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보조 식품에 목숨 걸지 마라.
 
 
 

 

건강한 삶을 위해서 규칙적인 운동이 최고의 보약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에서 보면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어떤 운동이든 습관이 되기까지는 굳은 의지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공직에서 정년퇴임을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야 요즘 어떻게 지내니? 

그냥 잘 지내지? 

 요새 뭐 해? 농사 일하면서 독서실에 가서 책도 읽고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요즘도 운동하니? 

그거야 생활이니까? 그냥 밥 먹는 것처럼 하는 거지 뭐. 

지난주 일요일에 인제 마라톤에서 하프(21.0975km) 뛰고 왔어. 날씨가 몹시 더웠을 텐데? 

뭐? 더 우나 마나 그냥 하는 거지? 

인제 내린천 주위 도로를 달리는 코스에는 나무가 많아 시원하더라. 

아픈 데는 없지? 글쎄 아직은 특별히 어디 아픈 곳은 없어.

 건강은 장담 못해? 항상 조심해야 해?

 그럼 우리 나이에 뭐 크게 바라는 게 있니? 그저 아프지 않고 늙어가기만 바라는 것이지?

 친구야 나는 네가 부럽다. 고맙네? 

친구는 뭔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꾸 건강이야기만 한다.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니? 너도 아픈 데는 없지?  모기만 한목소리로 말한다.

 나! 병원에 입원했다가 오늘 퇴원했어! 어디 가 아팠는 모양이로구나?  신장이 나빠졌다고 하네? 

신장이라면............? 콩팥. 소변을 걸러 내는 기관이야. 

 

그래서? 

매주일 2회 화요일과 목요일에 4시간씩 투석을 해야 한다고 하네?  빨리 좋아져야 할 텐데/

혼잣말을 한다. 깜짝 놀랐다. 

얼마 전에 4월 중순 그 친구를 포함한 친구 5명이 부부동반하여 함께 동해안 쏠비치 콘도에서 밤새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며 함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무순 이유로 신장 나빠졌다고 하니?

응? 죽염이 원인이라고 하네?  죽염을 먹었어. 죽염! 응 죽염. 죽염을 왜 먹었는데. 혈압이 떨어지고 혈당은 낮춘다고 해서 매일 먹었는데 그것이 원인이라고 하는군? 

뭐야? 죽염을 어떻게 먹어. 그냥 몇 알을 입에 넣고 물을 삼켰지? 

얼마나 먹었는데? 몇 달 계속해서 먹었어!

 어이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친구는 키도 크고 몸도 체구가 큰 편이어서 운동이 필요하다 싶었는데 그 친구는 건강식품을 먹으면서 건강을 유지하려고 했다.

 

지난해 그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집안에 좋다는 술이 유리 장에 가득히 있었다. 술이 좋으면 몸에 좋은 거냐? 사랑하기에 좋은 거냐? 도대체 뭐에 좋은 거냐? 따지듯이 물었을 때/ 그냥 선물 받은거야!

라고 말했던 생각이 났다. 

 

식탁 한쪽 구덩이에는 홍삼을 비롯한 건강 보조 식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것은 간에 좋은 것이라고 하고 이것은 혈압에 좋다고 하고 이것은 어디에 좋다고 설명을 하였다.

좋다는 것을 챙겨 먹는 것은 본인의 판단이니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 할일이 아니다. 조언한다고 해서 중단하지 않을뿐더러 너나 잘해!라고 속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건강이 염려되는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마음이 약해져서 쉽게 건강을 회복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행동하려고 한다. 그 결과 건강 보조 식품에 대하여 맹신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동안 만났던 지인들 중에 운동을 싫어하는 친구들 중에는 거의 예외 없이 건강 보조 식품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건강 보조 식품을 먹고 건강이 완벽하게 회복되었다는 친구는 아직 보지 못 했다.

가끔 규칙적인 운동과 음식습관을 바꿈으로 해서 건강을 회복했다는 사람들의 증언은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마라톤을 약 20년 동안 꾸준히 해 왔다.

 풀코스 마라톤 주로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인간의 의지가 규칙적인 운동을 하다 보면 이렇게도 건강한 몸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는 종종 있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풀코스를 완주하는 꼽추병 환자도 만났다. 감전 사고를 당해서 두 팔을 잃은 사람이 우울증의 고통에서 이겨내려고 달리기를 시작하여 극복한 사례도 있었다. 앞을 볼 수 없는 장님 마라토너가 달리는 모습은 가슴을 써늘하게 했다.

인간은 의지만 있다면 못해낼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에 달린 것 자신의 몫이니 누가 뭐랄 일은 아니다. 

 

그 친구는 몸은 건장했고 인물도 번지르르했다. 운동이라면 숨쉬기 운동과 술 마시는 운동과 고스톱 운동이 전부였다. 공직에서도 술 마시고 폼 잡는 역할이 전 부인 직책이었다. 한마디로 잘 나가는 ㅇㅇㅇ 이었다. 그러니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실천하기에는 환경이 너무나 고급스러웠다.

 

아내에게 그의 이야기를 하니 너무나 놀라는 것이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시던 분이 .........?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을 텐데.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무리 건강식품이 좋다고 해도 과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의사 처방이 없이 건강식품을 함부로 먹는 것은 정말 곤란하다. 그런데 이 글을 쓰다가 죽염을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거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홍보하고 있는 곳이 여러 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건강 신품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젊은 날에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달리면 된다고 하겠지만.

나이 먹어 한번 건강을 잃으면 쉽게 회복되기 어렵지 않을까? 오늘은 그 녀석 때문에 내가 초라해지는 날이다.

 

 

 

1970-01-01 09:00 2016-06-0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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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인심이 후하던 시절에는 입만 가지고 다니면서  "담배 한 개비만 주게!"라고 말하면 안면이 없는 사람이 달라고 해도 서슴없이 한 가치를 주었다. 골연 한 갑을 사서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거의 반감을 한 번에 나누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담배꽁초를 주워서 피우면서도 한 모금씩 나누어 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내게 충격을 받고 한순간에 담배를 끊었다. 무엇이 내가 담배를 끊게 했을까? 궁금 해 하는 사람이 있으니 입을 연다.

너는 입만 가지고 다니냐?

약은척 하고 담배를 차에두고 다니면서 수없이 금연을 결심 했지만 동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날 그는 내가 담배를 달라고 한것이 두번째 였다고 한다. 물론 나는 생각없이 얻어서 피우는 빈대 족이었다.

그일이 있은후 더이상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1970-01-01 09:00 2016-04-2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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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업을 시작하려고  준비가 완료되어 예정했던 개업일이 가까워지면 개업식에 대하여 고민을 하게 된다. 

간단하게 하지 뭐? 돼지머리 하나,  시루떡이나 해서 막걸리 몇 병이면 되지 않을까? 로 시작하다가 이 사람 저 사람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점점 규모가 커지게 된다. 

모 처럼 사람을 초대하는데 선물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시작한 것이 또 다른 고민에 쌓인다. 가까운 이웃에는 시루떡을 돌리는 것으로 알릴까?

시작한 것이 친구도 알리고 싶고 친지도 알리고 싶어지니 점점 범위가 커진다.

 그러다가 기왕에 사업을 하는 것이니 가급적 많은 사람을 초대하여 사업을 알리는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잠재 고객이니 떡을 나누어 먹어도 "갑"이라는 생각에 부담이 크지 않지만

친구나 지인 자격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은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니다. 

빈손으로 그냥 갈 수도 없고 꽃다발을 하자니 낭비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정에서 필요한 물건이면 하나쯤 팔아 주면 되겠지 생각하기도 한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구입해 오느니 몇만 원을 부조금 처럼 내고 오면 개업비에 보태 쓰겠지 생각 하기도 한다.


 

지난해 연말에 일이다. 오토바이 소리가 나더니 청첩장처럼 보이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요즘은 순사 보다 무서운 사람이 사람은 우체부 아저씨다. 또 세금 고지서가 왔군, 약간 불편한 심기가 생각에 구름을 드리우면서 봉투를 뜯었다. 

 겉봉투만 보면 분명 청첩장은 아니다. 뭘까? 봉투를 뜯었다. 지인의 옷 가계 개업 안내문이었다. 

  안내문을 읽다가 묘한 생각이 스쳤다. 이건 또 뭐지?

 " 꽃다발은 정중히 사양합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혹시 "현금으로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설마 그럴리야? 

개업식 날 이다. 마음이 옮겨지지 않으니 다리를 달래서 몇만 원 봉투를 만들어 개업하는 점포에 참석했다.  점포에 들어서 사장님을 만나고 분위기를 보면서 조금 당황했다. 

모금함을 만들어놓고 

"오늘 여기에서 모인 돈은 어려운 이웃을 여러분의 이름으로 돕겠습니다. 

실명 봉투는 사양합니다."라는 문구가 옆에 방명록이 있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오늘 참석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 가계는 삼심(진심, 양심, 성심)을 팔겠습니다.

 개업식 날이라고 해서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가지고 가시지 마십시오. 

저희 가계에는 꼭 필요할 때, 

다른 점포와 비교해서 가격과 품질면에서 우수할 때, 

마음이 행복하고 싶을 때 찾아 오십시오. 이렇게 써 붙여 놓은 것이 아닌가.

조금은 당황스러워 었다. 만들어 간 5만 원짜리 봉투를 모금함에 넣을까? 말까? 상의 속주머니에 봉투를 만지작 거렸다. 넣을까 말까? 고민을 하였다. 화장실로 가서 또 고민하다가 오만 원권을 빼고 만 원권 석장을 넣었다. 에이 삼만원이면 됬지?

 생각보다 현금을 넣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얼마나 모아졌을지는 주인만이 알게 될 것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주인의 발상이 신선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 옷을 구입하지 않았지만 그 옷 가게 단골이 되어 몇 차례 방문했다.  요즘 창업이 힘들다고 하는데 6개월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잘 운영되는 것으로 보아 성공할 것으로 믿는다.


사실 우리들은 가까이 아는 사람 점포에서 선뜻  물건을 구입하기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가계에 갔다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거나, 값이 비싸거나, 불 친절해서, 돌아서야 할 때 여간 고역스러운 것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내색을 하면 물건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이해시키려고 하면 쉽게 거절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음을 자유롭게 내색하는 데는 한 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친한 사이에 라 는 부담이 선택의 자유를 억압한다. 혹시 쩨쩨한 놈으로 소문으로 날아다닐까 두렵기 때문이다.

 아는 사이에 뭘 까다롭게 구느냐? 몇 푼 안되는 거 사면서 별 트집을 잡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가까이 아는 지인은  사업을 시작하고  모임을 모두 없앴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정가제로 물건을 파는 메이커 체인점 옷 가계인데 깎아주지 않는다든지 회원끼리 뭐 좀 주는거 없느냐는 말을 한다니 부담이 된 것이다. 

 물건을 구입하고 나서 좋지 않은 험담을  들을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것이 속이 편하다고 한다.

 

  사실 주인이나 고객이나 마찬가지이다 주인 되시는 분도 대부분 잘 아는 고객이 오면 마음이 뭔가 걸쩍 찌곤 하다. 값을 전부 다 받자니 왠가 미안한 것 같고 깎아주자니 다른 고객들이 알면 싫어할 것 같고. 어쨌거나 사업을 하는 점포 주인이 고객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이 제일 합리적인 방법이 아닐까?

 

 

 

1970-01-01 09:00 2016-04-2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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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면 나 또한 어느 부모의 아들이었다. 

나의 부모도 내 인생이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친구 어머니는 아들을 낳기 위해 딸을 5명을 낳고 이번에 마지막이라고 6 째는 "말자"라고 이름을 지어  주며 마지막이기를 바랐지만 또 딸을 낳았다. 정말 이번에는 끝이라는 의미로 "끝순"이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다시 하나 낳았지만 모두 허사였다고 한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한 것이 딸 7명을 낳고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아들을 낳고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대아에 빨래를 담을 때도 아들의 기저귀는 따로 담았다고 한다. 빨래를 빨기 위해 빨래터 도랑에 기저귀를 휑 구면 누런 변이 도랑으로 둥둥 떠내려가면 흐뭇한 모습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고 한다. 

찬물에 손으로 빨래를 하려면 얼마나 손이 시려웠을까? 찬물에 손이 시린 것은 잊어버리고 똥이 떠내려가는 것도 행복이 떠내려가는 것처럼 마음이 시려웠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3대 독자였다. 아들을 낳아보려고  몇 번 다른 여자를 보았는데 번번이 실패를 했다고 했다.

그때 아들의 위치는 딸 7명하고 바꾸지 못하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 아들이 어른이 되어 환갑이 넘은 나이에 어머니가 쇠잔하여 눕게 되었다.

그때 어머니 어머니의 연세는 95세, 요양원으로 모시자고 하는 누이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모셨다고 한다. 일어서지 못하고 누워서 용변을 받아야 하였을 때 아들이 5년 동안을 수발했다고 한다. 작게나마 어머님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다고 말 했다. 얼마 전 어머님의 100순에 누님들과 모여서 저녁을 함께 먹고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어머님을 모셔줘서 감사하다고 동생에게 격려했다고 한다. 그날 누님들이 깨끗하게 목욕시켜 드렸는데 얼마 전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자라면서 부모에 의지해서 부모의 젖을 빨아먹고 부모가 해주는 밥을 먹고 부모가 사주는 학용품을 가지고 부모가 지원해준 학비로 공부했을 것이다. 

부모가 사주는 옷을 입고 부모가 사는 집에서 살았다. 그러면서도 어떤 일이 잘 되지 않으면 부모를 원망하기도 했을 것이고, 때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었을 것이다.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큰 인물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고. 착한 여자 만나서 아들딸 낳고 잘 살기를 바랐으며 훌륭한 손자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지금 내가 내 자녀들에게 바라는 사항대로 내 부모도 나에게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0-01-01 09:00 2016-03-2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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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가난하게 살아왔던 이야기는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시절은 어느 집이나 먹고살기 힘들었으니 내가 강냉이 죽을 배급받아 먹었느니 송기떡을 해 먹었느니 하는 이야기는 식상할 테니 입다물겠다.

오십몇 년 전 초등학교 다닐때 내 별명은 깜씨였다. 얼굴이 검다고 부쳐진 별명이다. 얼굴만 검은 것이 아니라 키가 작아 난쟁이 똥자루라는 별명도 있었다.

 작은 키에 검은 얼굴 거기에 먹을 것을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으니 얼마나 작았을까? 장까지 나빠서 자주 설사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학예회쯤으로 어렴풋하게 기억된다.   "나비야!"나비야!" 이리 날라오너라"라고 나비야라는 나비춤을 추다가다가 바짓가랑이에 실례를 했다. 참고 또 참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놈이 바짓가랑이로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무용을 하다가 말고 한 여학생이 선생님! "어디서 똥 냄새가 나요!"라고 소리 쳤다. 순간 무용이 멈췄다. 풍금을 치던 선생님은 무대로 올라와 확인에 들어갔다. 드디어 내가 저지른 실수 임이 밝혀졌다.

 나는 솔직히 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배가 아파서, 변이 마렵다고" 선생님께 말 할 사이도 없이 저질러진 일이다. 놀란 선생님은 학예회 도중에 먼저 집으로 가도록 조치 했다. 

우리 집은 학교에서 산길로 3km쯤 떨어져 있었다.

축축한 바짓가랑이를 하고 터덜터덜 울다 웃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멀었을까? 

부끄럽다 못해 비애를 느끼며 고독해했을까?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남의 집 품팔이 가시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집에 와서 부엌에 들어와 아무리 무쇠솥 뚜껑을 열어 보았지만 보리 누룽지조차 없다.

허기에 지치고 엄마가 보고 싶어 울다 지쳐서 툇마루에서 잠이 들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집으로 남에 집 품팔이 하 돌아온 엄마는 내가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알지 못한다. 

 그냥 평소 처럼 부지런히 찬 보리밥 한 사발에 물을 붓고 무쇠솥에 끓여서 양재기 담아서 짠무지에 고치장을 내 놓는다. 단숨에 숭늉 들이키듣 먹어 치우니 바지를 벗기고 찬물에 씻겨 주었다.

 바짓가랑이에 물변을 묻히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엄마는 대수롭지 않다.

   친구들이 몰랐을 뿐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나의 국민학교 시절에 별명은 똥싸개였다. 작은 키에 까만 얼굴 바짝 말라붙은 배 요즘 아프리카에 굶주린 어린이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부는 60명 중 후미에서 5번 내 외었다. 

솔직히 단 한 번도 꼴찌는 해보지 못 했다. 내 노력이라기 보다 나보다 재수 없는 친구가 항상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한 반은 60명 정도 이었고 오전 반과 오후 반이 있었는데 내가 무용 도중에 변을 실례한  이야기 소문은 오전 반이나 오후 반이나 다 아는 사실 있었다. 

야! 똥싸개? 저리 비켜?

친구들도 선배도 어디에도 끼어 주지 않았다. 

왕따가 아니라 똥 따가 된 것이다. 모르긴 해도 똥을 싸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 받는 놈이되었으니 흔하지는 않은 일일 것이다.

아침에 학교 갈 때도 친구들과 어울려 가지 못 했다.  친구들 중에 맨 뒤에서 터덜터덜 걸어갔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올 때는 언제나 혼자였다.

 혹시 나에게서 냄새가 나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어 혼자 다니는 것이 편했으리라.

 

집에 오는 길에 찔래 순도 꺾어 먹기도 하고 달래도 캐기도 하고 그럭저럭 자연과 어우러져 귀가했다.

다랭이 논길을 지나오는 길에 때까치 새집을 맡아 놓고 매일매일 점검하다가 알에서 깨면 새끼를 가져다가 기르지도 했다.

변 따는 그렇게 외롭지 않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매년 대운동회를 했을 때, 5~6명 1조가 되어 달리기를 해서 등수를 가려서 공책을 주었다. 1등 3권 2등 2권 3등 1권  단 한 번도 달리기에서 3등도 해보지 못 했으니 상품으로 공책 한 권도 받아 보지 못 했다.

 

중학교는 20리 떨어진 양평으로 진학했다. 경쟁률 1.12 :1 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으니 퍽이나 재수가 있는 놈이었다. 학생 320명 모집에 350명 정도가 응시하여 당당히 합격했던 것이다.

 속으로 피식 웃었다. 자식들! 나보다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꽤 있네??

솔직히  초등학교 6년 동안 한글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 하고 졸업했던 놈이 정말 대박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초등학교 때 내 별명이 똥싸개라는 것을 잘 아는 놈은 별로 없었다. 별명도 차츰 잊혀 저 갔다.  초등학교 다니는 동안  왕따로 사는 기술을 터득했던 터라 이제는 차라리 혼자 다니는 것이 편했다. 나는 어디 가나 있으니 마나 한 존재감이 없는 놈이었다. 편가르기 놀이를 하자고 할 때는 차라리 따돌림 해 주는 게 고마웠다. 

하고 싶어도 시켜주지 않았지만 시켜주어봤자 내가 속한 팀은 언제나 패할 확율이 높았으니 같이 놀자고 하는 친구가 없었던것 같다.

 

2탄

 

초중고등학교12년을  통틀어서 상장이라고는 정근상 1번정도 받아본 기억외에는 없다. 친하게 지내는친구도 별로 기억나는 놈이없었다. 나에게 사춘기란 고등학교 시절 여학생 속치마를 몰래 훔처보고 누가 알까봐 주위를 살피는것, 하얀 교복상의 뒤에서 브레져 끈자욱을 슬쩍 쳐다보고 못본척 두근두근했던 것이 전부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남녀 공학이었는데 혹시 나에게서 냄새라도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같은 반 여자 친구들에게 조차 가까이 가지 못 했다. 

"희태야 너도 이리 와!"라고 해도 나는 대답을 별로 시원스럽게 하지 못 했다.

 

그렇다고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는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가슴속에 숨겨서 잠가 놓고 열쇠를 강에 버렸다. 내가 죽어도 강물이 마르지 않을 것이니 짝사랑 이야기를 꺼낼일은 없다. 고백하지 못한 짝사랑이야기기 뭐가 그리 부끄러우냐 말할지는 모르지만 누구나 감추고 싶은 진실 한가지 쯤은 있을것이다.

 

참잘했다. 

공부를 못하기를 참잘했다.

워낙 공부를 못했으니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협에 청소부로 취직하는 것도 감지 덕지였다. 청소부로 입사했다가 임시직이 되고  정규직 시험에 합격하여 부장이 되고 승진 시험에 합격하여 상무가 되고 전무가 되어  최고 경영자로 은퇴했다. 

참 잘했다.

줄반장 한 번도 못해보기를 참 잘했다. 

은퇴를 5년 남겨두고 대학에 입학하여 학생회장을 했다. 나이가 많다고 젊은 사람들이 하게 하라고 했지만 당당히 출마하여 70% 지지를 얻어 당선이 되었다. 교수님이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더 좋아했다. 그를 계기로 다른 사람 앞에 서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참 잘했다.

똥싸개라 되기를 참 잘했다.

똥사 개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혼자 사는 방법을 일찍이 터득하여 은퇴 후에 정말 외롭지 않게 보낸다.

혼자 외롭게 지내면서 좋아하던 들풀 나무들이 인연이 되어 지금 소나무 농장을 하며 남부럽지 않은 노후를 보내고 있다. 스스로를 소나무 아티스트 1호라고 한다.  소나무 가꾸기에서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나무보다 아름다운 소나무를 아직 보지 못 했다. 정말못 했다. 정말 아름다운 소나무 농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참 잘했다. 운동 못하기를 정말 잘했다.

지금 나는 양평 마라톤 회장이다. 25년째 마라톤을 해오고 있다. 나보다 잘 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하다가 중단했다. 내 나이 63세 부부가 42.195를 달리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설렐 것이다.

매일 10km  매주 21.975km 분기에 한 번씩 풀코스를 달린다. 

기록이 얼마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웃는다. 맨 꼴찌로 완주하는 사람이 대답하기에는 유쾌하지 않다. 4시간 59분 59초 춘천 마라톤 2015년 가을 기록이다.

2015년 여름에 고비 사막 마라톤을 완주하고 돌아왔다. 8순 말아톤 형님 들고 교류한다. 90세까지 달리고 싶다. 

 

 

1970-01-01 09:00 2016-03-2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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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쓴다고? 

대단한 사람이야!

 어떻게 그 나이에 글을 쓸 생각을 해? 내 친구가 자서전을 내겠다고 했을 때 내가 한말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부터 직장생활까지 약 45년 동안 글을 써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은퇴를 3년 앞두고 학교에 다닐 때 교수님께서 자서전을 써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약 10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100페이지 정도의 책을 만들어 10권씩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막상 내가 쓴 글. 

 내가 만든 책을 누구에게 나누어 주기에는 왠가 부끄러워 한권도 나누어 주지 못했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책이 폼도 나지 않았고 내용이라야 그저 보통 사람의 삶을 누가 뭐 관심이 있겠나 싶어서였다.

자녀들 아내 조차도 관심을 갖아 주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책한 권을 만들고  난후  뭔가 가슴에 숨 쉬고 있는 꿈틀거림이 있었다.

뭐라고 세상을 향하여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뭐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냥 뭐라고 글씨로 써보니 막상 편지지 한 장도 메꾸기 어려웠다.었다.

 내 생각이 뭔지 내 안에 나는 누구인지 말하기가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손글씨로 글을 쓰는 것이 더디고 힘든 일인지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독수리 타법으로 간신히 자판 손을 얹고 이러고저러고 된 숭 안된 숭 신변잡기를 시작했다. 

 뭐라고 써놓고 일어 보면 세상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보는 것은 여전히 부끄러워 몸을 숨겼다.

블로그가 뭔지를 조금 알게 되면서 거기에다 뭐라고 지껄여 놓았다.

 나만 볼 수 있게 비공개를 설정하고 마음을 내려 놓기 시작했다.

 

 띄어쓰기도 맞춤법도 맞지 않는 엉성한 나의 글쓰기를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나도 모른다.

미친놈이 범 잡는다고 말해야 할까?

글쓰기 시작한 뒤로 은퇴 후 외로움이 연기되었다. 

매일 뭐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내려놓고 나면 친구 만나서 술잔을 부딪치고 세상에 침 뱉고 돌 던진 기분이다. 

술 마신 다음날은 머리가 띵하고 정신이 멍청하지만 뭐라고  글을 쓰고 돌아서면 마음이 훨씬 가볍고 뿌듯했다. 

모르긴 해도 내가 내 신변 이야기 따위를 하는 것은 세상을 향하고 지독한 고독함을 소리쳐 보고 싶어 하는 내면에 내가 있어서 라고 단정지어 보았다?


 나는 글을 쓰고 돌아보지 않는 습관이 있는 사람이다. 

뭐 내 따위 놈이니 쓴 글을 누가 보겠어.라는 생각뒤에는 천박함을 자랑하고 싶었나보다. 

아니 본들 무식한 3류 인간의 이야기가 그렇고 그렇지?

뭐 별것 있나?

처음에는 독수리 타법으로 분당 40~60타 수준의 더듬거리면서 자판을 두들겼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 자판 연습이라고 하자고 생각하고 두드리다 보니 어느 순간에 1분에 120타 정도를 치고 있었다.

 대견스러워 피식웃었다. 

천천히라도 자판을 보지 않고 글씨를 치는 것이 뭐 과거 급제라도 한 사람처럼 신이 났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불러 그에 3.000 개가 넘는 수다를 늘어놓았다. 거의 매일 한편의 수다를 내려놓았다.

자판 실력도 평균 250타 수준이 되었다.

 

지난해 시니어 파트너스에서 IT 창업과정 교육 중 책 쓰기 과정을 통하여 시집도 출간하였다.

"나는 삼류다" 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일류가 되었다.

시집은 낸 시인은 아무나 되나?

감히 꿈을 꾸는 것도 비만이었을 사람이 작은 꿈을 하나 이루었다. 작가가 된것이다.

 

이제 겨우 육십 좀 넘은 나이를 나이가 많다고 뭔가 시작하기에 늦었다고 하는 말이 성가시게 들린다.

핑게거리를 찾으려니 하는 말일께다.

어느 날 지방신문사 편집국장이 매주일 칼럼 한편씩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 되지?  말하고 싶었다.

제가 무순 글쟁이 인가요? 아님니다.

정말 솔직한 글이 읽을 거리가 됨니다.

좀 띄어쓰기, 문법이 약해서.........? 표현력도 좀 그렇고?

거드름을 피었다.

지금은 지방신문 칼럼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도대체 이건 뭐지? 

나도 내 안에 뭐가 있는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냥 마라톤이나 뛸까? 

 

 

 

 

 

 

 

 

 

 

 

 

 

 

 

1970-01-01 09:00 2016-03-1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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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단테 2016-03-17 14:07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은퇴 후 글쓰기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친구를 둔 것처럼
    기쁜 마음이었습니다.

    남아있는 날 동안은 계속 좋은 글 쓰시면 좋지 않을까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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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직에서 30년이상 근무하다가 은퇴 하신 분들이 샘나서 하는 말이다.
요즘같이 어려운시기에 60세에 정년을 맞는 것도 엄청난 금수저 들고 나온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연금을 매달 죽을때까지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바람이부나  200~300만원 받는 사람들은 어디 금수저에 비교 하겠는가 금주걱을 들고 나온것이지? 어디 그뿐이랴? 정년 퇴임하는 길이 섭섭하니 조금더 편안히 쉬면서 봉급더 타먹고 노후를 대비 하라고  자회사에서 몇년을 더 근무하게 하고 봉급을 타 먹는 사람들이 있다.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그들에게 일자리 대책을 마련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알고 보면 즈그들이 70세가 가깝도록 근무 하고 있다. 그들은 다이야 몬드를 주먹만한 것을 들고 나오는셈이다.
빈정거리는 말이다.
공직에서 정년퇴임 한다는 것은 은퇴후 40년을 보장 받는것이다. 퇴임후에 어디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건강과 일이라고 말하는 은퇴 강사에게 바른 소리 하고 싶다.  개개인의 건강이야 자신이 타고난 유전적인 기질과 노력으로 해결해야할 문제 이지만 은퇴후에 돈이란 삶그자체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라고,
 법으로 정년을 60세로 해놓았지만 60세까지 편안히 근무 하도록 놔 두는 회사도 별로 없는 게 현실이다.
그나마 임금 피크제라고 하는 말을 만들어내서 정년을 보장하는 것처럼 구실을 만들어서 쫏아 내기도 한다. 그정도야 감사 해야 할일이다.
어떤 회사는 나이 40세만 넘으면 명퇴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한다.
말이 명퇴지 명예롭기보다는 부끄러운 쫏겨남이다.
기분좋게 퇴임해야 명예로운 퇴임이지 부지깽이로 후배들에게 매맞고 도망가듯이 퇴임하는 기분은 퇴임하는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다른사람들이 괜찮다고 하는 회사에서 58세를 정년으로 은퇴 했다. 은퇴후에 어떤 일이든 할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다. 재수가 좋아 국민연금을 한 100만원 정도 받는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이 좀 있다는 이유로 건강보험료 30만원을 내고 나면 약 70만원 정도를 받아서 부부가 생활한다.
말이 70만원이지 수도 광열비를제외하고 나면 뭐 남는것도 별로 없다. 자식들의 눈치를 보고 있으려니 
1970-01-01 09:00 2016-02-16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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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01-01 09:00 2015-08-10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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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예찬

                                      이  봄 


 젊음만이 행복이라고 말하지마라.

삶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요

행동하는 노년은 젊은 것이다.

 

 노년은 진지하다.

삶은 순수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무대가

힘들고 지친 모습만이 아니다.

 

우리가 갈길을 묻지마라

 부모님에 의해서 태어났고

                                           부모님이 갔던 길을 가다가

 부모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노년은 꺼져가는 촛불도

                                             낙엽 되는 단풍 도 아니다 .

 삶의 행복을 찾아 지나온 시간 위에

                                       땀과 눈물을 흘리고 웃고 즐겼을 뿐이다.

담대하라.
눈치 보지 마라.

 

 부담도 아니고

짐도 아니다.

덤도 아니다.

 

행복은 어느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계절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세월은 누구도 잡지 못하니

아쉬워할 그 무엇도, 그리워할 사람도

미래를 향한 행진곡처럼....

 

 쉼 없이 달려온 지난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하여도

우리는 미래로 달려가야 한다.

 

영웅을 꿈꾸지 마라.

행동하지 못하는 충고는 잔소리다.

젊은이를 이기려 하지 말고.

격려하고 지켜주는 개가 되어라.

 

아무리 괴로워도, 과거돌아 보지 말라!

 

  미래 희망을 믿어라!
꿈을 버리지 마라.

                                                살아있음에 감사하라. 

하나님께 기도하라.

 몸과 영혼은 우리의 의지에 달렸거늘 

끊임없이 움직여라.

                                        끊임없이 생각하라.
 
먼저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우리가 딛고 있다.

                                           위대한 삶이 아니면 어떠랴

그리고 이 길을 지나고 난 뒤의

한 줌에 재가되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 하여도

 우리는 가치가 있는 삶을 살다 간 것.

 

털퍼덕 주저앉지 말고 일어서 미래를 보자.
 한탄하지 말라.

                                                   미소를 잃지마라.

깊어가는 잔주름에 힘을 주고

                                        젊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격려하고,

칭찬하며, 공감하고, 배려하면서
지켜보고

                                                 그렇게 늙어 가자꾸나.

 

- 이희태 -

 

 

 

 

 

 

 

 

 

 

1970-01-01 09:00 2015-08-09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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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단테 2016-03-17 14:12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자신을 달래고 힘을 주는 글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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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품이 되었다.

갤럭시 2. 3.4. 6. 점점 새로운 기능의 폰이 출시되지만 나는 전화 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기능이나 카톡. 밴드 정도 하는 것이 고작이다.

부러 그를 검색하기도 하고 카페에 가서 소식을 보기는 하지만 작은 글씨에 눈이 침침하게 느껴지니 글 쓰는 기능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카메라 기능이 몇천만 화소라고 말하지만 그 소리가 무순 소리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컴퓨터로 옮기는지 잘 모른다. 설령 옮긴다 하더라도 뭐 찾아 볼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진을 인화해서 보관한다는 것은 더욱 엄두를 내지 못한다. 돈이 들어가고 시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의 전화받는 기능과 메시지를 위해서 만 필요하다. 언제부터인가 휴대폰을 몸에서 가까운 곳에 두고 항상 긴장하고 있다.

곁에 있지 않으면 담배 중독자가 금단 현상을 일으킨 듯이 폰단 현상이 생기는 모양이다. 

외출하려면 휴대폰을 항상 찾게 되고 집에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면서 어디에다 두었나 기억하려고 한다.

혹시 물에 빠트리면 어쩌지?

손에서 떨어져 있으면 불안하고 큰일이라도 생길 것처럼,

혹시 누군가로부터 중요한 연락이 왔는데 못 받으면 사업상 큰 손실이라도 생길 것처럼 말이다.

어느 날부터 인가 폰을 집에 두고 다니겠다고 마음먹었다.

 가까운 친지의 애사로 외출하여 하루를 묵어야 하는 일이 생겼는데 바쁘게 왔다 갔다 하다가 급하게 전철을 탔다.

  전철에 타자마자 폰을 주머니에서 찾으니 없다. 집에 두고 왔음을 알고 몹시 불안해하면서 다른 사람의 폰을 빌려서 집으로 전화를 했다. 

내가 폰을 책상에 놔두고 왔으니 잘 보관하라고 아내에게 말하고 나서야 마음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귀가하자마자 폰부터 열었다.

 전화 한 통화 온 데는 없었고 단지 단체 메시지 두 개, 스팸메일 세 개, 그리고 다른 사람 글을 퍼 올린 카톡 세 개 정도 와 있었다.

너무 허탈했다.

 더 자세히 최근 전화통화 기록 란을 들여다보았다. 

요 며칠 동안 아내가 찾았던 기록과 친구가 모임에 참석하라는 전화 외에는 한 통화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전화기를 들고 다니면서 누구의 전화를 기다린 것인지 도대체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저장된 전화번호를 검토해보았다.

 수백 개의 전화번호 중에 낯 선 사람의 전화번호는 없지만 막상 마음 편히 외로움을 내려놓고 커피 향을 맡아줄 사람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골로 전화하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어! 날씨가 오늘은 덥다.

뭘 하냐? 그냥 있어.

운동 중이야.

 모임에 왔어.

어제 친구들이랑 술 좀 마셨더니 몸이 무겁구먼.

손자가 왔어.

그동안 통화 한 내용의 전부이다.

특별하거나 꼭 통화해야만 하는 이야기는 한 구절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런 나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폰의 여러 가지 기능 중에 전화 기능외에는 사용한것도 없고 전화 기능도 

누군가를 기다리는데만 쓰고 있었다. 

마음을 바꾸리라.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외로워 하지 말고 외로워하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전화 해보자.

그리고.....................

 이제부터는 외출해야 할 때는 폰은 집에 두고 가리라. 

가지고 갈 것은 폰이 아니라

 호기심이나 책을 들고 나가면 폰단 현상이 치유되지 않을까?


 

 
 

1970-01-01 09:00 2015-08-04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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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단테 2016-03-17 14:11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사진 찍는 카메라 역할을 더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ㅎ
    없어도 될 물건이 곧 휴대폰인가 싶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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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 후 몇 년 동안은 그런대로 만날 사람도 있고 하고 싶은 일도 있다.

 그러나 3년쯤 지나면 만나던 사람도 시들해지고 하고 싶은 일도 생각처럼 되지 않음을 알아가게 되고 조직의 단맛이 떨어졌음을 눈치 채게 된다.

열정은 식어가 냉정으로 바뀌고 냉정은 고독과 마주하게 된다.

 아무리 마음을 추슬러 보지만 몸은 예전만 못하고 수입도 변변치 못하니 찾아 주는 사람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가끔 술 친구들과 어울려  옛날이야기를 안주 삼아 외로움을 위로하고 귀가 하지만 이마저도 돈이 없는 사람은 쉽지 않다.

몇 번에 한 번은 얻어먹은 술을 값지 않으면 왕따가 되어 친구들이 찾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일주일에 한번 교회나 성당에서 혹은 절에 가서 고독을 내려놓고 오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외로움이라는 질병에서 무료증을 치료하지 못하고 허둥댄다.

 하루 종일 전화기를 붙잡고 있어도 전화 한 통화를 해주는 사람이 없는 전화기를 들여다보지만 가끔 스팸 메일이 들어올 뿐이다.

노년의 고독 병이란 메리스 보다 더 무섭다.

메리스는 심해지면 끝장을 보지만 고독 병은 깊어지면 우울증으로 이어지거나 치매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 말하기를 줄이고 많이 들어주고,  지갑을 열어 베풀라"라고 말하지만  말하고 싶어도 말할 곳도 없고 지갑을 열만큼 돈도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가끔 자녀에게라도 잔소리를 하고 싶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내가 입을 틀어막는다. 

설혹 은퇴 자금을 어느 정도 마련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자식 집 구입하는 데 보태줄 돈을 빼면 바닥이 난 셈이다.

혹시 돈을 불려볼까 창업도 생각해보지만 그동안 창업했다는 젊은 친구들도 다 떨어 먹고 부모에게 손을 내미는  자녀들을 보면 함부로 창업할 일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어디에서도 필요하지 않은 노년 그들은 이래저래 외롭다.

그나마 찾다 찾다 찾은 곳이 시니어 파트너즈 인데 나름 꽤 만족스럽다. 수시로 교육과정을 열어 취업을 돕기도 하고 직장생활에서 얻은 지혜 노하우로 봉사의 기회도 열어 준다.

은퇴후 3년동안 여기 저기 기웃거려 보았지만 막상 마음을 내려 놓을 곳이 없었다.
어느날 시니어 파트너즈에 마음을 담구고 부터는 믿음이 생겨 시니어 리포터가 되었다.

1970-01-01 09:00 2015-08-01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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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단테 2016-03-17 14:09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은퇴 후 몇년 정도는 친구들도 전화 오고
    만나면 반갑다가 나중에는 전화 올까봐
    겁낸다는 말을 듣고
    오로지 내 삶은 내가 홀로 살아야 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블로그와 시니어 리포터가 되어
    글을 적고 있습니다.

    누가 봐주는가 읽어 주는가보다는
    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글인 듯합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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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 거의 매일 같이 불러그에 뭐라고 지껄이고 글을 쓰면서 행복해하던 사람이 꽤 한참 동안 아무 글도 쓰지 못하고 있다.

 몽골 울트라마라톤 225km 대회에 다녀온 후(2015. 7월 27~8월 3일까지) 그날부터  매일 강남에 유어스테이지 강의장에 출근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여독이 풀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간이 지나고나서는 습관처럼 고단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아침 10시에 출발해서 저녁 8시에 돌아오는 일이 생각처럼 마음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뭐 저녁에 8시면 늦은 귀가도 아니고 아침 10시에 출발하며 이른 시간도 아닌데 뭐가 글을 쓰지 못할 이유가 되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저녁 9시이고 새벽잠 깨는 시간은 새벽 4시이다.

한 30분 뒤척이다가 밖으로 나와서 근육운동을 해서 몸을 풀어주고 새벽 5시부터는 달리기 운동을 한다.

국수역에서 신원역까지 왕복 8km 그리고 2km 짜리 트랙도 2바퀴 도합 12km 달리기를 하고 나면 6시 30~7시 사이가 되고 07:부터 08:00까지 농장에서 제초작업 전지 작업등의 일을 한다.

아내가 준비해 놓은 아침을 먹고 커피를 한잔하고 나면 아침 9시 뭐 숨 돌릴 틈도 없이 가방을 메고 서울행 전철을 타기 위해 신원역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렇게 부산함을 떨어야 강남역에 12;00 ~12:30분에 도착하여 순댓국 한 그릇으로 점심을 먹고 강의장에 도착해야 13:00 지각을 면할 수 있다.

 커피 타임도 즐길 틈도 없이 공부가 시작되고 오후 6시까지는 내 시간은 없다.

 이렇게 대충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를 변명하지만 자신에게는 부끄럽다.

 잠을 아끼고 글을 쓰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그러고 싶지 않다고 자신을 합리화한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되어온 습관병인데 그 패턴을 변화 시킨다는 것은 "자신과의 약속을 포기하는 것 같아"라고 하면서 좀처럼 마음을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

환갑이 넘도록 큰 병 없이 건강하게 살아온 것이 규칙적인 운동, 깊은 잠, 아내의 건강한 식단, 덕분이라는 나름의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유어스테이지 김형래 상무님께서 책 쓰기의 관하여 강의를 해주시면서 나의 가슴 정곡을 찌른 것이다.

잠을 아껴서라도 한 권을 책을 내보라는 주문을 하시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말씀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고 나름 성공하고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지만 가슴속에는 뭔가 헛헛함이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이 책 쓰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책을 내고 싶은 생각에 쉬운 방법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뭘 어떻게 해야 책을 내지 하고 막연해하고 답답함만 가슴에 앉고 있다가 오늘 답을 얻은 것이다.

이번 기회에 책을 내는 것을 지도해주겠다고 한다.

 이 엄청난 사건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오늘이 변곡점이다.

다시 한번 힘을 내보자.


 

1970-01-01 09:00 2015-08-0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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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알면 쪽 팔릴까?
 

   문득 지난날을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들이 쉽게 갈수 있는 길을 어렵게 지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한다.

나는 바보였을까?

왜 쉬운 길, 빠른 길을 두고 어렵게 지나왔는지?

왜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었는지?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정직한 척하며 약삭빠르지 못 했거나  융통성이 부족한 까칠한 성격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까? 

직장생활할 때의 일이다. 

 1972년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벼농사와 축산을 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지만 나에게 성공의 보따리는 떨어지지 않고 고통의 짐만 점점 더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버님은 50대 초반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혼자된 어머니를 다른 사람은 과부라고 불렀다.

아버지를 잃고 호자된 엄마와 외아들이 살아가는 것은 사막에서 물을 구하는 것이 더 쉬운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살아가야 할 미래는 한치 앞을 볼수 없었다.

흑심 품은 아저씨들이 우리집 싸리문을 밀치고 들어와 친절을 가장한 음탕한 생각으로 기웃거렸다는 것은 내가 어른이 되어 노털 냄새가 날 때 쯤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럴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는 여자였다. 연약한 여자.

40대 후반의 홀 어머니가 고등과를 갖 졸업한 아들과 농사를 짓으며 가난을 헤쳐 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빚은 늘어 가고 얼굴은 60대 노인처럼 검게 그을려, 주름은 깊게 패고. 허옇게 발한 머리. 낡은 몸뻬 바지. 흙 묻은 검정 고무신 아껴 신으시면서 아들을 의지해 농사를 지었지만 집안 살림 살 이는 낳아지지 않았다.

 엄마가 남편을 잃은 슬픔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치였다. 

날 품팔이와 농사로는 4명의 자녀들 입에 풀칠하기에도 힘에 부쳤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서러움이나 외로움은 초하루 보름 상망을 지내는 날 눈물 콧물을 떨어트리며 소리내어 우는 일 뿐이었다.

엄마 그만 울어! 그런다고 아버지가 살아오시나?

 자식들이 어머니 심정을 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보다 더빨간 거짓말이다.

 고단한 몸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슬퍼할 권리마저 빼앗아 버렸다.

먹고 살수 없을 정도의 가난이란 정말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

몇 마지기의 자갈 논을 밭으로 만들어서 비닐하우스를 짓고 고추. 참외. 오이.를 심어

수확한 농산물을 십오리 넘는 비포장길을 리어카에 싣고 아들을 앞세워 양평장에 내다 팔았으나 살림은 좀처럼 낳아지지 않았다. 아들은 리어커를 가져다 놓으면 어딘가에 숨어서 있다가 저녁 때쯤 다시 나타나 남은 농산물을 싣고 돌아 왔다. 혹시 친구들이 보면 챙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뭔가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영농비에 인건비로 빚 만 늘어가고 일이 힘들어지고 소득도 별로 없으니 엄마와 다툼이 잦았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일인 것 같지만 그때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자갈논이니 벼농사 짓기도 어렵고 배운 거라고는 농업과에 나서 비닐하우스 농사뿐이다.

농작물 키우는 것만 배웠지 판로는 배우지 않았고 생산만 하면 알아서 팔리겠지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이 가난을 탈피할 수 있을까?

매일 반복되는 걱정이 한숨만 짓게 하였다.

 거의 7년쯤 지난 후 1979년 9월  ㅇㅇㅇ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다음 해에 직장에 입사했을 때

친구들은 20대 후반 임에도 부장님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중견 간부쯤 되어 있었다.

처음 입사 하여 일도 어설픈데 맨 밑바닥 졸병이니 스스로 알아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농고 출신이니 주산과 부기 실력이 떨어지고 업무가 서투르니 잡무나 허드렛일이나 잔심부름은 알아서 하면서 직을 유지해야 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서도 윗분의 담배 재떨이 수시로 비우고 항상 깨끗하게 닦아놓아놓고 화장실 청소라든가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자진해서 하는 것을 즐겁게 생각 했다.

윗분의 책상 서랍 담배가 부족하지 않도록 채워 놓는 일도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않게 잘 하고 있었다.

책임자 좌석은 뒤에 배치되어 있었고 그는 애주가이며 애연가였다.

심심하면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성냥을 부치라는 명령도 서슴지 않았다.

연기를 피우면서 담배를 이빨로 질근 질근 씹어 이빨 자욱이 난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서 잘 꺼지지 않으면 침을 뱉어 끄기도 했다.   

열 받는 일이 생기면 담배가 꽁초가 되기도 전에 다시 담배를 붙여 줄담배를 피우면서 내 쪽에 대고 "후"하고 담배연기한숨을 쉬어 대고는 했다.

싫은 내색을 하는 것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좋아하는 듯 미소로 대신  했다. 

 오히려 출장이라도 다녀오는 길이면 고급 라이터를 선물해야 했다.

시시한  싸구려 티가 나는 라이터를 선물하면 다른 사람에게 주면서 면전에서 면박을 주기도 했다.

이걸 라이터라고 사 왔냐?

출퇴근 도 제일 먼저 출근해서 제일 늦게 퇴근해야 했다.

일요일 당직은 거의 도맡아 해야 했다.

대직을 하고도 당직 일지에는 책임자분 이름을 기재해야 했으니 당직비 한 푼도 받지 못 했다.

가끔 다방 마담 앞에서 생색내며 커피 한잔 사주는 것으로 "퉁 "치는 것이다.

점심시간에 밥 먹으러 가는 것조차도 윗분들이 다녀온 다음에 다녀올 수 있었다. 

어쩌다 함께 가는 날에는 같은 좌석에서 윗분이 먹기 시작하면 먹어야 했고 맛있는 반찬에는 함부로 수저를 넣을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난후에는 "10분 좋다"하면서 고스톱을 했는데  내가 이기면 "있어"라고 말하며 외상을 하고 그가 이기면 "외상 사절이야 "라고 하면서 내 돈을 빼앗아 갔으니 함께 가자고 하는 것이 더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직책은 반드시 위아래가 있었다.

그 당시 윗분들의 갑질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윗분과 학교 동창임에도 동창회 모임에 가면  존재감이 없이 구석에서 앉아서 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자리를 피해 집으로 오고는 했다.

혹시 그따위 자식을 가만 놔두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배가 고파보지 않은 사람이다.

그보다 훨씬 더한 일이 있음에도, 글로 옮기기 조차 힘든 수모를 겪고도, 가슴에 앉고 지금 까지 살아 왔다.

모두 다  떠나고 단 한명이 살아 남아야 한다면 내가 살아남겠다는 각오로 다녔다.

 그렇게 33년 직장 생활을 명예롭게 마감했다.

1970-01-01 09:00 2015-05-30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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