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에세이. 제1권)

 

공유하고자 펴는 글(삶의 파편들)

 

 

양심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우직하게 행동으로 옮겨 온 날들을 더듬어 펼치는 글이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의 고통을 위로한다.

 

필자가 걸어온 '삶의 파편들'이  ‘맞거나 틀리거나’, 그의 삶이 「옳았거나 글럿거나 통념에 개의치 않는다」그냥 읽고 느끼는 대로 비판해 주길 바란다.

 쓰고 편집한 이 : 바다. 박준하(朴俊河  BAK,JUNHA)

                                                                 

                               대한민국 남쪽 바다                               
                            
                                                 민영화저지 특위 활동 사진 

 

 다섯 살 꼬마 태풍에 맞서다(붕어빵의 유혹이 태풍을 이기다)

다섯 무렵의 잊을 수 없는 기억 : 섬에 심한 태풍이 몰아쳤다. “위험하니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그의 가족이 신신 당부하며, 10원짜리인가를 손에 쥐어주며 얼려 놓았다. 그리고 가족들은 태풍 대비 작업을 하고자 밖에서 일하고 있을 때 꼬마는 몰래 집에서 나왔다. 동리 앞 신작로 가에 빵집에서 붕어빵을 사먹기 위함이었다. 논밭 길 지나 개울의 돌다리(2m)를 지나 붕어빵 집, 손에 지폐를 하나 쥐고, 실오라기 걸친 게 없는 맨몸, 비바람에 의해 걸을 수 없다. 몸이 날린다. 엎드렸다. 엎드려서 포복 자세로 기어갔다, 그는 군대 이전에 이미 유소년기 시절 자연스럽게 포복 전진을 터득한 것이다.
 
1970-01-01 09:00 2013-11-01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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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째 공무원노동자가 쓰는

 

내 인생의 조각들

 

 

『바보의 몫』 <3-1, 3-2, 3-3>

 

 

 

2009년 5월 2일 박준하

(부천시청 근무시절 내부 자유게시판에 게시했던 글임)

 

 

愚公移山

 

누가 산을 옮길 것인가?

누가 마음의 밭을 갈고 엎을 것인가

누가 이 시대의 그늘을 벗겨낼 것인가?

 

 

[내 인생의 조각 2] = 『바보의 몫 <3-1>』

 

 

반갑습니다. 오늘은 "나의 지난 근무시절(소사구 보건소)의 한 부분"에 대해서 『바보의 몫』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나누겠습니다. 2002년 6월 보건소 근무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공유하고자 게재합니다.

가만히 회고해 보면 투-스타(★★ 보건 소장 별칭)의 도움도 많이 받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의 인생과정에 있어서 재정리, 정비하도록 도와주시고 그 결과 이러한 자료를 남도록 도와주신 나의 고마운 투-스타이기도 합니다. 2008년에 정년퇴직을 하셨지요.

 

 

 

[출제문제(내부 전산망 인터넷 편지)]

 

 

제목 : 벌써.....

 

 

2002년도 흘러 흘러 벌써 6월 20일.

1년짜리 적금을 1월에 시작한 사람은 반만 더 노력하면 탈 목돈을 어디에다 쓸까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을 것이고......

생각만 했던 사람은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혹시 육개월 짜리가 있을지도 몰라 하면서 꿈을 깨지 않고 있을 것이고,

 

문제 벌써 나갔습니다.

 

귀하는 어떤 편입니까?

일이나, 생활이나, 기타 귀하의 일상에 대한 신변잡기를 이야기해보세요?

 

제목의 답을 쓰세요?

주, 객관식은 귀하의 실력임.

백지도 되나 보내기는 해야 됨. 그래야 점수를 주지.

점수는 백지는100점,

객관식은 + 약간.

주관식은 글자 수 만큼임.

 

 

기간은 언제까지냐고요?

라면은 물이 끓은 후에 면을 넣고 조금 더 끓인 후 먹지요?

밥은 끊은 후 뜸을 들인 후 먹지요? 그것이 정상적인 방법입니다만

자기 방식대로입니다.

빨리 보내셔도 되고 늦게 보내셔도?

늦으면 신경 쓰이는 것은 당신이니까요?

 

- 2002.06.20. 소장-

 

 

* 참고 : 이 글은 보건소 소장이 근평을 하기 위해 나에게 보낸 글이었어요. 쉽게 말하여, 보건소장이 근무평가 받을 자료나 근거(= 적금)를 좀 제시해 달라는 의미였겠지요.

나는 2000년 3월부터 ‘공무원직장협의회 설립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2001년 3월에 성공회대 사회교육원 노동대학 과정에 수강신청자였고, 2002년 3월에는 전국공무원노동조합(법외노조)을 발족시킨 일원(대의원 겸 운영위원)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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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제문제에 대한 응수]

 

투-스타(*소장을 호칭함)님!

"말을 함은 하지 않음만 못하다고 믿고 있지요. 감정의 표현도 마찬가지라는 견해이지요. 이는 '평야와 같아서 들과 산과 계곡이 없음과 같으니 자연에서 멀다'라고 2002.06.24일 느끼고 있답니다." 하여 답장을 3회에 걸쳐 보내고자 생각했지요. <3-1>을 쏘겠답니다.

 

 

[*뒷풀이] " 觀海難水 "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장이신 신교수께서 제게 주신 서예글이랍니다. 노동대학에 결근을 안했던 격려인 셈이었지요.) - 박준하-

 

 

혹자는,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렵다. 또는 물을 두려워한다." 라고 해석하지만,

 

'바다를 본 사람은 물에 대하여 말하기를 어려워하고, 조심스러워한다.'는 의미가 보다 본뜻에 합당하다는 설명이 있었지요.

세상(사물)을 정확히 보기가 어렵고 조심스럽다는 뜻일 겝니다.

 

노자도덕경은 "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으로 시작되어

" 天之道利而不害 하늘의 도는 날카로워도 해치지 않고

聖人之道爲而不爭 성인의 도는 하고서도 다투지 않네."로 맺고 있지요.

 

(마침 '노자강의'가 시작되어 첨부합니다)

 

 

 ‘노자'는 귀(歸)의 사상이다 (생략)

신영복 고전강독 <81 제2 시작> 제8강 노자(老子)-1 2002-06-21 오전 9:06:15

-보낸이 : 2002. 6. 25. 박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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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조각 2] = 『바보의 몫 <3-2>』

< 3-1>에 이어 <3-2>를 연타합니다.

 

투-스타님! 사랑합니다.

사람은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함께 수행해 나가야 할 때,

두 가지 모두 다 완전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일반론일 겝니다. 친구 중에 요즘 성공회대 '노동대학 3학기(제5기) 과정 중이며, 한국방송통신대 평생대학원 행정학과 1학기 재학 중이지요. 행정체제의 병리현상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처방하기 위한 正見을 위한 수업이지요.

 

和而不同(선입견과 부화뇌동의 배제, 和는 공존과 다양성의 수용 논리라면 同은 획일적 흡수, 합병의 지배논리)하며, 다양한 행정행위 속에서 검증과 확신과 신뢰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하는 부분입니다. 현실 지배자들이 터부시하는 분야일 수도 있습니다.

 

[**참고: 성공회대학교 시민사회교육원 노동대학은 2000년 3월 제1기(처음시작), 2000년 9월 제2기, 2001년 3월 제3기, 2001년 9월 제 4기, 2002년 3월 제5기이며, 9월이면 제6기가 됩니다.

 

시작의 기수와 상관없이 4기(2년)를 마치면 졸업을 하게 됩니다. 물론 학위는 수여되지 않습니다. 다만, 성공회대학 및 대학원에 편입 시에는 학점을 인정하여 준답니다.]

 

그 친구는 '부천시청공직협' 발족을 주도했고,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회(공무원노조의 앞 단계)'를 발족시킨 일원이지요. 무엇인가를 뚜렷이 정립하여야 할 것으로 판단했답니다. 대중(무리, 떼)을 뚜렷한 방향과 확신이 없이 이끌어 갈 수는 없지요. 무책임한 행위입니다.

 

설령 리더로서 앞장서지 않더라도 활동가들과 노조원들에게 조언하고 전문가적 입지에서 '비판'할 수 있는 관점으로 오류에 빠지는 것은 피하게 해야 할 당위성이 상존하고 있지요. 지배자의 논리에 무조건 반대하거나, 자신까지도 스스로 정확하게 모른(無知) 상태에서 사용화 및 어용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 순기능을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회학도의 책무이자 공직자의 바른 자세이며 길이라 여기지요.

 

밥벌이와 승진의 각축장으로 보이는 현실의 직장은 저 말고도 인센티브에 강한 동료들이 너무 많지요. 물론 목돈타면 보다 효과적으로 스트레스가 덜한 상태에서 소기의 목적 달성이 쉽지요.

 

vie(경쟁)엔 밀려도 문제없다고 판단했고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제 집사람에겐 미움의 반역행위에 들지만... 저로서는 그게 사회에 대한 제 자신의 삶의 몫 이라 여깁니다. 사회는 그렇게 발전했음을 역사를 통해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

 

그 역사가 짧은 공무원 사회의 "노동운동의 방향과 노동조합의 운영" 은 그 어떠한 행정활동보다 중요한 포지션(영향력)을 차지하게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선진국으로의 도약에 역사적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여봅니다.

 

소수 정치인 및 공무원의 부정부패, 부조리행태가 전체 공직자를 매도하는 현실을 극복하고 한국사회의 발전을 이루기 위한 매개체로 "공무원노조" 및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과 기능에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졸업(노동대학 4개 학기 수료)에 가까워진 이제야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 신영복 원장”의 특강 중 ‘인텔리 노동계급 , 연대의 중요성’ 등의 의미가 어렴풋이 다가옵니다.

 

잘 아시다시피,

사회과학은 사회적 병리현상을 진단하고 치유방법을 모색하는 학문이고, 행정학(노동문제, 공무원노동운동 포함)은 그 일부분이지요.

교육이란 잊은 것을 환기하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지요...

 

맹자(孟子)에 보면 또 하나 있지요.

'인간의 병통은 남의 스승노릇을 좋아 하는데 있다'

이 글을 쓴 내 자신이 孟前文을 피해갈 수 있길 바랍니다.

 

[뒷풀이] * "쉬지 말고 기도하고 매사에 항상 감사하라"는 말씀을 알고 계시지요...

' 항상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미션계통의 중, 고교를 졸업했고, 관동대학 또한 미션계통이어서 성서를 기본교양과목으로 공부하고 1981년도에 기독교침례교회 강릉교회에서 약 1년 남짓의 신앙생활 후 ‘침례’를 받았고, 대학 4년 동안 CCC라는 '대학선교활동‘을 했습니다.)

 

*노동대학은 본 강의 보다 '뒷 풀이'를 더 중시한답니다.

그 이유는 토론을 통한 진실한 통합의견, 인간적 교류 및 연대강화에 있다고 보입니다.

..................................................

 

[뒷풀이 첨부]

 

“졸업이 다가와서야 특강의 의미를 어렴풋이.....”

 

저는 반추를 좋아합니다. 한편으로는, 단순화의 작업입니다.

 

1. 근로인텔리(주체적 역량에 관한 논의,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역량은 운동의 2대 축)

 

2. 연대(連帶) “진리는 참여이며 조직이다.” '조직함'이 곧 '참여함'이며, 참여함으로써 이론과 진리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3. 연대의 필요와 이유

1) 첫째, 역량이 취약하기 때문.

연대는 아픔에 다가가서 그것을 공유한다는 의미. 연대의 원칙은 낮은 곳에로. 물처럼.

 

2) 두 번째, ‘과정과 목표의 통일’, ‘도로’와 ‘길’ 에 대한 반성(진선진미 盡善盡美).

자본주의체제는 효율, 속도, 성과, 승리를 위하여 바로 인간관계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

 

3) 세 번째, 수탈이 자행되는 곳이 노동현장만이 아니라는 사실.

세상의 도처에 불평등 현상, 부등가 교환의 상품사회인 자본주의의 착취가 자행되고 있음.

 

4) 네 번째의 연대이유는 ‘和’와 ‘同’에 대한 반성.

和는 공존과 다양성의 수용 논리라면 同은 획일적 흡수, 합병의 지배논리.

 

 

4. 조직 내부의 연대

운동진영 내부의 동지적 유대의 문제(인간적 신뢰문제). 인간성으로 평가가 더 정확.

마주하고 있는 해방의 과제는 장기성(長期性) 위에 간고성(艱苦性) 굴곡성(屈曲性).

 

양심이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이며 이해하고 도우려는 마음. 양심은 기본적으로 관계론. 동지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 인간성을 주목하는 잣대라야 하고, 동지들에 대한 신뢰 역시 그의 인간적 면모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주변부의 노동자들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바로 연대의 정신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주변부의 노동자들을 망라하고 연대할 수 있는 조직방식과 사업방식 그리고 투쟁방식을 개발해 내어야 하는 것이 모든 근로인텔리(노동운동가)의 과제임을 어렴풋이 깨닫고 졸업을 하는가 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인간적 상처를 주면서까지 해야 할 가치가 세상에는 없다는 사실. 개인적으로도 인간에 대한 절망을 느끼면서까지 그 길에 서 있을 사람은 없다.’는 것을 유념하여 운동에 임하라는 당부로 받습니다.

 

연대는 역량이 취약한 경우의 방법론이며, 그 자체가 목표이며, 연대는 다양성을 수용하는 공존과 화평의 틀이다. 그리고 연대는 사람과의 사업이며 바로 삶의 내용이라는 것.(2001. 3. 5일 민주시민사회대학원장님 글. 전체 글은 노동대 자료실 참고 바랍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내적 변혁을 위한 성찰과 정진으로부터 얻은 것만큼만 사회운동에 쏟아 부을 수 있을 뿐이다.* “신발 속의 모래“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어 봅시다.' 항상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 2002. 11. 29일 졸업생 대표 박준하>

 

(마침 '노자강의'가 계속되고 있어 첨부합니다)

󰡒有와 無는 이름이 있고 없음의 차이일 뿐󰡓

신영복 고전강독 <86> 제8강 노자(老子)-6 2002-07-04 오전 9:10:18 (생략)

 

-보낸이 : 2002. 7. 5. 박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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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조각 2] = 『바보의 몫 <3-3>』

<3-2>에 이어 <3-3>도 응수 발사합니다.

 

투-스타님!

답, 이미 드렸습니다.

무책임한 행위는 무작위(*부작위가 아님)의 존재만 못하겠고, 무작위의 존재는 관계만 못하다는 게지요.

공직생활 28년 된 적금의 중간이자를 타면 좋지요. 능률화 되고...

 

'마도로스 박'의 적금은

팔정도 (正見. 語. 業. 命. 念. 定. 思惟. 精進)가 기준이 될 겝니다.

<span lang="EN-US" style="font-size: 12pt; font-family: HY견명조; mso-hansi-font-family: HY견명조; mso-farea</body></html>

1970-01-01 09:00 2013-10-13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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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의 문화와 길의 문화

4년이면 대단히 긴 세월이라고 생각합니까? 굳이 경쟁과 속도에 관한 이야기를 이곳에서 재론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저로서는 여러분들이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역이야기입니다만 주역 64괘의 제일 마지막 64번째 괘가 '화수미제(火水未濟)'괘입니다. 미완성을 뜻하는 괘입니다. 제가 한두 번 읽을 때 까진 몰랐어요. 마지막 괘가 미완성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어요.

 

효사(爻辭)는 이렇습니다. "어린 여우가 강을 거의 다 건넜는데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별로 이로울 바가 없다." 작은 실수로 끝이 납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작은 실수'입니다. 꼬리를 물에 적시는 정도니까 큰 실수는 물론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나도 늘 그러더라, 끝판에 조심해야지. 끝판에 실수 안 하도록 속도를 늦추면서 조심해야지 하는 경구로 이 구절을 읽었지요. 여러분도 그런 경우가 없지 않지요? 막판에 가서 코 빠뜨리는 경우 많잖아요. 괜히 끝에 가서 빨리 끝내려고 서두르거나 다됐다고 방심하다가 실수하지요. 지금도 막판에 가면 일부러 호흡을 좀 느리게 하고 속도를 더 줄여서 꼬리 안 적셔야지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러나 사실은 실수를 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결정적인 실수를 하면 안 되겠지만 '작은 실수'는 반성을 하게 합니다. 실수는 이전의 과정을 돌이켜보게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겁니다. 주역의 제일 마지막에 미완성을 배치한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운동은 반성과 시작, 이것의 반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만물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변화합니까?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운동입니까? 미완성 그 다음에 이어지는 또 다른 미완성의 연속이라는 것이 주역의 철학이고 동양적 사고의 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남는 것은 과정(過程)만 남습니다. 달성(達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과정 그 자체가 의미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클활동이든, 학생운동이든 모든 것은 과정 그 자체가 예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4년도, 과정 그 자체가 의미 있어야 돼요. 빨리 도달하려는 속도와 도로(道路)의 문화, 이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이 속도와 경쟁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자본의 회전속도와 이노베이션(Innovation)과 특별잉여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위에 다시 작은 톱니바퀴의 회전속도가 플러스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자본논리에 맞서 인간논리를 지키는 일은 도로의 문화 대신에 '길의 문화' 길의 정서를 키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그 속성상 제로(0)가 되는 것이 자기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것입니다. 짧을수록 좋은 것이 도로입니다. 고속일수록 좋은 것이 도로입니다. 오로지 목적지에 이르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길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코스모스를 만나고 또 자기를 남기는 이를테면 삶 그 자체입니다. 성장과 속도의 패러다임 속에서 길의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가치 없는 것, 쓸데없는 것을 공부하고 그것도 천천히 해야 한다고 하는 제 이야기가 여러분들에게 참 비현실적인 얘기로 들릴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안 팔리는 것을 공부하고, 그나마 천천히 하고, 실수하는 것 그 자체에서 의미를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저는 그것이 삶이라고 생각해요.

 

 

자본의 논리로부터의 자유

교도소에서 본 영화이야기입니다. 영남대 벚꽃 참 좋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옛날 영화에서는 세월이 지나간 것을 보여줄 때 우선 꽃이 가득히 피어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눈이 내리면서 꽃이 지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것을 두 번쯤 보여준 다음 '십년 후'라는 자막이 화면 가득히 나오는 식이지요. '십년 후'라는 자막이 나올 때 재소자들은 대개 한숨을 확 내쉬어요. 한숨의 의미는 내 징역도 저렇게 영화 속에서처럼 빨리 갔으면 하는 거지요. 그래서 한 녀석을 붙잡고 물었어요. 너 내일아침이 십년 후가 되면 좋겠느냐고요.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질문이지요.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즉 지금 너의 나이가 서른다섯이니까 내일 아침에 마흔다섯 살이 되어 출소하는 것이라도 괜찮겠느냐고 물었어요. 얼른 대답을 못했어요. 좀 생각해봐야 되겠대요. 그 십년이란, 행복한 10년도 아니죠. 콩밥에, 춥고 배고픈 10년이지요. 어딜 가지도, 누굴 만나지도 못하는 그런 10년이지만 그래도 선뜻 버리고 싶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관하여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대학 4년을 수단화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대학생활 동안에 생각해야 할 것은 참 많습니다. 무엇을 위한 성장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우리사회에 만연한 콤플렉스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고 작은 톱니바퀴의 종속구조를 생각해야 하고,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여러분들은 대학공간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이 대학에 어떤 학과가 있는지 몰라서 특정학과를 얘기하기가 좀 미안하지만, 없어도 될 학과가 대학에 많이 들어와 있어요. 다른 교육기관에서 2년만 교육하면 될 것을 대학에 넣어서 4년간 교육시키는 것. 이것은 함량미달에다 과대포장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함량미달 상품에 대해서는 욕하고 있지요. 포장만 크게 했다고 불평이지요. 소에게는 물 먹여서 근수 많이 나가게 한다고 욕하면서, 대학은 2년만 가르치면 될 것을 4년씩 등록시켜 돈 받지요. 그것도 미리 현금으로 받고 있지요. 제품이 판매되거나 안 되거나 책임도 안지지요.

 

 

대학이 신분상승의 가교도 못되면서 자본논리의 지배하에 놓이는 데 그치지 않고 도리어 자본논리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봐야 하겠지요. 여러분들의 대학현실이 무척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여러분들의 인생에 있어서 최후의 수평공간입니다. 수평, 이것이 얼마나 편한 것인가 아마 여러분은 실감이 없을 것입니다. 대학을 나서자마자 수직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대학에서 여러분들은 돈 내고 다니잖아요. 앞으로 취직해서 돈 받고 한번 다녀 봐요, 얼마나 힘든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내고 다니는 것과 돈 받고 다니는 게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아직 모르죠?

 

대학은 최후의 수평공간입니다. 쓸데없는 것, 가치 없는 것들, 더 정확하게 교환가치가 없는 것, 상품가격이 없는 것들을 할 수 있는 기간, 그런 기간이 저는 대학이라고 생각하죠. 수평공간이면서 자유의 공간입니다. 자기(自己)의 이유(理由)가 자유(自由)라고 생각해요. 자기의 이유를 갖는 것이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유로 자기가 움직이는 것, 그것은 자기가 동의했건, 또는 충분히 공감을 하건 그건 부자유한 거라고 생각해요.

 

대학의 교육도 마찬가지로 현실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띄우고 근본적인 것에 생각을 모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자본의 논리로부터 독립하는 시간과 공간을 대학이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지요. 자기의 이유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이것은 일차적으로 지배담론으로 군림하고 있는 자본논리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이며 그러한 자본논리를 바꾸는 실천적 ?!--" (끝)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1970-01-01 09:00 2013-10-13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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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과 상품가치

지금까지 제가 겪었던 <나의 대학시절>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존재론적인 패러다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과 의식을 뛰어넘는 대안적 관점으로서 '관계론적 패러다임'에 대하여 함께 모색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대학생인 여러분과 오늘 이 시간에 나누고 싶은 것은 '가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대학공간이나 사회적 공간이 안고 있는 숱한 문제의 배후이면서 핵심이 바로 이 가치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잘 팔리는 학문, 돈 되는 학과에 학생들이 몰리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대학이란 것은 여러분들이 지금 몸소 겪고 있는 것이지만, 원래 대학이라는 것은 중세 아카데미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봉건 영주들이나 교회 영주들이 자기들의 지배적인 지위를 세습화하기 위한 자녀들의 교육기관입니다. 일종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생산과 재생산이 목적이었고 이것이 신분세습 공간이 되기도 했어요. 오늘날은 대학은 이미 신분세습, 신분상승의 가교는 아니라고 봐야 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사회의 지배담론과 지배이데올로기를 샤워하기 위한 기관이 아닌가 생각해요. 영남대학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희대학도 마찬가지이고 제가 아는 대학들에서는 한결같이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상당한 혼란이 있는 것을 느껴요. 가치란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 함께 한번 따져봅시다.

 

 

'가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에 로빈슨 크루소가 절해고도에서 굉장히 큰 진주를 발견했다면 그 가치가 얼마나 돼요? 가치 없습니다. 가치란 기본적으로 교환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환을 전제로 해야지만 가치란 개념이 있을 수 있는 거죠. 오늘날 가치란 말이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원래 가치라는 것은 교환가치입니다. 제가 젊은 사람들에게 제일 불만인 것이 사람을 볼 줄 모른다는 겁니다. 결혼상대를 찾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대개 어떻게 보느냐 하면 제일 한심한 예를 드는 게 미안하기는 한데요. 저 여자는 결혼식장에서 신부 입장할 때 쪽팔리게 생겼다는 거예요. 신부 입장할 때의 그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이보다는 덜한 경우이지만 이다음에 부부동반해서 나들이 할 때에 그래도 좀 근사하게 보여야지.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드니까 우스운 이야기같이 여겨지지만 이런 관점이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 저런 미인을 아내로 가진 남자는 얼마나 능력이 있을까? 이렇게 보는 세상이지요.

 

정치경제학 개념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남자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그 아내와의 교환가치로써 그 남자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용가치라는 규정이 다소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성, 인격이라고 해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아내의 미모를 통하여 그 남편을 평가한다는 것은 남편을 사용가치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교환할 것도 아니면서 그를 교환가치로 보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런 멋진 남편이랑 사는 여자는, 근사하겠구나! 근사하지 못하면 머리가 굉장히 좋거나, 아니면 친정집이 되게 부자이거나. . . . 그런 식으로 스스로의 고유한 가치는 없고 타자를 통해서 자기가치를 드러내고 있지요. 자녀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까? 서울대 무슨 어려운 학과에 다니는 아들을 자주 거론하는 엄마는, 자식을 교환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요. 가치의 본질 자체가 그런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가치는 현실적으로 시장가격으로 나타납니다. 대학에서 우리가 찾는 가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역시 교환가치이고 시장가격이라고 봐요. 자본주의 사회가 전면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그런 가치입니다. 그래서 저는 적어도 대학에서는 바로 이런 가치, 더 구체적으로는 시장가격으로부터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대학이 이데올로기의 재생산현장에 그치지 않고 변혁의 현장이라면 그렇습니다. 가치 없는 것, 쓸데없는 것을 공부해야 된다고 봐요. '잘 팔리는 것을 연구한다'는 그 자체가 대학고유의 가치가 없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잘 팔린다'는 것은 가격이 있다는 것이고, 이를테면 상품가치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입니다. 자본의 논리라는 지배담론을 거부할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대학의 어떤 고유한 영역을 우리가 지키는 일, 이것이 오늘의 대학이 짐 져야 하는 시대적 과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대학 4년 동안은 자본논리 대신에 인간적 논리, 인문학적 논리를 자기 내면적인 것으로 지킬 수는 없을까? 정책과학 응용과학 일변도의 풍토 속에서 대학 4년만이라도 인간적 공간으로 남겨 둘 수는 없는가? 이러한 고민은 크게는 존재론적 지배담론을 변혁하는 논리이면서 작게는 인간적 사회를 지켜가려는 최소한의 인간논리입니다.

 

1970-01-01 09:00 2013-10-13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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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하는 생각

교도소에는 종교집회가 있습니다. 기독교집회, 천주교집회, 불교집회 등 종교집회가 있습니다. 종교집회에는 각 공장마다 명단에 있는 해당 신자만 참석이 허락되죠. 예배와 찬송 그리고 설교가 끝나면 위문품으로 가지고 온 떡도 하나씩 나누어주지요. 종교집회가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어느 교회에서 떡 가지고 위문 온다는 정보가 쫙 돌아요. 그런데 어느 종파교회를 막론하고 모든 떡 있는 교회는 다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을 '떡 신자'라고 그러기도 하고 '기천불 종합신자'라고도 하는데 제가 '떡 신자'였어요. 사실 떡 신자 되기도 어렵지요. 예를 들면 기독교집회에는 명단에 있는 기독교인만 참가가 허락되기 때문이죠. 저는 명단에 없습니다. 종교가 없으니까. 교도관이 그래요. 신선생은 기독교인도 아니면서 왜 가려고 하느냐고 허가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제가 단골메뉴로 사용하는 핑계는 이런 겁니다. 저는 무기징역이어서 아무래도 종교를 하나 가져야 되지 않겠는가? 이런 집회 저런 집회 부지런히 다녀보려고 그런다는 거지요. 대개는 보내줘요. 종교교회가 있는 날이면 이런 저런 시비가 일어나지요. 교도관이 '너는 천주교신자면서 왜 기독교집회에 갈라 그래?'하면서 허가하지 않으면 대는 이유가 가관인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요즘 천주교에 대해서 회의가 좀 생겨서요.' '신선생은 보내주면서 왜 나는 안 보내주냐!'는 이유를 대는 녀석도 있어요. 그래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 교회에 와보면 각 공장에서 나온 떡신자들을 만나게 되지요. 아마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어느 떡신자가 나왔나하는 것인지도 몰라요. 어쨌든 얼마나 반가운지, 서로 윙크하고 V싸인도 해 보이죠. 그러다가 기독교 회장한테 꾸지람을 듣기도 하지요. 교인도 아닌 떡신자들이 예배분위기 다 망친다는 것이지요. 사실 떡신자는 예배에는 마음이 없고 떡에만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떡신자들끼리 나누는 이야기 역시 여기 위문 온 여자신도들 중에서 자기는 무슨 색깔의 옷을 입은 여자가 그래도 제일 예쁘다고 생각한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옆에 쌓아둔 박스의 개수로 볼 때 떡이 대충 몇 봉지이겠는지, 현재 인원수로 계산해볼 때 늦게 받으면 두 개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나누는 것이 다반사지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떡신자라는 관계가 매우 아름답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떡신자들끼리는 다른 곳에서 만나도 참 반가워요, 같이 타락한 사람들끼리의 관계 같기도 하고 서로의 치부를 알고 있는 관계 같기도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저는 그런 관계가 참 멋진 관계라고 생각을 해요. 사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떡신자끼리의 관계란 아무것도 아니지요. 이념적인 관계도 아니고 무슨 높은 가치를 위해서 함께 싸우는 동지적인 관계도 아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때 묻고 지저분한 관계인데도 바로 그런 인간적인, 때 묻어 있는 정서의 교감 같은 것이 삭막한 교도소를 견디게 해줬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저는 사람과의 관계, 이것이 오늘날 80년대, 90년대 학생운동의 경향성에서도 많이 지적된 것이지만, 인간관계는 일차적으로 정서에 호소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사상은 쿨 헤드(Cool Head)가 아니라 웜 하트(Warm hearts)라고 생각해요.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반성해 보라." 그렇게 미련한 표현을 우리 조상들이 해왔다고 그랬었어요. 학교 다닐 때. 인간의 사고가 가슴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머리에서 두뇌에서 이루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정확하게, 과학적인 표현을 하자면 두 손을 머리에 얹고 조용히 생각해보라고 해야 맞습니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생각하라니. 그러나 지금은 저는 가슴이 생각하는 게 맞다고 봐요. 생각은 머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한다고 생각하지요. 제가 신사복도 만들 수 있고, 양화공 반장도 오래했어요. 목수도 도끼목수 정도는 되구요. 그런데 정말 일 잘하는 사람들을 보면 손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마음으로 해요. 왜냐하면 잘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지요. 지나다가 뭔가 삐뚤어진 게 있으면 바로 만들어 놓고 갑니다. 그냥 놔두면 자기가 불편해서 바로 해요. 그래서 저는 사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에, 이것은 내가 해야 하기 때문에, 또는 사명이기 때문이라는 이성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성적 인 것이라기보다는 하지 않으면 자기가 불편한, 양심의 가책이 되는 그런 정서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상은 웜 하트라고 생각해요. '건축'이라는 단어, 이 단어를 읽거나 생각할 때 사람마다 떠올리는 상념이 다릅니다. 아파트 분양권 생각하는 사람, 아니면 아파트 생각하는 사람, 또 더 나아가서 포크레인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파트 분양권을 생각하는 사람과 손때 묻은 망치를 떠올리는 사람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더구나 함께 술 먹었던 목수친구를 생각하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민족'이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자기 머릿속에 떠올리는 연상세계가 사람마다 엄청나게 달라요. `88올림픽 생각하는 사람, 3.1 만세운동 생각하는 사람, 충무공을 생각하는 사람, 장승을 생각하는 사람, 별 사람 다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의 사상은 그가 주장하는 논리 이전에 그 사람의 연상세계, 그 사람의 가슴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연상세계를 그 단어와 함께 가지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봐요.

1970-01-01 09:00 2013-10-13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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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글씨의 관계론

저는 붓글씨를 쓸 때마다 그런 관계론을 느껴요. 획을 하나 쓱 그었어요. 그었는데 아차 잘못 그었어요. 좀 비뚤어지게 그었어요. 어쨌든 쓰다보면 비뚤어지지 않을 수 없어요, 그 때부터는 비상사태에 들어갑니다. 다시 지우고 쓸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수습하는가 하면 그 다음 획으로 비뚤어진 획을 어떻게든 커버해야 돼요. 반대쪽으로 더 많이 자빠뜨린다거나, 잘못해서 획이 굵어져버렸다면 이걸 커버하기 위해서 다른 획을 좀 더 가늘게 쓴다거나, 윗글자가 좀 잘못됐다면 그 다음 글자로써 그 잘못된 것을 도와서 어떻게든 커버해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한 줄(行)이 비뚤어지면 그 옆에 있는 줄(行)로 바로 잡아야 돼요. 그러니까 글씨를 쓸 때는 굉장한 긴장도가 요구돼요. 저는 두 시간 이상 계속해서 글씨를 못 써요. 글씨를 조용히 평정한 마음으로 쓴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제 경우는 굉장히 바쁘고 긴장됩니다. 쓰면서 하나하나의 획을 보랴, 옆의 글자 보랴, 이 줄 보랴, 저 줄 보랴, 여기 쓰면서 저 위의 것 보랴 여간 긴장되고 바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결국 흑과 백의 조화도 봐야 되거든요.

 

 

글씨를 쓸 때 제일 중요한 게 [흑과 백의 조화]입니다. 어느 정도 크기의 종이에 어느 정도의 먹이 들어갔는가 그리고 여백과 글씨의 관계는 어떤가 이러한 것이 서도에서 가장 중요하거든요. 저는 글씨를 쓸 때 까만 것을 보기보다는 하얀 것이 얼마나 남았나를 보면서 써요. 까만 것은 숙달되면 붓을 자기마음대로 운필이 가능하니까 안 봐도 돼요. 하얀 것만 보고 써요. 한 자 한 자의 개별적인 것을 단위로 하여 쓴다기보다 줄곧 다른 것과의 관계를 고민하면서 쓰는 셈이지요. 다 쓴 다음에는 마지막에 방서를 쓰죠. 몇 월 며칟날 무슨 글씨를 어디서 썼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빨간 낙관도 찍습니다. 이 방서와 낙관마저도 전체 균형에 참여하고 있는 글씨를 서도에서 격이 높은 글씨라고 봅니다. 명필들이 쓴 어수룩한 글씨를 보고 저렇게 어수룩한 글씨가 무슨 명필인가 하고 의아해 하기도 하지만 획과 획과의 관계를 고민하면서 그렇게 맞추어내기 위해서 그런 모양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글씨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한자 한자가 반듯하고 질서정연하게 써 내려간 것이 아주 보기 좋다고 하지요. 대개는 해서나 한글 궁체라든가, 고체로 쓴 글씨들이 그렇습니다. 또박또박 옆 글자에게 신세질 것도 신세 받을 것도 하나 없이 한 자 한 자가 독립해 있는, 그래서 '시민적 질서'(市民的 秩序)가 잘 지켜지고 있는 글씨를 잘 쓴 글씨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글씨로 치지 않습니다. 혹평하기를 사자관(寫字官)글씨라고 하지요. 베끼는 글씨지요.

 

 

서도의 높은 경지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파격인데도 멋지게 살려내고 균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이루어지는 겁니다. 엉뚱한 곳에 점이 하나 있는데 그 점을 가리니까 글씨 전체가 확 무너지는 것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서도는 다른 예술장르와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그 글씨와 사람의 관계입니다. 사람이 나쁘고도 글씨가 훌륭할 수 없는 것이 서도입니다. 그래서 서도의 정신과 서도의 미학은 글자와 글자, 획과 획, 흑과 백, 작품과 사람의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느끼는 서도의 관계론입니다.

1970-01-01 09:00 2013-10-13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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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바야흐로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논의가 무성합니다. 숱한 논의를 크게 간추려 보면 2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21세기에 대한 전망이고 또 하나는 21세기에 대한 소망입니다. 전망과 소망은 판이한 것입니다. 전망이란 세계는 앞으로 21세기에 이러 이러하게 변화해갈 것이라는 객관적 관점입니다. 그래서 어떠어떠하게 준비해야 된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소망은 앞으로의 세계는 이러 이러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주관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은 어쩌면 상반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망과 소망]에 관련해서 저는 이러한 말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두 부류가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 자신을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글자 그대로 자기에게 세상을 맞추려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상이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에 자신을 맞춘다는 것은 세상과 민첩하게 타협하는 것이고 세상을 추수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행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자명합니다. 세상을 자기 자신에게 어리석게도 맞추려는 그 우직한 노력이 세상을 보다 인간다운 것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단순히 비교하는 선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전망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그 내면에 자기의 소망을 담고 있다는 것이지요. 전망이라는 객관적 언어로 표현하고는 있지만 그 속에는 자기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려는 자기의 소망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들의 우직한 소망에 대하여 그것을 협소한 것이라고 그 의미를 격하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소위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당면의 화두가 어떠한 계층의 어떠한 소망을 그 속에 숨기고 있는가를 간파하는 통찰이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자본주의 200년사를 철학적 패러다임으로 정리한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근대성의 바탕이 되고 있는 철학적 사고의 구조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그것은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개별적 존재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러한 개별적 존재들이 다른 존재들과의 경쟁과 충돌 억압과 저항의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존재론적 사고가 최근에 반성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사상공간입니다.

 

 

 

작년 말에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어요. 간단한 내용은 그런 겁니다. 물질은 존재가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도 다 알겠지만 소립자라든가 뉴트리노라든가 소위 현대원자물리학의 가설체계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물질의 궁극적 형태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죠. 세계의 궁극적 실체는 어떤 객관적이고 확실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가설입니다. 이러이러한 조건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는 것, 존재라는 말이 이 경우에는 적절하지 않아서 '존재론'이라는 개념을 '실체론'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해야 된다는 조언을 받고 있습니다만 소위 탈근대이론이나 근대성비판 그리고 성찰적 근대성 논의에서는 존재론을 정치화(精緻化)하는 그런 방식으로 대응해요. 알튀세르의 'Overdetermination' 이론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만. 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일방적이고 직선적인 인과관계로 파악하는 대신에 양 방향의 화살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을 제기합니다. 나아가 양 방향이 아니라 수많은 화살표방향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접근 방식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인 세계상을 일단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다만 그것을 지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존재론의 틀 내에서 존재와 존재의 관계를 정치화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존재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제 논문의 요지는 세계의 기본적인 구조는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이라는 것입니다.

 

세계를 존재들의 집합으로 보지 않고 관계망(關係網)으로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사상적 기반이고 동양적인 패러다임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폐기되고 말았습니다만 우리는 삶의 여러 측면에서 이러한 사상적 정서적 전통을 만나게 되지요. 여기서 이러한 논의를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는 불편합니다. 다만 제가 <나의 대학시절>에 동양고전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느낀 점을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저의 동양고전 읽기는 대학시절에 만연했던 그리고 나 자신도 깊숙이 물들어 있던 우리 것에 대한 좌절감과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제가 지금 소개하려고 하는 것은 세상의 변화에 대한 동양의 기본적인 인식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주역(周易)의 이야기입니다. 주역이라면 여러분은 아마 점치는 책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주역은 점치는 책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주역에 대한 해설 즉 십익(十翼)은 철학입니다. 주역에는 64개의 대성괘가 있어요. 우리나라의 태극기에 있는 것은 소성괘라 해서 효 3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소성괘 두 개를 겹쳐서 6개의 효로 만든 것이 대성괘지요. 여덟 개의 소성괘를 겹치면 8×8 = 64, 64개의 괘가 되지요. 이 64개의 대성괘는 세상의 모든 변화와 운동을 64개로 패턴화한 일종의 카데고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변화를 64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하는 것은 굉장히 세분화된 구조라고 봐요. 변증법의 카테고리가 10개를 넘지 못하지요. 설명이 좀 복잡하기 때문에 우선 간단한 예를 들어보죠. 여기 컵이 있네요. 이건 '사물(事物)'이지요. 이것을 망치로 딱 때려서 깨트리면 사건이 되지요.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서 사건(事件)이 일어나고, 이런 컵을 여러분들이 전부 다 한 개씩 깨뜨리고 있다면 이 큰 강당에서는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잖아요. 그것을 사태(事態)라고 합시다. 이처럼 사물, 사건, 사태로 세상의 변화를 나눈다면 이 주역의 64괘는 가장 높은 단계인 사태를 카데고리화하고 정형화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역의 64개의 카테고리가 사태의 변화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기보다는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에 일관되고 있는 관계론적 인식 틀입니다.

 

예를 들어 64괘중에서 가장 좋다는 괘가 '지천태(地天泰)'괘인데 이 괘의 모양은 땅(地)이 위에 있고 하늘(天)이 아래에 있는 모양입니다. 이 괘가 제일 좋은 괘라고 설명하는 바로 그 이유가 관계론적이라는 것이지요. 땅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오고 하늘의 기운은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위에 있는 것은 내려오고 아래에 있는 것은 올라가기 때문에 '만난다(交)'는 것이지요. 그래서 '형통하다'고 해석합니다. 이는 존재론적 발상과는 전혀 다른 거예요. 어떤 개별적인 사물이 갖고 있는 속성보다도 그것이 맺는 관계를 통해서 발현되는 새로운 성격을 우위에 두는 거죠. 효(爻)도 마찬가지입니다. 음(陰)이니까 유순하고 양(陽)이니까 강건한 것이 아니에요. 그 음이 어느 자리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 성격이 달라져요. 어떤 존재와 그 자리(位)의 관계, 또 효와 이 효의 관계, 상괘와 하괘의 관계. 전부 관계입니다. 관계 그 자체가 확실한 존재성을 갖는 것이 동양적인 기본 마인드입니다. 이것이 동양적 사고의 본질이 아닌가 생각해요.

 

1970-01-01 09:00 2013-10-13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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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자본주의 - 작은 톱니바퀴의 비극

여기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논의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자본주의체제의 기본적인 구조에 더하여 우리사회가 부가적으로 짐 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의 일반적 성격에 더하여 논의해야 할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까 큰 톱니바퀴에 물려있는 작은 톱니바퀴가 우리나라라고 했어요. 작은 톱니바퀴의 위상과 작은 톱니바퀴의 속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는 친구 중 참 양심적인 기업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양심적 기업이라는 게 어차피 한계는 있겠지만, 어쨌든 경제정의상도 받은 기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업을 안 하겠대요. 못 하겠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가전3사의 어떤 부품을 거의 80%를 납품을 하고 있는데 마진이 얄팍하기 짝이 없다는 거예요.

 

 

마진이 제법 큰 아이템은 재벌기업이 직접 생산하고, 그보다는 좀 못하지만 상당한 마진이 보장되는 아이템은 로얄패밀리에게 하청을 주고, 결국 자기 회사가 맡은 것은 사업이 될까 말까하는 하는 정도의 마진밖에 안 나는 것만 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 얇은 마진으로서는 사원복지니 임금인상이니 작업환경개선이니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거예요. 못 하겠다는 거예요. 저는 그 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한국자본이 세계경제 질서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큰 바퀴에 물린 작은 바퀴입니다. 한국자본의 국제적 위상이 그러니까 다른 방식으로 벌었잖아요, 지금도 그렇지요. 대기업의 재테크란 자기들이 노임으로 분배해 준 돈을 부동산투기라는 형식으로 도로 거둬가는 형식이지요. 천민적이고 전근대적인 축적방법이지요. 이러한 구조, 세계경제 질서 속에서 그 위계질서의 하위에 편입되어 있는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 중층적인 수탈구조입니다. 작은 톱니바퀴가 정신없이 돌아야 하는 구조입니다.

 

 

'서울은 노동자 합숙소다.' 서울에 대해서 누가 저한테 묻는다면 저는 그렇게 답변합니다. 주택 도로 교육 환경 등 어느 것 하나 돌 볼 여력이 없습니다. 중하위에 편입된 작은 바퀴가 그 현기증 나는 속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마치 노동자를 합숙소에 집단수용하고 그 비용을 최소화하지 않을 수 없지요. 서울의 교통이 교통문제로만 풀리지 않는 이유이지요. 마진이 높은 하이테크부문을 갖추고 있는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도시와 주거환경은 참으로 우아했어요. 그리고 그들끼리의 관계도 형식적인 면에서는 매우 우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합숙소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 서로 수탈하며, 증오를 키우며 경쟁에 내몰리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물적 조건 역시 저로서는 가장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열등의식, 콤플렉스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은 좌절감, 패배의식이었어요. 서구적인 것, 보다 근대화된 어떤 것들을 가치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에 못 미치는 자신은 한없는 열등감과 패배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오로지 그 쪽을 향해서 달려갔던 그런 시절이었어요. 이것이 참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들이 안고 있는 콤플렉스. 자기 것,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나 자신감이 없는 상태. 이것은 가장 불행한 상태라고 해야 합니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저는 그 사람의 판단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콤플렉스라고 생각해요, 합리적인 판단을 가장 심하게 왜곡시키는 것이 콤플렉스라고 생각해요. 이 콤플렉스는 평소에 단어 하나 사용하는데도 작용하고, 안경 고르는데도 작용하고, 헤어스타일, 브랜드 고르는 데도 어김없이 끼어듭니다. 3살부터 여든 살까지 계속 끼어들어요. 완고한 무쇠 형틀입니다. 그래서 개인에 있어서는 최소한 자기가 어떤 종류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확실한 자각이 있어야 돼요, 고치지는 못할망정.

 

이러한 콤플렉스가 사회화되어 있는 경우는 어떻습니까? 사회문화 속에 구조화되어 있는 경우에는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사회는 참으로 불행한 사회입니다. 성장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하더라고 발전은 가망 없는 사회입니다. 저는 뒤늦게 깨달은 거지만 외국에 가보면 한국은 없습니다. 한국이 없다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화내더군요. “현대 자동차도 달리고 기아 자동차도 수출하는데 왜 없다고 그러느냐?”고 반론을 제기해요. 그러나 생각해봅시다.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가 어떻게 한국 거예요? 한국이 자동차 발명했어요? 한국은 없습니다. 그레이드도 제일 낮습니다. 중동, 아프리카보다 훨씬 낮습니다. 그런데도 서구를 향해서 우리가 키워온 동경과 짝사랑이 무척 허망하고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자기를 흉내 내고 뒤 따라오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지요.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허망한 동경들이 자기가 갖고 있는, 우리 사회에 구조화되어 있는 그런 콤플렉스, 열등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걸 극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사고, 판단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한 온당한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위상이 없습니다. 콤플렉스란 대등한 파트너가 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상태입니다. 관계할 수 있는 주체적 입장이 없는 상태지요. 철학적으로 스스로 타자가 된다고 하지요. 이러한 콤플렉스를 청산하는 일이 없이는 우리가 진정한 자유나 해방을 이야기하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1970-01-01 09:00 2013-10-13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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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준하 2013-10-24 20:11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갑니다.

  2. 박준하 2013-10-24 20:14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그 얇은 마진으로서는 사원복지니 임금인상이니 작업환경개선이니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거예요. 못 하겠다는 거예요. 큰톱니바퀴에 물린 적은 톱니바퀴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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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낭비 - 관계의 파괴

그러나 물질적 낭비는 그래도 작은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낭비보다 더 심한 낭비가 바로 [인간의 낭비 -인간관계의 황폐화]입니다. 인간의 낭비, 쉽게 떠오르는 것이 실업과 최근에 당면 과제가 되고 있는 고용조정입니다. 그러나 부패도 더 심한 인간의 낭비, 인간성의 유린입니다. 자본주의체제가 양산해내는 가장 심각한 낭비는 인간의 낭비, 인간성의 완벽한 유린입니다. 이러한 낭비의 가장 심각한 형태가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입니다. 인간관계 자체가 변질되고 와해된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20년 동안 익힌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을 읽는 눈입니다. 물론 농담입니다만 전철에서 자리를 잡을 때 그 실력을 발휘하지요. 징역살이하면서 사람들과 많이 부딪쳐서 눈치가 빨라졌지요. 제가 앉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틀림없이 앉습니다. 제일 가까운 전철역에 내릴 사람 앞에 가서 서 있다가 앉은 사람이 일어나면 앉으면 되거든요. 거의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가서 강의를 해야 되니까 가는 동안 한 20분이라도 졸아야 되겠더라구요. 신도림에 내릴 사람 앞에 자리를 잡고 딱 섰어요.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연습하면 충분히 가능해요. 왜냐하면 서울 역에 내릴 사람과 이화여대 앞에 내릴 사람, 아주 쉬운 사람들부터 구별해 보세요. 여러 가지 차이점과 특징을 잘 관찰하면 가능합니다.

 

신도림역에 내릴 사람 앞에 섰는데, 틀리지 않았어요. 앉았던 사람이 정확히 신도림역에서 일어섰어요. 그러나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났어요. 제가 앉으려는 찰나에 그 사람 옆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가, 학생인 듯 아닌 듯한 젊은 여자가 그 자리로 옮겨 앉고 자기 앞에 서있던 친구를 자기자리에 앉혀요. 아 그걸 제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 때 제 주변에는 저하고 경쟁관계에 있을 만한 나이 많은 사람도 없었거든요. 저는 확실한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 두 사람 걸치기도 안하고 정확하게 한사람의 정면에 서있었는데 그런 사건이 일어났어요. 아! 이게 뭔가? . . . .

저는 서서 생각했어요. 그때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 젊은 여자하고 나하고 아무 관계가 없어서 그렇다. 다시 만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못 만났어요. 그의 얼굴은 확실히 기억했는데도 한 번도 만나질 못했어요.

 

 

[맹자 곡속장에 있는 얘기]입니다. 제나라 선왕이 제물(祭物)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 벌벌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보고는 저 소를 양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려요. 임금이 인색하게, 큰 걸 작은 걸로 바꾼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왔는데 맹자가 그걸 정리를 하죠. 왜 바꾸라고 그랬냐 하면 소는 직접 보았고, 양은 못 봤기 때문에 바꾸라고 그런 거다. 차마 보고는 죽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보지 않은 양으로 바꾸라 그런 것이다. 제 선왕 자신도 미처 몰랐던 것을 맹자가 지적을 하였지요. 본다는 것, 관계있다는 것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 이것은 엄청난 것이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자행되는 차마 못할 짓들이 대부분이 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서로 관계없기 때문이지요. 자본주의 상품생산구조가 바로 이 인간관계를 단절시키는 구조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됩니다. 화폐가 생산자와 소비자를 단절시킨다는 아주 기본적인 사실, 이 사실이 갖는 엄청난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황폐화 이것은 인간낭비의 최고형태입니다. 다른 물질적 낭비와는 비교될 수 없는 삶 그 자체의 파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재벌회장 선친 묘소의 시신을 훼손한 사건이 일어났지요. 저는 점퍼 뒤집어쓰고 끌려나온 그 도굴자를 보면서 내내 다른 생각에 마음이 아팠어요. 만약 저 사람에게 중학교 다니는 딸이 있다면 그 딸의 심정이 어떨까. 그 생각만 계속 했어요. [고암 이응로 선생]이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젊은이에게 자네 이름이 뭔가 하고 물었어요. 그 젊은이의 이름이 응일(應一)이었어요. 그 이름을 듣고 혼잣말처럼 '뉘집 큰아들이 여기에 들어와 있구먼'했다는 거였어요. 간단한 말 한마디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뉘집 큰아들'로 그 젊은이를 본다는 것은 굉장히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을 바깥의 부모와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를 본다는 의미입니다. 죄명과 형기로 그를 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시각이지요. 바깥에서 마음 아파할 부모, 형제들 속에서 그를 본다는 것은 별로 대수로운 것 같지 않지만 실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문화 속에는 이런 시각이 일반적이었어요. 저는 이응로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보니까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사람을, 사물을 그런 시각으로 보아왔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어요. 우리사회의 문화적 틀로서 이어져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제가 사형 받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정리를 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같이 들어간 선후배들과 함께 정리했었지요. '죽음이란 삶의 완성이다.' 생각하면 아주 낭만적인 논리입니다. 유관순 누나가 독립만세 부르다가 감옥에서 죽는 것은 유관순 누나의 삶의 아이덴티티가 아름답게 완성되는 것이다. 충무공의 전사도 마찬가지다.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서 피 끓는 젊은이가 포악한 군사정권에 항거하다가 죽는 것도 식민지 청년의 삶의 완성이다. 그랬어요.

그랬는데 어느 날 저희 노부모님이 접견마치고 돌아 나가는 뒷모습을 제가 보게 되었어요. 순간 충격을 받았어요. 사형은 내 삶의 아름다운 완성이라고 하는 것이 공허하기 짝이 없어지는 것이었어요. 나의 죽음이 저 부모님의 심정에 무엇이겠는가. 저 부모님의 가슴에 뻥 구멍 뚫는 일이 아니겠는가. 순간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감방에 돌아와 혼자 생각했어요. 나의 존재라는 것이 과연 나의 개별적 존재로서 완성되는 것인가.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그 사람들의 걱정과 어떤 배려 속에 내가 여기 저기 흩어져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 내가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내가 받았던 교육들이 그런 서구 근대성의 어떤 특징인 존재론적인 사고로 굳어져 있는 건 아닌지. 관계는 존재라는 말도 생각났어요.

 

 

제가 <나의 대학시절>에 확인한 것은 그런 겁니다. 사람과의 관계, 그것을 확대하면 바로 사회의 어떤 본질적인 구조가 되는 것이지만. IMF상황 나아가 자본주의 200년사에서 우리가 청산해야 할 환상은 무엇인가. 상품생산, 상품교환 구조가 양산하고 있는 바로 인간관계 그 자체가 황폐화되고 파괴된다는 사실이 아닌가 합니다. 수많은 수도꼭지를 만들어 내야 되는 물질적인 낭비, 많은 사람들을 삶의 현장으로부터 쫓아내는 인간의 낭비에서부터 결국 인간관계 자체를 황폐화하는 것이 바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1970-01-01 09:00 2013-10-13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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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환상

여러분은 대학시절에 그러한 관념을 깨뜨려야 해요. 왜냐하면 아직도 여러분들은 이해관계와 유착이 안 되어 있는 상태잖아요. 이때 자기 사고를 바로 세워놓는 것이 참 필요하다고 봐요. 외신이 어떤 건지, 코소보 사태의 실상이 어떤 건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먼저 해야 되는 일이 자기 자신과 우리 현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공부, 즉 그 구조와 본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봐요. IMF상황에서도 결국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해요. IMF가 왜 일어났는지 지금 여기서 제가 설명 안 해도 되죠. 여러분 너무 많이 아시죠. 그러나 두 가지 관점은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하나는 현대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1990년대에 도달한 현대자본주의 새로운 단계와 성격에 관해서.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경제구조가 어떤 본질을 갖고 있는지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경제구조가 세계경제질서의 하위에 매달려 있는 종속구조라는 사실입니다. 큰 톱니바퀴에 물려있는 작은 톱니바퀴입니다. 빨리 돌아야 되죠, 큰 톱니바퀴보다도 더 빨리. 자기 가족 돌볼 새도 없죠. 교통, 환경, 국토의 종합적 이용을 거론할 여유가 없는 거죠. 식량자급률 27%, 어떤 농업경제학자는 23%라고 주장합니다. 그나마 기름으로 짓는 23%입니다. 만약 기름이 없으면 더 줄어들 수밖에 없는 실정이지요. 에너지는 물론입니다. 이런 구조, 다시 말해서 외국의 기술과 원자재와 생산수단 들여와서 수출해야 돌아가는 이런 종속구조는 경제위기가 일차적으로 외환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거죠. 거기에다 70년대 이후 엄청난 자본축적으로 이미 제조업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엄청난 규모의 초국적 금융자본의 신속한 국제적인 이동을 보장하는 세계화, 이런 구조 속에서 우리가 장기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될 것인가. 바로 이것이 지금의 과제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먼저 자본주의 200년사에 대한 환상, 더구나 앞으로의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어떤 환상들을 우리가 청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역사는 풍요의 역사였는가? 과연 풍요라는 게 뭔가? 세계적인 규모에서 봤을 때 과연 풍요로운가. 빈곤, 무지, 환경, 질병, 부패 이런 것들이 과연 200년 동안 효과적으로 해결되어 왔는지 이런 반성들을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미 여러분들이 많은 논의들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제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만, 이러한 형태의 자본축적운동이 지속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더구나 이러한 자본주의 200년 역사 동안에 뭘 잃어버리고 뭘 얻었는지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돼요.

 

 

[자본주의는 거대한 물질적인 낭비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너무 딱딱한 얘기 같아서 제가 다른 얘기로 대신하지요. 제가 있었던 어느 교도소의 4동 상층은 복도가 길게 있고 방이 10개, 한 방에 15명 내지 20명이 수용되어 있었어요. 복도입구에는 세면장이 있습니다. 세면장은 콘크리트 물탱크가 하나 있고 벽에 수도꼭지가 6개 박혀 있었어요. 그런데 물 많이 쓴다고 수도꼭지의 손잡이를 다 빼버렸어요. 다 빼버리곤 스패너로 단단히 잠가 버렸어요. 손으로는 틀수가 없게 돼 버렸지요. 그러고는 꼭지 두개만 남겨놨어요. 그렇게 두개만 남겨놨는데, 당연히 아우성이죠. 그 많은 사람들이 바쁜 시간에 와서 세수하고, 양말 빨려니까 아우성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러자 남아 있던 2개의 수도꼭지의 손잡이가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여러분들은 손잡이 빼는 방법 모르죠. 드라이브로 윗 나사를 풀면 T자의 꼭대기부분이 쏙 빠져요. 없어진 손잡이를 다시 채워 놓으면 또 없어집니다. 그것만 있으면 저쪽에 잠가 놓은 먹통 수도꼭지에 가서 혼자 여유 있게 물을 쓸 수 있으니까 손잡이를 다시 채워놓기만 하면 없어져요.

 

그래서 나중에 제도가 바뀌었어요. 물 쓸 사람은 수도꼭지를 교도관에게 받아서 사용한 다음에는 반납하는 형식으로 바뀌었어요. 이렇게 바뀌고 난 다음부터는 다른 곳의 수도꼭지가 없어지기 시작했어요. 공장에 있는 것, 변소에 있는 것, 심지어 직원 식당에 있는 것, 어디든지 있는 수도꼭지는 다 없어지는 거예요. 교도소내의 철공소에서 만든 것도 나돌았어요. 결과적으로 우리 사동에는 참 많은 수도꼭지가 있었어요. 우리 방에만 해도 우리 방 공동으로 쓰는 수도꼭지가 하나 있고, 그 다음에 수검에서 뺏길 때를 대비해서 깊이 숨겨 놓은 비상용이 또 하나 있고, 그뿐만 아니라 우리 방에서 복도에 왔다 갔다 하는 좀 잘 나가는 친구의 개인용이 하나 있고, 이런 식이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두 개, 세 개를 가지고 있어서 신세진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했어요. 각 방마다 사정이 비슷하다면 아마 한 방에 4개씩 그러니까 사동 전체에는 수도꼭지가 40개 정도가 있다고 계산됩니다. 그래도 물은 부족하고 아우성은 계속돼요. 저는 생각했어요. 전체 150명이니까 150개 있으면 해결될 것 같았어요. 비상용으로 하나씩 더 준다면 300개, 300개 있으면 물 문제는 해결될 것 같았어요.

 

 

이것은 교도소의 물 얘기가 아니거든요. 수도꼭지 만드는 회사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요. 6개 대신에 300개씩이나 만들어 팔 수 있지요.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저지르고 있는 물질적인 낭비의 작은 예라고 봐요. 자본주의의 거대한 낭비구조 거론하자면 한정이 없습니다. 쏟아지는 신기술 신제품에서부터 수십억 달러가 소요되는 거대한 전략방위시스템(TMD)도 마찬가지고, 더구나 우리의 경우 분단구조가 거대한 낭비구조인 것을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1970-01-01 09:00 2013-10-1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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