선의 정신을 가장 잘 상징하는 나무가 바로 매화나무인 것이다. 경복궁에서 처음 맞아주는 매화나무를 통해 국정(國政)을 이끄는 정치인(政治人)들의 정신자세를 일깨우게 한다.
 
조선선비의 매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70년의 생(生)을 마감하면서 다른 말은 없이 “매화분(梅花盆)에 물을 주거라”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조선의 대학자 퇴계는 이처럼 죽는 순간까지도 매화를 가까이 하며 「매화(梅花)의 품격(品格)」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매화를 사랑한 선비는 그만이 아니었다. 이이(李珥), 김정희(金正喜), 성삼문(成三問), 송시열(宋時烈), 정약용(丁若鏞) 등 우리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수많은 유학자들이 한결같이 매화를 사랑했다.
 
중국 남송(南宋)시대 송백인(宋伯仁)이 편찬한 매화희신보(梅花喜神譜)에는 매화그림 백 폭이 수록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백 폭 매화도를 백매도(百梅圖)라 불렀다고 한다.
동방오현(東方五賢–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중 한 사람인 김굉필(金宏弼)의 외손이자 퇴계의 제자인 조선 유학자 정구(鄭逑)는 송백인의 백매도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의 고향 성주에 회연서원(檜淵書院)을 세우고 뜰에 매화를 가득히 심어 백매원(百梅園)을 만들어 스스로 수양에 정진했다. 지금도 회연서원에는 이른 봄 만발한 매화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김홍도(金弘道)는 매화를 무척 사랑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나무를 팔려고 왔지만, 김홍도는 돈이 없어 살 수 없었는데, 마침 어느 대작께서 김홍도에게 그림을 청하였고 그 사례비로 3천냥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그는 2천냥으로 매화나무를 사고 8백냥으로 술을 사서 친구들과 함께 마셨다고 전해진다.

조선 말기의 화가 전기(田琦)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를 보면, 눈이 쌓인 산에 매화가 피어있고 산중의 초옥(草屋)에서 한 선비가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매화와 선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눈 속에 핀 매화와 관련된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조선 개국 초 설중매(雪中梅)라는 명기가 있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건국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직후, 궁중에서 공신(功臣)들의 잔치가 벌어졌는데, 한 공신이 설중매에게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오늘은 동쪽 집에서 먹고(東家食), 내일은 서쪽 집에서 자는(西家宿) 네 신세가 어떠하냐?” 말하자면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하는 기생의 신세를 야유한 것이다. 그랬더니 설중매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예. 어제는 고려 왕조를 섬겼다가 오늘은 이씨 왕조를 섬기는 대감의 신세와 똑같지요.” 무안해진 공신은 얼굴이 붉어지고 더 이상 말을 못했다고 한다.
 
물론 봄을 장식하는 꽃은 매화만 있는 게 아니다.
같은 장미과에 속하는 배꽃(梨花), 복사꽃(桃花), 살구꽃(杏花)도 있다. 그러나 붉은 색의 농담(濃淡)에 따라 꽃의 품격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배꽃만 해도 고려 이조년(李兆年)의 시조에서처럼 “이화에 월백(月白)” 할 정도로 청초한 이미지를 유지하지만, 붉은빛이 우세한 복사꽃에 이르면 ‘도화살(桃花煞–호색과 음란)’이라는 말도 있듯이 색정(色情)을 상징하게 되고, 급기야 짙붉은 살구꽃에 이르면 완전히 낮고 천한 수준으로 떨어져 술집 혹은 술집 여자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꽃 중에서 가장 높은 품격을 지닌 매화(梅花), 그 중에서도 눈 속에 핀다는 설중매(雪中梅)는 난세의 희망(希望) 혹은 선지자 등을 암시하는 정치적 은유로 활용됐다.
가령, 조선 중기의 문인 정시(鄭時)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夜雪來三尺, 江村路不開. 靑驢飢又病, 何處得新梅”
(야설래삼척, 강촌로부개. 청려기우병, 하처득신매)
밤새 눈이 석 자나 내리더니, 강촌의 길이 열리질 않네. 청노새는 배를 주린 데다 병까지 들었으니, 어느 곳에서 갓 피어난 매화를 찾을 것인가!
눈이 석 자나 쌓여 길이 막혔다는 것은 광해군(光海君)의 폭정(暴政)을 이르는 말이고, 갓 핀 매화는 그러한 절망 속에서 희망(希望)을 암시한 말일 것이다.
 
뚜렷한 국가관(國家觀)과 품격(品格), 우국충정(憂國衷情)은 꼭 조선시대의 선비들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정신은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국정(國政)을 이끌어가야 하는 관료와 정치인들에게는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본적 덕목일 것이다.
 
국가지도자는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희망을 주어, 국가의 전도가 양양(揚揚)하다는 것을 보여줄 책무가 있다. 그런 수준의 지도자 반열에 올라서려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면서 국익을 우선시 하고 국민의 복리를 지키려는 확고한 의지와 소양을 지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사리사욕(私利私慾)을 본원적으로 억제하고, 오로지 혼신을 다하여 애국(愛國) 애민(愛民)의 사명감을 무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가슴 깊이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선비가 지향하고자 했던 설중매(雪中梅)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전기(田琦)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1970-01-01 09:00 2015-09-03 15:52
댓글
0 개

Comments List

댓글 쓰기
(가) 한일병합조약 체결의 개요
한일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이 길로 국권을 상실하게 된다.
 
일본 제국은 병합의 방침을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해 놓고 있던 상태였으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제적 명분을 얻기 위해 병합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었다. 이때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어용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의 송병준(宋秉畯)은 한일합방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일진회는 1904년 8월 송병준과 친일 인사들이 조직한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의 대표적인 친일(親日) 단체이며, 일본 군부의 군사기밀비로 운영되었고, 군부에서 파견된 일본인들로 구성된 고문이 배후에서 조종했다. 일본이 병합시기 결정을 망설이자, 일진회는 일본측 시나리오에 따라 한국의 자발적인 의견이라는 미명하에 한일합병 청원서를 일본내각에 제출하여 일본측 명분을 세워준다.
 
한편 이완용은 한일병합조약을 자신과 휘하의 내각에서 주도하여 체결하겠다고 일본 통감에게 매달렸다. 또한 일본 제국은 조약이 누출되어 조약에 반대하는 소요 등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청진·함흥·대구 등에 주둔한 일본군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야밤을 틈타 서울로 이동시켰다.
조약 체결일인 8월 22일에는 지원병력과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 제2사단이 서울 일원에 철통 같은 경비를 서게 했다.
 
조약체결은 경술국적(庚戌國賊)이라고 불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등 8명의 친일파 대신이 조약 체결에 적극 찬성, 협조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나) 창덕궁 흥복헌(興福軒)의 비극
1910년 8월 22일 월요일 오후, 순종(純宗)이 주재하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창덕궁 대조전 경내의 흥복헌에서 열렸다. 당시 순종은 이곳에 감금된 상태였다. 어전회의의 안건은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순종의 전권위임 승인에 관한 안건이다.
 
대조전 영내에 대한 출입금지 조치가 내려진 상태에서 일본측과 사전조율을 끝낸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법무대신 이재곤 등의 각료와 황제의 시종무관 등이 참석한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한 나라의 운명이 끝나는 마지막 어전회의는 약 한 시간 만에 끝났으며, 마침내 순종은 “신들이 모두 가하다 하니 짐도 이의가 없소” 라는 단 한마디로 이완용 총리에게 한일병합협약 체결 전권위임장을 내리셨다.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 윤씨가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지켜보다가 옥새(玉璽)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으나, 결국 옥새는 이완용의 손에 넘어가 전권위임장에 날인이 된다.
 
순종으로부터 전권위임장을 받은 이완용은, 남산 왜성대의 조선통감관저로 데라우치 통감을 찾아가 한일병합조약문에 서명을 하고 치욕의 경술국치가 이루어진다. 일주일 후인 1910년 8월 29일 조약 선포와 함께 조선왕조는 문을 닫는다.
 
한일병합조약의 요점은 1항에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로 되어 있고, 2항에는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前條)에 기재한 양여(讓與)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사진은 한일병합조약을 승인하는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대조전 경내 흥복헌
1970-01-01 09:00 2015-08-30 08:06
댓글
2 개

Comments List

  1. 신춘몽 2015-08-30 10:07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휴~우~ 생각을 하다보면 슬픈것이 아니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나라를 잃었다는 슬품 보다는 나라의 국모를 처참히 죽여서 불 태웠다는 것이 더욱 분노할 일이지요.
    일본은 우리의 왕비를 죽여서 불 태운 것이 아니고 조선을 죽여서 불 태웠던 것이라는 생각에
    부끄럽다는 마음입니다.
    그들을 탓하기 전에 지키지 못했던 우리 모두의 잘못이겠지요,

    1. 이효일 2015-08-30 16:11 # 수정/삭제 퍼머링크

      신춘몽 선생은 올바른 역사관을 지니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역사는 사실을 통해 교훈을 얻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고맙습니다.

댓글 쓰기
조선왕조에서, 임금이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가까운 친인척을 정사(政事)에 등장시켰을 때 어김없이 역모(逆謀)가 발생하여, 왕권이 강화 되기는커녕 오히려 심대한 위기에 몰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할 수 있는데,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인 단종(端宗)을 몰아낸 것 역시 ‘종친(宗親)의 등용(登用) 금지 원칙’을 어기고 친인척을 참여시킨 것이 발단이 된 사례다. 병약한 문종(文宗) 임금은 사간원(司諫院)의 반대를 무릅쓰고 종친들을 규찰하는 종부시(宗簿詩) 제조(提調)에 친동생인 수양대군을 임명했다. 물론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한 자리이긴 했으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수양대군은 병마도통사(兵馬都統使), 병조판서, 영의정 등으로 승승장구하며 권력의 정점에 올라설 수 있었으며, 급기야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던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고종(高宗)의 친부 흥선대원군인데, 그는 아들 대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며느리 명성황후와 끊임없이 권력싸움을 벌이더니, 결국 조선왕조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장본인이 되고 만다. 흥선대원군도 명성황후도 국정에 참여하는 것은 모두 금기사항이었다.
 
조선왕조에서 성공하는 임금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가, 바로 자신의 친인척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임금이 공사(公私)를 명확히 구분하여 공(公)을 우선시하면 친인척들이 발호(跋扈)하지 못하여 정국이 안정되었지만, 사(私)를 앞세우면 친인척들이 발호하여 정국은 시끄러워지면서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는 근래의 대통령도 다르지 않아, 역대 정권마다 대통령의 친인척들이 국정 농단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가 끝내는 형무소로 끌려가는 사례를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임금이나 대통령은 일정 범위의 친인척을 지정하여, 국가차원에서 그들의 활동을 규제(規制)하지 않으면 큰 화(禍)가 뒤따랐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조선임금의 친인척 중에서 특별 관리된 범위는, 친척인 왕친(王親)과 인척인 외척(外戚)으로 나뉘었다. 이들은 임금의 가까운 혈족이었기에 당시 최고의 상류집단을 이루면서 금의옥식(錦衣玉食)을 누렸지만, 그러나 그들은 임금의 가장 믿음직한 후원 세력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경계해야 할 경쟁상대이기도 했다.
 
이들 친인척에 대한 통제 대상은, 궁궐에서 생활하는 세자(世子)를 비롯하여 대비(大妃)와 왕비(王妃), 미혼의 자녀들은 물론이고, 결혼 등으로 궁궐 밖에서 생활하는 임금의 친인척들까지도 어김없이 포함되었는데, 특히 궁궐 밖에서 생활하는 친인척들의 거처(居處)는 특별 사가(私家)로 지정하여 특별한 통제를 받아야 했다. 그들은 한양을 벗어나 지방을 다니면서 왕족 신분을 무기로 사익(私益)을 취하거나, 아니면 은밀히 지방의 불만세력과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으므로 거주지역을 한양(漢陽)으로 엄격히 제한하여 한양을 벗어날 수 없도록 통제했다.
 
임금의 4세손(4대) 이내의 친척은 과거시험 응시가 전혀 불가능하여, 관료직(官僚職)에 진출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제한했고, 임금의 5대손 이하는 왕의 종실(宗室)로서 신분보장을 해주는 대신, 반역죄에 해당되지 않는 한 형사상 면책특권을 부여했으며, 군역(軍役)을 포함하여 각종 공역(公役)도 면제해 주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자신이 원할 경우 규례에 따라 벼슬을 할 수도 있었으나, 이럴 경우 왕족의 자격은 박탈 당해야 했다.                                                       
임금의 사위(부마)는 일체의 관직을 가질 수 없었으며, 의빈부(儀賓府) 작위(爵位–공주 남편은 도위, 옹주 남편은 위)를 받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 했다.
 
다만 임금의 장인(국구)을 포함한 외척들은 특별한 법적 규제에서 벗어나 있어, 정치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조선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던 외척(外戚)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발단이 되었다.
 
조선 스물일곱 임금 중에서 친인척 관리를 가장 잘못한 임금은 14대 임금 선조(宣祖)를 들 수 있다. 방계승통(傍系承統–왕의 적자가 아닌 혈통)으로 왕위에 오른 선조는 8명의 부인에게서 14명의 아들과 11명의 딸 등 많은 자녀를 두었다. 따라서 친인척 관리가 중요한 국사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음에도 그는 아들들 관리에 소홀했고, 공사(公私)를 구분할 줄 모르는 임금이었다. 그는 공적(公的)인 엄격함을 외면한 채, 사적(私的)인 친분관계를 우선시 했는데, 후궁의 소생인 임해군(臨海君), 정원군(定遠君), 순화군(順和君) 등은 임금인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백성들에게 갖은 포악을 저지르는 악명 높은 왕자들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은 임진왜란 때 백성들을 위무(慰撫)하고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기 위해 함경도로 파견되었지만, 왕자 신분을 내세워 백성들에게 수많은 수탈과 행패를 저질렀고 이에 분개한 국경인(鞠景仁) 등 현지 백성들이 그들을 붙잡아 왜군에게 넘겨줄 정도로 간악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교섭 끝에 왜군으로부터 석방될 수 있었지만, 과오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을 감금했던 왜군들과 내통하여 이익까지 취하는 망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를 알게 된 사헌부에서 이들을 처벌토록 강력히 주청했으나, 선조는 이를 묵살하고 옹호하기에만 급급했다.
이후 악명 높았던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광해군(光海君)을 내쫓고 임금에 오르는 등, 악행(惡行)이 정의(正義)를 뒤엎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에서 친인척 관리를 가장 잘한 임금은 3대 임금 태종(太宗) 이방원이었다.
그는 즉위 후 냉혹하게 칼을 휘둘렀는데 그 대상은 대부분 친인척과 측근들에게 집중되었고, 그로 인해 태종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군주라는 이미지가 따라 다녔다.
 
태종은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이거이(李居易)와 그의 아들 이저(李佇), 이백강(李伯剛)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고 충청도 진천으로 귀양을 보내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다. 이거이는 이방원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이른바 ‘혁명 동지’ 중 한 사람이었고, 이거이의 아들 이저는 태조 이성계의 장녀 경신(慶愼)공주와 혼인한 부마였으며, 이백강은 태종 자신의 장녀 정순(貞順)공주와 혼인한 부마였으니 왕실과 겹사돈이기도 했다.
 
태종은 재위 10년에 제주도로 유배 보냈던 처남 민무구(閔無咎)와 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사사(賜死)시켰는데, 이는 이거이, 이저 부자 사건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왕비 원경왕후 민씨의 친동생들이자 왕자의 난 때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운 혁명 동지들이었기 때문이다. 5년 후인 태종 15년에는 남은 두 처남 민무휼과 민무회 형제가 또 대상에 올랐다. 공적(公的) 문제를 사적(私的) 통로로 끌어들였다는 죄목이었다. 공적 문제가 사적 통로에 의해 처리되면 힘없는 백성들은 설 곳이 없게 된다는 것이 태종의 주장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민무휼과 민무회 두 형제까지 사형당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태종은 국가가 반석 위에 서기 위해서는 법(法) 위의 인물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법치를 이룩하기 위해 공신이나 국왕의 친인척 같은 특권 집단을 법 아래에 존재토록 만들었다. 그러니 모든 벼슬아치들이 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 시행된 가장 중요한 규제 중 하나는, 임금의 친인척은 정치적 언동을 할 수 없도록 철저히 금지시킨 것이다. 그것은 임금에 오르기 전 세자에게도 적용되었다. 만일 임금의 친인척이 정치 개입 혹은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경우, 즉시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도록 법제화한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 뽑는 오늘날에 대통령의 측근을 둘러싼 속설들이 시중에 퍼져있고, 대통령의 가까운 친인척이 역사의식을 망각한 친일(親日) 발언으로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는데, 조선시대 같았으면 당연히 탄핵의 대상이 되었을 사안들이다.
 
오늘날의 정치 지도자들도 사심(私心–修身)을 버리고 자신의 주변에 있는 친인척들을 철저히 관리(管理–齊家)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 후 정치지도자의 길에 올라 국민들로부터 진정으로 추앙 받는 지도자가 되기를 염원해 본다.

1970-01-01 09:00 2015-08-26 17:23
댓글
2 개

Comments List

  1. 2015-08-27 11:25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지도자는 가족이나 친, 인척 보다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오랜만에 안부 전합니다.
    건강하세요.

    1. 이효일 2015-08-27 20:42 # 수정/삭제 퍼머링크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왕성한 시작활동에 감동하고 있습니다. 긴 졸문을 읽으셨군요. 감사합니다.

댓글 쓰기
조선 왕조의 모든 궁궐은 그 경관 구성에 있어서 지당수경(池塘水景연못과 물길의 경관)과 수목배식(樹木培植꽃과 나무의 식수와 재배)에 특별히 중점을 두었는데, 뒤편에 커다란 정원을 두었고, 궁궐 곳곳에 아름답고 유용한 꽃과 나무들을 심어 임금으로 하여금 맑은 정신으로 공명정대한 국정을 펼치도록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를 위해 공조판서(工曹判書) 산하에 장원서(掌苑署-현재의 안국동 정독도서관 자리, 당시에는 큰 규모의 온실이 함께 있었다)라는 관청을 두고 궁궐 내 작은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목을 세심하고 치밀하게 관리하였다.
 
경복궁을 들어가다가 만나는 금천(禁川)에는 열매를 매단 살구나무가 여러 그루 보인다. 사실 경복궁 안에는 여러 그루의 살구나무가 심어져 있다. 유실수가 있는 정원은 뭔가 경관을 실하게 높여주기 때문에 꽃과 열매가 눈에 띄는 살구나무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교태전(交泰殿) 뒤편 계단식 정원인 아미산(峨眉山) 정원은 신선이 사는 자연의 세계를 상징한다. 그곳에는 현재 범부채가 한창이다. 범부채는 여름에 꽃을 보기 위해 심어 기르는 대표적인 화단식물로, 꽃잎에 호랑이 무늬가 있고 잎이 부채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말이 호랑이 무늬지 실제로는 표범 무늬에 가깝다. 아침에 피었다가 그날 저녁이면 바로 시들어버리지만 계속해서 새로운 꽃송이들이 피어나기 때문에 개화기가 긴 것처럼 느껴진다. 꽃이 오래도록 피어 있기에 화단식물로 적합한 식물이 바로 범부채라 할 수 있다.
 
교태전에서 나와 후원 쪽 향원지(香遠池)로 향하다 보면 분홍색 수술에서 향기를 풍기는 자귀나무를 만나게 된다. 비교적 흔한 나무이긴 하지만 관상용으로 많이 심어지는 나무다.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수분이 소실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잎이 겹쳐지는 수면운동을 하는 나무다. 밤에 잎이 겹쳐지는 그 모습을 금슬 좋은 부부에 빗대어 유정수(有情樹) 혹은 합환수(合歡樹)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임금과 왕비의 금슬을 기원하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귀나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잘못 알려진 정보가 많이 떠돈다. 잠자는 모습이 귀신 같다는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지만, 모두가 틀린 유래담이다. 진짜는 좌귀목(佐歸木)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잎의 수면운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 별칭 중 하나인 좌귀목이 ‘좌귀나무’가 되었다가 지금의 자귀나무로 변한 것이다.
 
자귀나무는 대개의 콩과 식물이 그렇듯 기다란 꼬투리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가 겨울까지도 떨어지지 않고 달려 있어서 바람이 불면 서로 부딪혀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그것이 여자들의 수다스러운 혀처럼 시끄럽다 하여 자귀나무를 여설목(女舌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귀나무는 수꽃과 양성화(兩性花)가 함께 달려있다. 양성화란 양쪽의 성을 같이 달고 있는 것을 말한다. 자귀나무의 꽃차례를 잘 살펴보면 여러 다발의 꽃이 뭉쳐 달린 것을 볼 수 있는데, 대개 주변부에 수술만으로 된 수꽃들이 여럿 달리고, 그 가운데쯤에 수술과 암술이 함께 있는 양성화가 달린다. 열매는 이 양성화에서만 맺는다. 양성화는 수꽃보다 꽃받침이 길고 수술이 옆으로 퍼지는 점도 다르다. 그렇게 꽃의 성별을 구별해보는 일도 꽃을 들여다보는 재미 중 하나일 것이다.
 
경복궁 후원의 향원지에는 수련(睡蓮)이 새하얀 꽃잎을 피우고 있다. 흔히들 연꽃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연꽃과는 확연히 다른 꽃이다. 연꽃은 잎도 꽃도 물 밖으로 길게 나와 피지만 수련은 잎도 꽃도 물 위에 동동 떠서 핀다. 크기도 연꽃에 비해 수련이 훨씬 작다.
 
수련의 이름에 대해서도 오해가 있다. 수련이 물 위에서 피니까 ‘물 수(水)’자를 써서 수련이라고 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그게 아니라 밤이면 꽃잎이 오므라드는 것이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잠잘 수(睡)’자를 써서 수련(睡蓮)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수련뿐 아니라 대개의 수생식물들은 밤이 되면 꽃잎을 오므린다. 햇볕이 드는 때에만 꽃잎을 펼쳐 보이다 보니 해바라기처럼 철저하게 해를 좇는 꽃으로 보이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꽃가루를 취하는 곤충의 활동 시간에 맞춰 움직일 뿐이다. 아무래도 햇볕이 잘 드는 때에 곤충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므로 그때에 맞춰 꽃잎을 열고 저녁이 되면 닫는다. 아침 7시쯤이면 잠에서 깨어 서서히 꽃잎을 연다.
 
경회루(慶會樓) 옆에는 능수버들이 연못을 에워싸고 있다. 버드나무가 축축 늘어진 가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능수버들이거나 수양버들이다. 봄에 새 가지가 나올 때 어린 가지의 빛깔이 황록색인 것을 능수버들, 적갈색인 것을 수양버들이라고 하지만 거의 구분이 어렵다. 따라서 가지가 늘어진 버드나무는 대부분 능수버들로 보면 된다. 같은 수종의 용버들은 가지와 잎이 용이 승천하는 것처럼 구불구불하게 자라기 때문에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양버들은 보기가 쉽지 않다. 고향이 중국 나무로 특히 양자강 하류에 많이 나는데 수나라의 황제 양제는 양자강에 대 운하를 만들면서 백성들에게 상을 주며 이 나무를 많이 심도록 했고, 그래서 이름도 수양버들이 되었다. 이 수양버들은 그 아름다운 풍치로 중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세계의 가로수로 퍼져 나가 있다.
 
우리나라 거리에 특히 많은 것은 바로 능수버들이다. 늘어진 가지가 멋스럽고 특히 물가와 잘 어울려 가로수나 풍치수로 많이 심어 왔다. 경회루 주변에 심어져 있는 것은 수양버들이 아니고 능수버들이다. 조선의 궁궐에는 많은 능수버들이 심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활쏘기의 표적나무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늘어진 능수버들 잎을 표적으로 삼아 활 쏘기 대회를 열어 최고의 명궁을 뽑기도 하였다.

1970-01-01 09:00 2015-08-15 16:02
댓글
3 개

Comments List

  1. 신춘몽 2015-08-16 09:34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일조선생님 편안하시지요. 이제는 제법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는군요. 경복궁을 여러번 갔었지만 저는 겉만 보고 왔을뿐인데 일조선생님 께서는 구석구석 나뭇잎향기까지 풀어 알려 주시네요, ㅎㅎ
    이제 가을 국화가 흐드러지게 무리지어 피어 있을 고궁의 뜰을 선생님 따라서 거닐 날이 가까워 지나요?

    1. 이효일 2015-08-16 09:58 # 수정/삭제 퍼머링크

      신춘몽 선생, 반갑습니다. 역시 궁궐 수목은 가을이 제 철이지요. 궁궐을 품어주는 가을나무와 꽃을 만날 날도 멀지 않았군요.

  2. 장현덕 2015-08-20 14:45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경복궁의 겉모습이 하드웨어라면, 경복궁의 나무와 풀도 그냥 심어진 것이 아니라 철학에 기초해서 심어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복궁의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자귀나무, 수련 등에 관해서 잘못된 상식을 지적해 주셨네요. 많은 지식을 쌓게 됐습니다.

댓글 쓰기
조선왕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조선의 사법기능(司法技能)은 의금부(義禁府), 형조(刑曹),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포도청(捕盜廳) 등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이런 사법기관을 현재의 기관과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유사성을 따져보면, 의금부는 지금의 국가정보원(國家情報院)과 그 기능이 비슷했고, 형조는 법무부(法務部)와 비슷했으며, 사간원은 대통령 자문기구와 언론기관(言論機關)을 합친 것과 유사했고, 사헌부는 검찰(檢察)과 감사원(監査院)을 합쳐놓은 것과 비슷했으며, 포도청은 지금의 경찰청(警察廳)과 같았다. 그 중 핵심적인 사법기관은 의금부와 사헌부였다.
 
두 기관에 대한 경국대전의 규정을 보면 의금부는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推鞫)하는 일을 맡는다」고 되어 있고, 사헌부는 「시정(時政)을 논하여 바르게 이끌고, 모든 관원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을 풀어주며, 협잡(挾雜–남을 속이는 짓)을 단속하는 일을 맡는다」고 돼 있다. 이는 의금부가 국왕에 더 가까운 기관이고 사헌부는 백성에 더 가까운 기관임을 짐작하게 한다.
 
사헌부의 구체적 직무범위는 중앙과 지방의 행정을 감찰하고, 관리를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사건을 심리하여 탄핵을 주관하며, 종친(宗親)과 문무백관을 규탄함은 물론 국왕에 대해서도 언제나 직간(直諫)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았다. 즉 시정(時政)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밝히고, 관리들의 비행과 불법행위를 따져 살피는 동시에, 어지러운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들이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이를 풀어 주며, 지위를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것을 막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힘이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특히 관리들의 비행에 대한 탄핵검찰권(彈劾檢察權)과 일반 범죄에 대한 수사권(搜査權), 나라가 행하는 인사(人事)와 법률개정(法律改正)에 대해 동의 여부를 서명으로 밝히는 서경권(署經權)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직급(職級)의 수위는 의금부 판사(判事)가 종1품이고, 형조판서(刑曹判書)가 정2품인데 비해,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大司憲)의 품계는 종2품에 불과하여, 의금부 판사나 형조판서보다 1∼2등급 낮은 품계로 책정되어 있었고, 특히 정1품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종1품인 좌찬성, 우찬성을 포함해 1품 관리만 다섯 명이 포진한 의정부(議政府)에 비하면 직급이 크게 낮은 직급이었다. 그러나 품계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사헌부의 영향력은 훨씬 막강했는데, 사헌부 관원이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모든 관료가 떨며 두려워했고, 품계가 한참 높은 1품 대신들도 길에서 사헌부 관리들을 맞닥뜨리면 황급히 피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당했다. 이는 사헌부의 업무상 특성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소속 관원들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심지어 임금과도 싸워가면서 자기 할 일을 다했기 때문이다.
 
사헌부의 이런 권위는 국가에서 부여한 권한과 함께 사헌부 관료들의 철저한 자기 관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정 회의 때 사헌부 관료들은 다른 관료들보다 먼저 들어갔다가 회의가 끝나면 다른 관료들이 모두 나간 후에 따로 나가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다른 관료들과 뒤섞여서 회의에 들어오고 나가는 동안 청탁을 받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사헌부 관료는 사복(私服)을 입고 거리에 나설 수 없었고, 친구의 장례식 참석도 꺼릴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사헌부의 내부 기강은 더욱 엄격했다. 만약 사헌부 고위 관료가 비리에 연루되면 사헌부 내에서 즉각 징벌하여 탄핵했다. 자기 기관의 수장도 거침없이 탄핵하는 사헌부가 다른 기관장의 비리에 대해서 어떻게 대했을 것인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사헌부 감찰(監察)은 정6품에 불과하지만 “감찰이 왔다는 소리만 들려도 사람들이 다 몸을 움츠리고 무서워했다”고 전할 정도로 불법에는 추상같았다.
 
추상 같은 권력의 뒤에는 항상 청렴과 가난이 뒤따랐고, 사헌부 관료들은 모두 가난했다.
치죄(治罪)로 징벌(懲罰)을 가해야 하는 사헌부 관리가 부귀(富貴)를 함께 누린다면 그것은 뇌물을 받아 치부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사헌부 감찰은 “한결같이 남루한 옷차림에, 짧은 사모를 쓰고 해진 띠를 착용했으며 비록 귀족이나 명사(名士)일지라도 사헌부의 이런 관례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부유한 집안 출신도 사헌부 관료가 되면 가난한 벼슬 생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이 유지되었다는 뜻이다.
 
이뿐만 아니라 본인에게 털끝만 한 하자라도 발생할 경우 스스로 물러나야 하는 것이 어길 수 없는 철칙이었고, 친족이 유관 부처에 배치되면 둘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사직해야 하는 것 또한 엄격한 규율이었다.
 
그러나 수사권(搜査權)은 사헌부만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사헌부 외에도 형조, 의금부, 포도청에도 수사권이 있었다. 수사권을 여러 기관으로 나눈 것은 지금의 검찰이 종종 보여주고 있듯이 ‘봐주기 식 수사’ 같은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사헌부에서 이런저런 사유로 ‘봐주기 식 수사’를 하는 정황이 발견되면 곧바로 사간원에서 탄핵했고, 곧이어 의금부나 형조가 재수사에 나서야 했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이조판서가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대간(臺諫–사헌부와 사간원)의 인사권을 장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헌부 대사헌과 사간원 대사간의 인사권만은 이조판서나 이조참판이 아니라 국장 격인 정5품 이조전랑(吏曹銓郞)에게 주었고, 또한 정승이나 이조판서가 이조전랑 자리를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조전랑이 다른 자리로 옮길 때는 자신의 후임 이조전랑을 스스로 천거토록 했다. 이때 가장 유력한 천거 기준은 선비들의 여론이었는데, 만약 잘못된 인물을 천거했을 경우 선비로서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물론 선비사회에서 완전히 매장되는 가혹한 천형을 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이 숱한 문제점에도 500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권력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또한 권력기관을 서로 견제시켰던 지혜로운 국가제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하고 외로운 사법 권력자의 존재가 오늘날의 법치를 무겁고 처절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부귀를 쫓는 사법기능이 과연 정의로움을 실현시킬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검찰(檢察)이 수사권(搜査權)과 기소권(起訴權)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만들어진 잘못된 제도이며, 그것은 조선시대의 지혜로운 수사권 분산 제도와 크게 어그러지는 것이다. 검찰이 서민들에게는 엄격한 반면 권력과 재력 앞에서는 양같이 순했던 것이 통상적인 검찰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뿌리 깊은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고, ‘무전유죄(無錢有罪) 유전무죄(有錢無罪)’라는 웃지 못할 말들이 양산되고 있는 게 오늘의 실정이다.

1970-01-01 09:00 2015-08-12 13:28
댓글
1 개

Comments List

  1. 장현덕 2015-08-20 14:54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사헌부 하면 오래 전에 나온 영화 정동대감 조광조이 생각납니다. 대사헌은 종2품인데 그 영화에서는 조광조를 대감이라고 물렀는데 왜 그랬을까하는 의문을 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일조선생님의 역사를 보는 눈은 교과서에서 배울만한 내용이 아닌 심층적 혜안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댓글 쓰기
1905년 11월 덕수궁 중명전에서 강제적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으로 이미 조선은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상태였고, 이를 세계 만방에 알려 국권을 되찾으려는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을사조약이 허위임을 호소하려 하였으나 실패한다.
 
조선 왕비의 거처인 창덕궁 대조전은 동쪽에 흥복헌, 서쪽에 융경헌이라는 익각(날개 누각)을 달고 있으며 함광문ㆍ청향각과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조전의 부속 건물인 흥복헌은 원래 왕비를 보좌하기 위해 상궁들이 머무는 장소였으나, 주권을 잃은 힘없는 순종이 머물면서 탄식하는 공간으로 용도가 바뀌고 만다.

이렇게 작은 부속건물인 흥복헌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치욕의 “경술국치”에 굴복되어 조선왕조 519년의 대단원을 마감하는 비운의 공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일체의 출입이 통제된 채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에서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다. 비운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주재하는 어전회의에는 내각의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법무대신 이제곤 등의 각료와 시종무관 등이 참석하여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 사전에 조율된 어전회의의 토의 안건은 “한일합병조약안”의 최종 승인과 이를 실행토록 내각에 위임하는 회의였다.

한일합병조약의 내용은
①한국 황제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에게 넘긴다.
②일본 황제는 이를 수락하고 한국을 일본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 한다는 내용이다.

한 나라의 운명이 끝나는 마지막 어전회의는 약 한 시간 만에 끝났으며 마침내 순종황제는 이완용 총리대신에게 한일병합협약 체결 전권위임장을 내린다.

이러한 마지막 어전회의를 흥복헌 입구 병풍 뒤에서 숨 죽이고 지켜보던 순종의 왕비 순정효황후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넘겨주어야 할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주지 않으려 안간임을 쓰다가 이를 빼앗기고 통곡을 하는 상황에서 어전회의는 끝난다.

순종의 옥새와 전권위임장을 받아 들고 흥복헌을 나온 이완용은 창덕궁 돈화문을 나와 일본통감 만이 건너 다닐 수 있다는 청계천 관수교(일제의 조선통감부에서 통감 전용다리로 가설하였음)를 건너 남산 예장동에 위치한 조선통감 관저로 달려간다.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제의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한일합병조약”에 서명 날인하여 체결이 이루어지고, 이로부터 1주일 후인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공식 선포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복속되어 조선왕조 519년이 종말을 고하게 된다.

대한제국의 비운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1926년 4월, 이곳 망국의 공간인 흥복전에서 세상을 하직한다.

한 나라의 역사는 흥망성쇠의 순환이라 하지만, 100년 전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한민족의 정통성이 정지되었던 사실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까지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비해 국력이나 국격이 다소 뒤지지만 그 격차는 현격하게 좁혀지고 있고, 아주 가까운 미래에 그 격차는 뒤바뀌어 국가의 흥망성쇠가 전도될 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한다.

그들이 샴페인을 터트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더욱 허리띠를 졸라 메어야 할 것이다. 치욕을 영예로 전환하는 자랑스런 조국을 이룩하기 위해.
<창덕궁 흥복헌 모습>


1970-01-01 09:00 2015-05-11 13:59
댓글
0 개

Comments List

댓글 쓰기
국가의 수도(首都)를 정하기 위해서는 풍수지리(風水地理)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에 따라 주도(主都)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주산(主山)과 진산(鎭山)을 어디로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는데, 조선건국 직후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적극적인 동조를 얻어 몇몇 정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하는 한양의 위치와 범위 그리고 방향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
한양은 북쪽의 백악산을 주산, 북한산을 진산으로 하여, 남쪽의 목멱산(남산)을 안산, 관악산을
조산으로 하고, 동쪽의 타락산(낙산)을 내청룡, 용마산을 외청룡으로 하며, 서쪽의 인왕산을 내백호, 덕양산을 외백호로 하는 4개의 내사산과 4개의 외사산 등 8개의 산이 에워싸고 있는 명당의 중심 영역인 혈(穴
)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다만 동쪽의 좌청룡 역할을 하는 낙산(洛山)의 산세가 지극히 낮고 허약하여 동쪽에서 몰려오는 나쁜 기운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없다는 것이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상의 취약점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임금이 거처하며 국가를 통치해야 할 궁궐의 위치를 정하는 데에는 많은 진통을 겪어야 했는데, 특히 풍수지리의 해석에 있어 자웅(雌雄)을 겨루기 어려울 정도로 최고의 경지에 올라있는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주장이 서로 엇갈려 더욱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조선의 국가 통치체계를 설계한 정도전(鄭道傳)은 백악산을 배경으로 궁궐을 세우는 대신 한양의 동문(東門)인 흥인문의 명칭을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하고 강력한 옹성을 덧붙여 낙산의 허약한 산세를 보강하자는 주장이었고, 반면 이성계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인왕산을 배경으로 궁궐을 지어 백악산의 동쪽 줄기가 낙산의 산세를 보강해 줌으로써 동쪽의 방위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양보 없는 극렬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두 사람 다 주군(主君)인 이성계의 신변에 상서롭지 못한 나쁜 기운이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충성심의 경쟁 탓이었다.
 
조선개국 초기 풍수전문가들은 한양의 주산인 백악산(白岳山)을 풍수지리상 한반도 동서남북 모든 산의 정기(精氣-생명의 원천)가 하나로 모이는 영산(靈山)으로 평가하였다. 백악산으로 모인 한반도의 모든 정기는 경복궁으로 전달되고, 그것은 다시 임금의 생명과 권위를 상징하는 근정전(勤政殿)으로 집결되어 비로소 한반도의 온 백성이 임금을 중심으로 하나로 우뚝 설 수 있는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고 믿었다. 아마도 왕조시대인 당시의 시류에 맞추어 왕권을 정당화 시키기 위한 의도적 해석이었을지도 모른다.

백악산(白岳山)의 백(白)은 백의민족(白衣民族)인 한민족의 상징 색(色)으로 여겨져, 고귀하고 신성하며 순결함을 의미하였고, 흰색은 본능을 억제하고 감각과 감정을 절제하는 조선시대의 선비정신과도 부합하여 민족의 색으로 선호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흰색은 빛을 의미하며 빛은 하늘(신-神)을 상징한다고 믿어, 하늘 산(山)인 백악산은 임금은 물론 한반도의 모든 백성들을 지켜주는 하늘의 수호신(守護神) 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소실된 지 273년만인 고종 때 우여곡절 끝에 경복궁이 복원되었으나 왕궁으로서 제대로 활용되지도 못한 채, 일본 무력의 압박 속에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을 겪다가 40여 년 후인 1910년 8월 29일 조선왕조는 국운이 다하여 일본에 강제 합방되었고, 이후 경복궁은 일제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말았다.
 
                     (사진) 한양의 풍수지리−한양은 외사산과 내사산 등 8개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그 외곽에 또 다른 8개의 산이 에워싸고 있어 철옹성 같은 방위선을 이루고 있다.



 
1970-01-01 09:00 2015-04-08 10:49
댓글
0 개

Comments List

댓글 쓰기
태조 이성계는 17세 때 함경도 안변에 사는 2살 아래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39년의 세월을 부부로 살면서 6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어린 시절 함흥의 산악지대에서 무술을 연마하며 성장한 이성계는 활 솜씨가 뛰어나 신궁(神弓)으로 평판이 높았다.

 25세 때 아버지 이자춘이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지위를 승계하였고, 2년 후에는 고려의 국경지대를 경계하는 동북면 병마사에 올랐으며, 이후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승승장구하며 고려의 신흥무장으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곧이어 중앙정계인 개성으로 진출하게 된다.

 어느 날, 이성계는 사냥을 하려고 말을 타고 황해도 곡산의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갈증을 느껴 우물을 찾아 말에서 내리게 되었다.
마침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 젊은 여인이 있어 물을 달라고 청했는데, 그녀는 물을 한 바가지 떠서 그 위에 버들잎을 띄워 남자 에게 내밀었다.
사내가 뭐 하는 짓이냐고 의아해 하자 여인은 웃으며 “물을 급하게 마시면 체할 수도 있으니 천천히 마시라는 뜻”이라고 설명 해주었다. 사내는 여인의 섬세한 배려 에 탄복했고 그녀의 모습을 마음속 깊이 새겼다.

 얼마 후 이성계의 청혼으로 그들은 결혼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16세의 처녀였고, 이성계는 그녀보다 21살이나 많은 37살이었다.
그녀가 바로 신덕왕후 강씨였다. 강씨는 고려 말 격동기 때는 이성계의 정치적 자문역을 맡았고, 조선을 건국한 후 현비에 봉해진 뒤에는 내조에 힘써 태조가 새벽 일찍 옷을 입을 때 시간을 재가며 늦지 않게 살피고, 정사에 바빠 늦게 식사를 할 때면 음식이 식지 않도록 품고 있다가 따뜻한 식사를 대접하고, 정사를 보러 나가면 궁인들을 거느리고 배웅하고 해가 저물면 등불을 들고 기다리는 등 온몸으로 내조에 열중하였다.

 이성계는 함흥에 있는 첫째 부인 한씨에게서는 전혀 받아보지 못했던 지극하고 따뜻한 정성에 깊이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강씨는 친정집안의 탄탄한 인맥을 배경으로 이성계가 고려 귀족사회로 진입하는 통로를 마련했고, 그녀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 덕에 이성계는 단번에 고려 귀족사회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전실부인 한씨가 낳은 아들들을 개성으로 불러들여 성균관에서 공부시켰으며 장성하면 개성의 명문귀족들의 여식과 결혼을 시켜 사돈을 맺었다. 또 자신의 첫째 아들 방번을 공양왕의 사위로 만들 정도로 그녀의 활동능력은 탁월했다. 그녀는 이성계라는 한 남자의 삶에 있어서나 조선 건국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존재였다.

 이성계는 신덕왕후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신덕왕후가 보여준 정성 어린 내조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번째 부인인 한씨에게 태어난 장성한 여섯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씨의 소생인 어린 방석을 세자로 삼은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이러한 신덕왕후에 대한 이성계의 지극한 사랑이, 지금까지 자신이 세운 금자탑을 송두리 채 무너트려 파탄을 몰고 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핏줄이 조선의 왕통을 이어나가길 원했다.
태조와 대신들이 세자를 정할 당시 이미 장성한 한씨의 아들 중에서 세자를 정해야 한다는 신료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강씨가 문밖에서 대성통곡을 하자, 이성계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이때 방석의 나이는 11세였고, 방원은 혈기왕성한 26세의 중후한 청년이었다.

 태조가 위화도 회군을 했을 당시 죽음의 위험에 빠진 신덕왕후와 그 아들, 딸을 보호하여 생명을 구한 사람은 이방원이었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을 위해 냉담해진 신덕왕후는 자신을 끔찍하게 따르던 방원을 가차없이 버렸다.
게다가 방원의 정치적 생명을 끊기 위해 그를 개국공신 명단에서 누락시켰고, 방원이 휘하에 거느리고 있던 사병(
私兵)을 몰수하였다. 방원이 신덕왕후에게 극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교육시키고 장가까지 보내준 신덕왕후가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자신을 배척한 순간 왕후는 더 이상 방원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조선왕조가 개창한 지 막 4년이 지난 1396 8, 마흔 하나에 불과했던 신덕왕후는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2년 뒤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태조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신덕왕후 소생인 방번과 방석,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를 모조리 죽였다. 경순공주는 이후 비구니가 되었고, 신덕왕후 강씨의 친족도 멸문을 면치 못했다.

 신덕왕후는 후일 태종이 되는 이방원에 의해 왕후가 아닌 첩의 위치로 전락하였고, 공식적인 사료나 기록에서도 모두 삭제되었다. 지금의 덕수궁 자리에 있었던 그녀의 무덤 정릉은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다가 결국 도성 밖 정릉동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태조 이성계의 신덕왕후에 대한 무조건적인 편집적 사랑은 냉철했던 그의 정상적 판단을 흐리게
하였고
, 이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파국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여인으로 인해 왕위를 빼앗긴 조선왕조의 유일한 임금이 되었다.
 
<사진은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1970-01-01 09:00 2015-03-26 19:27
댓글
0 개

Comments List

댓글 쓰기
수정전의 원래 명칭은 세종 때의 집현전이었으나 세조 때 사육신의 본산인 집현전을 폐쇄해 버렸고, 성종 때 기능을 되살리면서 명칭을 홍문관으로 바꿨다가, 임진왜란으로 없어진 건물을 고종 때 되살리면서 “정사를 바로 잡는다”는 뜻을 담아 수정전이라 하였다.

처음 왕립문화연구소로서 세종 때 신설된 집현전(集賢殿)은, 국가 미래에 대한 설계와 제도개선, 학문 연구와 서적 편찬, 임금의 제왕학(帝王學) 진강인 경연(經筵)의 주관 등 국정 싱크 탱크(think tank)로서 수많은 업적을 세우며 임금을 보필하였다.
 
특히 이들의 여러 연구 중 음운(音韻)연구는 세종 때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 받는 훈민정음 창제에 결정적 요체가 되었다. 이후 집현전은 조선왕조를 유지하는 근간이 되었고, 그 기능은 정조 때의 규장각(奎章閣)을 거쳐 고종 때의 수정전(修政殿)으로 이어졌다.

임금의 통치 자문기관으로 크게 발돋움 한 집현전에는 재행(才行)을 겸비한 뛰어난 학자들의 집합체였는데, 이중에 특별히 두각을 나타낸 문사(文士)로는 정인지, 성삼문, 유성원, 신숙주, 박팽년, 하위지, 최항, 이개 등을 빼놓을 수 없다.
 
 
집현전의 비극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일으킨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에서 비롯된다.
집현전 학사들이 한 임금을 향해 품었던 충성심은, 병약한 문종의 사망 직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분열되기 시작하여 충(忠)과 세(勢)의 대결로 갈려진다.
세종과 문종에게는 충성심이 하늘에 닿을 듯 붉은 마음으로 똘똘 뭉쳤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이 즉위하자 의리를 지키려는 충성파와 권세를 따르려는 현실파로 나누어진 것이다.


 일편단심으로 단종을 따르는 충성파(忠誠派)는 성삼문, 유성원, 이개, 하위지, 박팽년 등이었고, 권력을 추종하는 현실파(現實派)는 정인지, 신숙주, 최항 등이었다.
충성파는 세조의 끈질긴 회유를 거부한 채 잔혹한 고문으로 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죽음을 당하면서 사육신으로 승화하였고, 현실파는 변절의 대가(代價)로 세조 재위 중 재상 등 고관대작을 얻어 성세(盛世)를 누리며 떵떵거렸다.


그러나 역사의 심판은, 의리파에게는 충절의 명예를 내려 귀하고 빛나는 영원한 삶을 부여했지만, 현실파에게는 자손 만대에 이르도록 변절자의 오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원한 죽음을 내려 엄정하게 판결한다.
 
 <세종 때 국책 think tank, 집현전 자리, 경복궁 수정전>
1970-01-01 09:00 2015-03-19 20:04
댓글
1 개

Comments List

  1. 장현덕 2015-03-23 10:47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지조란 인생의 말년에 가져야 진정한 지조라 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사육신은 그걸 보여 줬기 때문에
    지조있는 사람으로 평가받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 쓰기
« Previous : 1 : 2 : 3 : 4 : 5 : ... 32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