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동계올림픽을 보는 마음)

 

올림픽을 앞 두고 느낀 생각 입니다.

 

2010년 동계올림픽 개막을 4일 앞둔 밴쿠버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모습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이야 우선 개최지를 띄워줘야 하니 껄끄러운 기사는 잘 안 쓰지만

옆에서 보는 입장에다, 특히 밴쿠버’와 개최지를 놓고 경쟁했던 국가의 국민(아직

캐나다 시민권을 못 받아 서리……) 입장에서야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먼저 눈에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처음 제가 밴쿠버지역에 정착을 했을 때는 2010년도 동계올림픽은 당연히

성공적으로 운영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밴쿠버 지역이라고 쓴 이유는 제가 사는 곳이 밴쿠버(Vancouver)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제 주소에는 Vancouver 의 V자가 한 번도 안 들어가기 때문 입니다.

밴쿠버에 산다는 많은 분들의 실제 주소를 보면 v자는 없고 옆 동네인 Burnaby,

Coquitlam 또는 Richmond, Port Moody, Surrey(제가 사는 곳) 이런 주소를

갖고 있으면서 말로는 밴쿠버에 산다 고 합디다.

 

휘슬러라는 곳에 처음 가 보았을 때 느낌은 …… ”아…… ‘평창’이 무리를 했구나.”

였습니다. 시설과 경치에서 게임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올림픽에 스키 종목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계올림픽 하면 눈(雪)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뿐 아닙니다. 시설도 죽이더라고요.

 

그랬던 것이 시간이 지나고 코 앞에 개막이 다가온 지금 제 바람은 쫄딱 망해라!

하면 좀 심하고 적자나 나 버려라! 입니다.

 

조직위원회 라는 곳이 하는 꼬라지가 미워서 입니다.

확인하려고 오늘(2010.2.7.) 밴쿠버 시내로 차를 타고 가 보았습니다. 곳곳에

노란 옷을 입은 RCMP (무슨 말을 잘 타는지 경찰을 이렇게 부릅디다. Royal

Canadian Mounted Police)와 파란 옷을 입은 자원 봉사자가 곳곳에 진을 치고

길을 막아 놓았습디다.

교통통제를 한다고 할 때 도심에 있는 어떤 회사는 올림픽 기간 동안

직원들에게 휴가를 주겠다.고 발표를 해서 아직 배가 불렀군……’ 했는데

오늘 돌아다녀보고 내가 사장이라도 휴가 주겠다. 였습니다.

요소요소 잘도 막아 놓았습디다. 서울 올림픽 때도 홀짝은 했지만 길을

막지는 않았는데 말입니다. 불평이 저절로 나옵디다.

 

선수촌…… 86, 88 선수촌 지을 때 주택경기가 나빠 건설회사가 고생을 했지만

그 건설회사가 부도나서 공사를 못 할까 봐 서울시가 보증을 서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 선수촌 건설을 맡은 회사는 밴쿠버시의 보증을 추가로 받고

겨우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 와중에 감추고, 부인하고…… 난리 치던 고위관리

두어 명 사임하고……

 

듣도 보도 못한 얘기.

스노보드 대회는 밴쿠버 근처에 있는 사이프러스라는 스키장에서 열립니다.

(휘슬러에서는 알파인…… 이런 스키 대회가 열리고……)

그런데 눈이 모자라서…… 대회장에 눈이 모자라서…… 한달 전부터 인공 제설기

주구장창 돌리고, 트럭으로 눈을 실어 나르고, 트랙터로 산 위의 눈을 아래

대회장으로 밀어 내리고 그것도 모자라 헬리콥터로 공수하고…… 그래도 모자라서

있는 눈 흩어 질까 봐 연습기간 단축하고……

 

이러고도 다른 계정에서 돈이 좀 남았다고 보너스 잔치를 하겠다고 하니

(참, 자원 봉사자가 모자라 유급봉사자를 뽑기도 하면서…… 선수촌 건설

추가비용은 시민들 세금으로 충당하는데……)

누가 곱게 성공을 기원하겠습니까? 더구나 저처럼 좀 옆으로 보는데……

안 망하면 다행이겠지요……

 

하지만 우리 여나, 쇼트트랙 선수, 점프, 또 썰매(루지 인가요?) 선수들 기죽지 말고

제 기량 마음껏 뽐내고 좋은 성적 거두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신문기사를 보니 올림픽이 끝나면 집 값이 오를 거다.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좀 좋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올림픽’과 ‘부동산 가격’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봅니다.

 

이상 입니다.

2010/02/09 14:54 2010/02/0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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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네치아 에서 1주일 *****

아마 1994년 이었을 겁니다.

중앙투자금융(당시 이름)에서 다시 팩토링 업무를 맡을 때 였습니다.

FCI 총회가 이태리의 베니스(그들은 '베네치아'라고 불렀죠)에서

열린다고 통보가 왔습니다. 사장님이 안 가실 리가 없고 가방들

사람이 누가되는가 하는 문제만 남아 있었죠. 전 은근히 담당팀장이

가야 한다고 자가발전을 좀 했습니다. 또 전에 한번 참석한 경험이

있고 또 해외여행에서 말이 좀 되지 않습니까? 우여곡절 끝에

제가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제일, 삼희 에서 사장님과 수행원이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 회사들의 수행원은 이미 알던 사람들이라

좋은 여행이 될 것 같았습니다. 단지, 우리 사장님이 화려한

'에피 소드'를 많이 갖고 계신 분이라 이번엔 또 무슨 해괴한

일이 벌어질까? 하는 궁금함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코스 정하기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세 분이 같이 행동을

하시 겠다고 미리 천명한 지라 세 분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일정을

짜기란 쉽지가 않았다는 거죠. 또 세 분이 모두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 들이라 '내가 좀 양보하지......' 이런 게 통하지가 않았

습니다. 수행원 셋이서 거의 매일 바뀌는 주문을 갖고 만났습니다.

드디어 1주일 여 변경 끝에 확정된 일정이 서울--취리히(스위스)-

베네치아 - (런던 거쳐)-서울로 최종 확정 되었습니다.

1994년 6월, 기억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집권했던 시기인데 '북한 핵'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점점

위기가 고조되던 시기 였습니다. 하지만 특유의 한국사람 '안전

불감증' 덕분에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하면서 6월 10일

스위스 취리히 행 대한항공에 올랐습니다. 또 그때는 월드컵이

시작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로마 행 대한항공이 취리히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비행 편을 탔죠. 13시간 인가요? 북극항로를

거친 비행기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취리히 공항에

도착 했습니다.

마중 나온 여행사의 박 사장 이란 분이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호텔에 들기 전 저녁을 먹기 위해 중국집에 들렀습니다.

거기서 포도주를 곁들인 중국음식을 맛있게 먹고 호텔에

도착하니 9시가 조금 지났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호텔에 도착해서야 안 사실이지만 이게 웬일

입니까? 호텔 사우나가 남녀 공용 인데 9시 30분에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억울한 마음을 달래며 호텔방으로 들어가니 더 황당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탁자 위에 A4 용지가 하나 있고 거기에

무슨 글을 잔뜩 인쇄해 놓았길래 뭔가 하고 봤더니 중국어, 일어,

그리고 한글과 영어로 인쇄가 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속옷이나 수건을 빨아서 스텐드 갓 위에 걸쳐놓고

말리는 분이 있는데 스텐드 갓에 얼룩이 지면 벌금을 내게

되어있으니 스텐드 갓에 널지 마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동북아시아 인들이 거쳐가면서 얼룩이 지게 했으면......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러면서 잠을 청했습니다.

시차 적응을 위해 하루 일찍 왔기에 하루는 취리히 관광입니다.

'필라투스'라는 산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새벽에 잠시 비가 왔지만

하늘은 청명하게 개었습니다.

차로 한 시간 정도 이동하여 등산열차가 시작되는 역으로 갔습니다.

가는 길의 경치는 그야말로 이발소 사진을 떼어놓은 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산악경치를 꼽으라면 누구나 '스위스'를 꼽고

고등학교 지리 시간에도 관광산업이 발달한 나라로 스위스를

선두에 두지 않습니까? 그게 이유가 있더라고요. 저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관리도 잘 해 놓았는데 누가 그 경치에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입을 벌리고 경치에 취해있는 사이에 어느새

차는 필라투스에 오르는 등산열차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역에 있는 필라투스 관광 안내서를 받고 또 한번 놀랐습니다.

한글로 된 안내서가 있었단 말입니다.

많이 가서 그랬는지 국력이 커져 그랬는지 아니면 현지의

관광업에 종사하시는 동포들의 덕분인지 문장도 매끄럽게 잘 쓰여

있었습니다. 한 40도쯤 기울어진 기차(등산열차)를 탔습니다.

기관사가 있는 앞자리와 뒷자리의 고도(?)차는 한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습니다. 의자도 계단식으로 되어 있고 아마 밖에서

기차의 옆쪽을 보면 사다리꼴 기차가 비탈에 붙어있는 것 같았을

겁니다. 그 기차가 처음에는 잘도 오릅디다. 그런데 한 7-8분

갔나요? 날씨가 급변하여 번개가 치자 전차 앞뒤에서도 번쩍

번쩍하는 불꽃이 일어 났습니다. 처음엔 그게 옛날 한국의

전차처럼 가다 보면 으레 있는 일로(왜 전차 지나갈 때 보면 전선과

전차를 이어주는 접속부분에선 자주 번쩍번쩍 하지 않습니까?)

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동방의 양반이 호들갑을 떨 수야

있습니까? 그런데 전차가 갑자기 '덜컥'하고 서 버리는 겁니다.

그제서야 기관사를 보니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습니다.

이게 그냥 있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하고

언젠가 영화에서 본 장면(언덕을 오르던 차가 고장 나서 뒤로

미끌어져가는 차 속에서 배우들이 몸부림치는 장면)이 다시 스쳐

지나 갔습니다. 다행히 기차가 거꾸로 가지는 않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만 언제 다시 움직일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기관사는

무선전화기를 들고 독일 말(스위스의 취리히 지역은 독일어를

씁디다.)로 떠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기를 한 10분쯤 하더니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 했습니다. 가이더를 자처했던 여행사의

박 사장도 그제야 여유를 찾았는지 기관사에게 다가가서 농담도

주고 받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기관사도 그런

일을 처음 당했다고 하니 10분만에 전기가 들어와서 운행이 됐기

망정이지 전기가 늦게 들어왔다면 하루 종일 산중턱 기차 속에서

보낼 뻔 했습니다.) 그리고 잔설이 남아있는 필라투스 정상에서

내렸습니다. 내려가는 길은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방법, 케이블카를 타고 반대쪽 기슭으로

내려가는 방법, 마지막으로 걸어가는 방법 입니다. 우리야 타고

왔던 차가 아래에 있으니 기차를 타고 다시 내려 가는 게 당연한

것이지만 만약에 케이블.카를 타게 되어 있었어도 다시 기차를

타자고 했을 겁니다. 그래도 땅에 붙어있는 기차 속에서 만약의

사고 때 기다리는 게 낫지 공중 케이블카 속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기다리면 수명이 얼마나 줄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스위스지만 6월에 보는 눈은 정말 장관 이었습니다. 그것도

순식간에 한 5 cm 쯤 쌓여버리는 폭설이 왔습니다. 그때 가이더

하시던 분이 "이렇게 필라투스 꼭대기에 있을 때 눈이오면 꼭

한번 맛 봐야 하는 술이 있습니다." 하면서 우리 일행을 산

꼭대기에 있는 카페로 데리고 갔습니다. 스위스 필라투스(그것도

흰 눈에 덮인)산정의 카페...... 얼마나 폼 났겠습니까? 그림 속에서

놀았던 것입니다. 그 술은 무색의(소주처럼) 술이었는데 기억을

못하지만 무슨 열매로 담근 것인데 위스키만큼 독했습니다. 그

술보다 그 술을 담은 술잔을 나르던 '스위스 아가씨'모습에 흠뻑

취해 버렸습니다. 정말 이뻣습니다.

 

오던 길을 되 집어 아래로 내려 왔습니다. (물론 기차를 타구요.)

그리고 되돌아 오다 '루째른' 이라는 곳에 도착 했습니다.

호숫가에 위치한 이 마을은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그림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도시 였습니다. '이런 곳에 살아도

나쁜 마음이 생길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자상'(큰 바위에

슬픈 표정의 사자(죽어가는 모습이라는 설도 있음)를 부조해

놓은 것임.)도 보고 한국인이 있는(주인인지 종업원인지 불분명

) 가게에서 '스위스. 칼’(?)도 샀습니다. (빨간색 일명 '맥가이버

'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러고 점심을 어떤 호텔에 부속된

양식당에 갔는데 메뉴는 '카레라이스'. 제가 봐도 좀 허술하기는

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사장님 세분의 황당 시리즈가 시작

되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밴을 타고 호텔로 오는데 뒷자리에 계시던

젊잖은 분들이 궁 시렁 거리기 시작 했습니다. 점심 메뉴가 그게

뭐냐는 겁니다. “취리히까지 와서 카레라이스 먹어야 하겠어?"

하기야 맞는 말입니다. 여행 안내서에는 스위스에서는 "퐁듀"

(아직 이게 어떤 음식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를 꼭 먹어보라.

라고 추천하고 있지만 ‘카레라이스’로 끼니를 때웠으니 오죽

하겠습니까?

우리 쫄짜(가방 운반 책)들은 못 들은 척 하고 가는데 그 소리가

조금 더 커지기 시작 했습니다. 이미 뱃속에 들어가 창자까지

갔을 텐데 어쩌라고요? 그걸 도로 끄집어 내고 다른 걸로 채워야

하나요? 기사 겸 가이더를 하던 박 사장이 거북 했는지 "제가

호텔에 가는 길에 저희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경치가 좀 있습니다."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제야

그 분들 목소리가 좀 잦아 들더라고요. 그 집 정말 좋았습니다.

마당이 넓지는 않았지만 아담하게 짜여 있고 무엇보다

뒤뜰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그만 이었습니다. 언덕이라 그런지

동네가 한 눈에 다 들어옵디다. 스위스에서 성공 케이스라고

봐야겠죠.

 

그리고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한식집으로 갔습니다. 메뉴 판을

보고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돌리고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김치찌개 1인분에 거의 30,000원 수준 이었습니다.

그 비싼 김치찌개에 15,000원(1병)가까이하는 진로 소주까지

한 병을 안기니 사장님 세분 "끽"소리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밤이 깊어갔습니다. 사우나는 그날도 못하고...... 결국 취리히의

남녀혼탕 사우나는 다음으로 미뤘습니다.

 

아침에 취리히 공항으로 가서 '베니스'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정원이 한 100명 정도 되는 중간 급 비행기 였는데 놀랍게도

'프로펠러'비행기 였습니다. 프로펠러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저야 흥미진진하여 긴장도 되고 또 호기심도 생겨 좋은데 사장님

세분은 얼굴이 허옇게 변하더라고요. (그 이유는 비행기가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에야 알았습니다.) 그 '덩치 큰 프로펠러 비행기가

과연 뜰까?'하는 의문이 앞섰지만 뜨니까 사람을 태우겠지......

하니 좀 안심이 되더라고요. 드디어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이 건 기체가 요동을 치더라고요.

프로펠러 비행기도 엔진만 '제트엔진' 대신 '프로펠러'엔진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모든 게 구식 이더라고요. 기체자체도

제트기만큼 튼튼하지 못한 것 같고(느낌인지 몰라도)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달릴 때 요동치는 기체를 보노라니 "이 놈의

비행기는 함석으로 만들었나? 왜 이리 요란하게 흔들리지?"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어쨌거나 뜨긴 떴습니다. 그런데 역시

프로펠러 비행기는 높이 날지도, 빠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알프스산맥을 넘어가는데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이 바로 발 아래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조금만 자세히 보면 눈 사이로 삐 지고 나온

나무의 종류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너무 가까워서)

또 기류라도 만나면 비행기는 산 중턱에 곤두박질 치려는지 푹,

푹 가라앉기도 했습니다. 이번엔 제 얼굴이 허옇게 변했나

봅니다. 옆 자리에 있던 김 정현 대리(제일 종금)가 "박 선배님,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으세요?"하고 묻길래 "겁 나서

그래."라고 사실대로 얘기 할 수가 없더라고요. "응, 괜찮아."

하고 얼버무렸습니다만......

 

하늘에서 바라본 알프스 산맥은 절경 그 자체 였습니다. 미국의

'디즈니랜드'에 있는 산과 아주 흡사한 산을 발견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산이 바로 알프스산맥에 있는 '마태호른'산을

본떠서 만든 것이라고 합디다. 그 산을 아슬아슬 넘어서

비행기는 베니스로 베네치아로 프로펠러를 돌리며 날아

갔습니다. 하늘에서 바라본 베니스는 솔직히 별로 였습니다.

"저, 베니스가 세계의 3대 미항(美港) 중의 한 곳이라면 '부산'은

세계최고의 미항이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 빠진 갯벌

바닥이 보이고 시가지는 보이지도 않더라고요.

텅텅거리며 비행기는 베네치아 공항에(공항 이름은 까

먹었습니다.) 착륙 했습니다. 놀랍게도 입국 신고를 하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그곳이 바로 물위인 것 같았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바다 위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공항건물을 지어 놓은 것

같았습니다. 물론 활주로는 땅 위 였겠죠.

 

베니스로 가는 버스 와 택시 승강장엔 다른 공항에서 보듯이

차가 보이지 않고 크고 작은 배들만 잔뜩 보였습니다. (차로 가는

길이 분명히 어디엔가 있었을 텐데 못 찾았고 우리가 묵을 호텔은

'리도'섬에 있는 '엑셀시오'호텔이므로 차를 찾을 필요가 없어

굳이 찾지를 않았습니다. 더구나 초행 길이고 FCI의 안내서는

water taxi 를 타라고 되어 있었음) 큰 배는 water bus, 작은 배는

water taxi 라고 부르더군요. 베니스(베네치아)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곤돌라'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라고요. 택시 운전수인지

선장인지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나 우리 일행을 호텔까지 데려다

줄 배 주인과 흥정이 시작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도 한국

못지않게 에누리가 심하고 또 '깎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다.'라는

요상한 말은 꼭 기억하는 터라 깎기 시작 했습니다. (또한 안내서

보다 한배 반이나 더 달라는 운전수(선장)가 미워서 이기도 했죠.

그 택시기사도 만만치 않습디다. '니들이 베네치아 도심도 아니고

리도 섬으로 가는데 택시 안타고 베길 거냐?' 하는 투로 잘 안 깎아

주데요. 우리도 사장님들은 '저쪽에 계시라'하고 젊은 청춘들은

'비싸면 water bus 를 타고 베니스 도심을 거쳐서 배를 갈아

타더라도 그 값에는 못 가고 또 한 30분 있으면 호텔과 연계된

합승(1인당 요금 받는 water taxi)이 오니 그거라도 타겠다.'라는

투로 버텼죠. 결국 안내서에 적힌 요금으로 내려갔고 우리 일행은

보트 아닌 water taxi 를 타고 리도 섬으로 달렸습니다.

물살을 가르며 쏜살같이 달리는데 물위로 전신주 같은 기둥들이

가지런히 고개를 내밀고 있고 그 위쪽엔 전등도 달려 있었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게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표시해둔

바닷길 이었습니다. 밤에 보면 그것도 장관 입니다.

 

리도 섬, 엑셀시오 호텔......

최근에야 알았지만 이 호텔은 유명한 호텔이었고 리도 섬 자체도

베니스의 휴양지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었습니다. 뭐로

유명하냐고요? 바로 '베니스 영화제' 입니다. 해마다 열리는

베니스 영화제가 바로 그 '리도' 섬이 중심이 되어 개최되며 공식

행사가 열리는 장소가 바로 '엑셀시오'호텔이거든요. 그러니 제가

1주일 묵었던 그 방의 침대에서 우리의'최 민식'씨가 누웠을 수도

있고 또 '문 소리'씨가 묵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전혀 불가능한

얘기가 아닌 것이 제가 묵었던 방도 상당한 방이었으니까요.

1994년 시세로 1박에(단체로 할인했음에도) $280 인가 했습니다.

호텔은 베니스 쪽이 아니라 '아드리아'해(海)를 바라보며 발코니가

나 있었고 바닷가를 따라 줄지어선 호텔들마다 경계선을 돌로

표시하여 각 호텔 손님들은 그 호텔 앞에서만 수영을 할 수 있게

했고 베니스에서 하루 놀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입장료를 받습디다.

정말 호텔 수영장에 입장료 얘기는 들어도 호텔 앞바다에서 수영도

돈 내고 하는 곳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가 얼마나 황홀한가 하면요 설령 투숙객인 제게 돈을 내라고

해도 선뜻 주고 수영을 했을 겁니다. 그만큼 '수영하고 싶은 바다'

였습니다. 어쩝니까?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에 뛰어 들었죠.

초 여름의 아드리아 해(海)는 차가웠지만 금방 튀어나올 만큼

춥지는 않았습니다. 잘은 못하지만 수영실력 한번 뽐냈습니다.

유럽의 지중해와 붙어있는 아드리아해의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수영을 해 보았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때 찍은 사진이

저의 사진첩 어딘가에 끼워져 있을 겁니다.

 

대부분의 국제회의가 그렇듯이 1주일 이라면 한 3일 회의를 하고

나머지 2일은 관광 또는 그 지방의 문화탐방을 하고 그리고

1-2일은 참가자들끼리 오랜만에 만난 회포도 풀고...... 그렇게 진행

되는 게 관례더라고요. 또한 대부분의 의제는 미리 의견을 듣고

조율하고 좀 민감한 사항은 이해 당사자들끼리 서로 연락하여

의견을 모으거나 아니면 회의장소에 도착하여 표결 전에 의견을

모아 회의에 임하기 때문에 시간은 많이 끌지 않고 아주 민감한

사항일 경우에만 토론을 하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각 회사의

담당자들이 5-10년을 같은 일만하니 매년 회의 때마다 같은

사람이 참석하게 되지요. 한국처럼 사장님들이 참석하거나 임원

급이 참석하면 매번 얼굴이 바뀌지만 다른 나라는 같은 사람이

매번 참석 하더라고요. 실제로 만 9년 만에 참석한 저도 9년 전보다

다소 늙은 동일인을 여럿 만났습니다. 특히 뮨헨에서 얘기를 꽤

했던 독일회사의 대표를 베니스에서 다시 만났으니까요.

그 사람도 절 알아보고......

 

이번 베니스 회의도 첫 2일은 베니스 관광과 '무라노', '부라노'

섬 방문 그리고 3일간 회의 이렇게 일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첫날 베니스 관광 이었습니다.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거리가 멀어

돈을 내고 WATER TAXI를 탔지만 리도 섬의 호텔에서 베니스

다운타운(?) 까지는 무료 셔틀보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행이

많으니 전세 관광버스처럼 전세 water bus 가 호텔과 연결된

부두에 정박하고 있더군요. 그걸 타고(물론 water taxi 만큼

빠르지는 않았습니다.) '산. 마르코’광장으로 갔습니다.

 

베니스 사진에서 빠지지 않는 산 마르코광장과 그 맞은편의 탑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옛 총독의 관저라는데 어쩌면 우리나라의

 

중앙청'처럼 총독이 일도 보던 곳 같았습니다. 감옥도 연결되어

 

있고요. 수백 년 전에 그런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건축술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건물이 멋있었습니다. 재판정,


집무실 등을 거쳐 감옥으로 넘어가는 다라('한숨의 다리'라고도


한다더군 요.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으로 갈 때 유일


하게 바깥세상을 볼 수 있는 곳이 그 다리 난간에서 였답니다.


좁은 골목과 운하길 위에 설치된 다리를 지날 때 사형수는 깊은


한숨을 내 쉰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나요?) 우리 일행을


안내해 준 가이더는 한 60 되어 보이는 노인 이었는데 정말 설명을


잘 해 주었습니다. 옷 차림이 좀 꽤재재해서 그렇지만 옷만 좀 더


깔끔하게 입었더라면 정말 폼 나는 가이더 였을 겁니다. 한 2시간


구경을 하고 다시 광장으로 나오니 그 넓은 산. 마르코 광장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 했습니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카페가


광장에 식탁과 의자 그리고 비치파라솔 같은 커다란 양산을


설치해 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좀 큰 가게에서는 야외무대에서 공연 팀들이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하니 관광객들은 그야말로 홀린 듯이 파라솔 아래에 앉아


술과(주로 맥주나 포도주) 음식을 시켜놓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날 따라 맑은 태양과 푸른 바다 그리고 옆에 있는 친구......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총독청사 맞은편 교회(? 확실치


않습니다만)의 탑 꼭대기에 오르는 것은 포기하고 호텔에서 있는


점심초대(이태리 회원 사 제공)에 늦지 않기 위해 셔틀 보트에


올랐습니다. 아드리아해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뱃전에 있노라니


'산타루치아' 노래가 저절로 떠 올랐습니다.



점심 먹고 한 두 시간 뒹굴고 그리고 다시 나갔습니다. 베니스로

 

이번엔 미술관 관람과 저녁 자유시간...... 배는 밤 11시 까지 운항


한다고 하니 여유는 짱짱 했죠. 어슬렁 거리며 박물관 구경을


하고 쇼핑에 들어 갔습니다. 사장님들이 먼저 "우리들은 천천히

 

구경할 테니 젊은 사람들은 따로 다니지?" 하길래 이게 웬 반가운

말씀인가? 하면서 3대 4로 헤어졌죠. 산 마르코 광장을

중심으로 미로 같은 베니스 가게들을 구경하는데 정말 재미 있었

습니다. 명품에서부터 싸구려까지 없는 게 없더군요. 바닷가로

가면 좌판도 있고 점쟁이도 있고 그리고 거리의 화가도 곤돌라와

. 마르코 광장을 그린 그림을 팔고 있더라고요. 즉석에서 얼굴을

그려주기도했구요. 그림 한 장 샀습니다. 아내에게 줄 목걸이도

하나 샀죠. 넥타이도 한 두 개 샀나요? 다들 고만 고만 하게 샀는데

한 친구는 선물해야 한다고 꽤 비싼 유리제품을 사더군요.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식당을 찾는데 또 사장님 일행을 만났

습니다. (그 전에도 골목골목 지나다 만났죠. 그러면 인사하고

스치곤 했죠.)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요. 저는 사장님들 중

누군가가 저녁을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통 가재(랍스타)가

얹혀나 오는 대(大)자 스파게티에 포도주 두병을 시켰죠.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입맛에도 맡았구요. 다 먹고서 눈치보고

있는데 한 분이 "계산하고 나와라. 우리 먼저 간다."하시고는

자리를 뜨시더라고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말을 한 분은 경비를

직원에게 모두 주고 계산하게 하고 남는 게 있으면 끝난 후 정산

하기로 했다는군요.) 우린 놀래가지고 눈만 멀뚱멀뚱하다가 일단

계산을 하고 3등분해서 나누어 부담했죠.

저녁 잘 먹고 호텔로 돌아오는 뱃전에서 이번엔 젊은이들이 궁 시렁

거렸습니다.

다음날은 유리의 고장 '무라노'섬 과 레이스수예의 고장

'부라노'섬을 관광했습니다. 역시 전세 배로 말입니다. 입으로

불어서 유리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그야말로 예술이었고 그

제품들이 전시된 곳에서 가격표를 보고 또한 번 놀랐습니다.

가격, 비싸데요...... 오래된 교회 옆의 야외 식당에서 먹은

점심은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베니스의 6월 태양아래서 먹은

연어요리......

배는 다시 '부라노'로 가서 아직도 옛날 옷을 입고 천에다 갖가지

모양을 한 땀 한 땀 떠서 만드는 식탁보, 손 수건 등도 멋 있었

습니다만 가게에 전시된 가격은 '극 과 극'이었습니다.

이태리 제는 엄청 비싸고 싼 것은 made in China 였습니다.

그리고 저녁은 FCI 에서 제공하는 공식 만찬으로 꽤 유명한

베니스의 고성(옛날 귀족의 저택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에서

먹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배를 타고 운하를 따라가다 그 집

앞에서 배를 내려 바로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날 밤 서울로 전화를 했습니다.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처음엔 월드컵에서 우리가 독일과 3대3인가로 비겨

 

좋아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백화점, 슈퍼에서

 

사람들이 라면과 부탄가스를 사재기하고 난리가 났다고 합디다.

 

그러면서 "수원에(처가) 가 있을까?"하고 묻더라고요. "무슨


일인데?" 하고 반문하니 "전쟁 난다."는 소문이 났다고 합디다.

 

"전쟁? (지금 생각하니 그때가 북핵 때문에 긴장이 고조될 때 였고


진짜 북폭하려고 했다더군요.) 괜찮을 테니 그냥 있고 정 불안하면

수원에 가 있으라."고 했죠. 그 때 다행히 '카터'덕에 전쟁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무식한 놈이 배짱이 좋다고......' 입니다.

 


그리고 3일간의 회의......회의......회의


그 중간에 리도 섬 안에 있는 카지노에 가서 우리 돈으로 한


2만원을 잃었습니다. 또 한 분(세 분외 혼자 오신 사장님)이


점심을 한번 사 주었습니다. 그러니 "계산하고 나와라."와


얼마나 대조가 되겠습니까?

 

회의도 마치고 이젠 귀국만 남았습니다. 베니스에서 런던을

거쳐 서울로 일정이 잡혀 있었습니다.

그 중간 중간 별 희안한 일화가 많지만 이건 꼭 기록해야 하겠

습니다. 베니스 공항에서 출국신고를 하고 보딩을 기다릴 때


였습니다. 면세점에 들어갔죠. 근데 거기서 사장님 한 분이


비싸게 주고 산 가방과 거의 같은 가방이 아주 싼 가격표를

붙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분의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어, 왜 이렇게 싸지? 같은 건데......"

"아냐, 그건 인조가죽일거야."(가방 비싸게 주고 산분 왈)

"어, 그래도 거의 같은데...... 하나 살까? 면세점인데 가죽이겠지."

"면세점에도 인조가죽이 있다니까."(이미 사신 분)

"최 대리, 저 점원에게 진짜 가죽인지 한번 물어봐."

우리 최대리 줄래 줄래가서 진짜 가죽이냐고 두 번을 물어 확인(?)

하고는 돌아와 "진짜 가죽이 맞는답니다." 라고 했죠.

그리고는 다른 분이 하날 샀습니다. 비행기 시간이 여유가

있은 게 탈이었는지...... 가방을 사지도 않은 분이 한마디 합니다.

"내가봐도 그렇게 차이(반 이하 였거든요?)가 날 수가 없어

그거 인조가죽일거야." 이러니 싸게 가방을 사고도 불안한지

처음엔 "인조가죽이면 어때? 그러려니 하지......"하고 넘어가던

분이 얼굴이 점점 변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럴수록 두 양반은

약을 더 올리고...... "싼 게 비지떡 이라니까?" 그런데 묘한 건

싸게 산 분도 얼굴만 일그러지지 바꿀 생각은 않더라고요. 저

같으면 그리 불안하면 도로 환불 받으면 될 것을 화만내더라구요.

그러더니 "최 대리, 이게 진짜 가죽인지 한번 더 물어봐." 그게

세 번째 였습니다. 불쌍한 우리 최대리 사장님 명령인데 어쩝니까.

또 갔죠. 그랬더니 이번엔 면세점의 점원 아가씨가 "그렇게

불안하면 안 사면 될 것 아니냐? 내가 환불해 줄게." 하고 화를

냈다고 합디다. 그렇게 얘기하자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아무

말도 않더라구요. 마침 그때 탑승안내 방송이 나왔기 망정이지

시간여유가 좀더 있었으면 환불 했을지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베네치아 회의는 막을 내렸습니다.

런던 히두르 공항을 거쳐 서울로 올 때는 별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히두루 공항의 스낵코너에 있던 연어 셀러드가 무척이나

먹고 싶었는데 9.5파운드라는 가격표에 놀라서 군침만 흘린

사건이 개인적으로 있었습니다. 그 걸 19년 후인 2003년 가을에

런던 출장 길에 해소를 했다는 겁니다. 그때는 15파운드 주고

연어 샐러드 사고 그리고 3파운드인가 주고 맥주한잔 그래서

세금까지 22파운드 인가 주고 먹었습니다.

 

 

 

베네치아…… 이상 입니다.

2010/02/04 15:59 2010/02/0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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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카고 연수기 *****

1990년 어름에 시카고에 연수를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이건 가기 전부터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1980년대 초(1982-1984) NYU Stern School(당시엔 GBA:
Graduate School of Business Administration)에서 유학할 때
제게 많은 흥미를 준 것이 'Financial Futures and Options'
였습니다. 적은 돈으로 많은 이익을 낼 수 있고(물론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또 본래 목적인 미래의 가격을 고정시킬 수 있어
경영계획을 세우기도 좋고...... 여러 가지 면에서 상당히 매력적
이었습니다. 그때는 석유가격이나 농산물가격의 변동이 심해서
해당상품을 원료로 쓰는 국내기업들이 원자재 가격 변동에 따라
춤을 추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국내 시장에서는 상품도입 논의를
할 생각도 없던 때 이기도 했죠. 미국(선물, 옵션 시장이 가장
발달된 나라)에서는 이런 파생상품을 이용하여 많은 이익을
보았으며(생산자. 소비자 모두) 또 미래의 가격변동에 의한
충격을 줄이려는 노력이 활발한데 비해 국내에서는 정유회사나
식품회사에서 상품(원유, 콩, 밀 등)위주로 자체 필요에 의해
조금씩 '선물시장'(당시 유명한 게 시카고의 CBOT, CME 와
뉴욕의
선물거래소
였습니다.)에 참여하던 수준이었고 국내에선
'한국선물협회'라는 게 있어서 선물상품 도입방안을 검토,
연구하며 한국 '선물거래소'로 승격하기만을 바라던 때였죠.
선물협회는 CBOT(Chicago Board of Trade) 나 CME(Chicago
Mercantile Exchange)의 홍보 및 교육 팀과 연계하여 국내에
많은 세미나를 유치하였고 우연한 기회에 CBOT 에서 강사가
와서 하는 3일짜리 교육에 참가하면서부터 저는 선물협회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긴밀한 관계라는 게 그쪽으로 직장을
옮긴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쪽에서 하는 '세미나'나 교육의
초청장을 빼먹지 않고 꼭 보내주는 정도였습니다.

당시에 한국인으로서 시카고의 선물시장과 관련되는 분으로는
'드. 폴 대학교'(시카고 선물거래소(CBOT) 근처에 있습니다.)의
'최 진욱'교수님(실무에 강했음)과 '일리노이 대학교'의
'박 헌영'교수(이론에 강했음)님이 계셨고 선물회사(이름은 잘
모름)에 근무하던 '서 중원'씨가 한국에 많이 알려진 인물들
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많이 알려진 것은 선물협회가 초청을
자주하여 세미나를 많이 해서 한국의 관심 있는 분들은 잘 안다는
거죠.) 이 분들은 한국의 선물시장 개설과(실제 개설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더라도) '선물 및 옵션'이라는 금융상품을 한국에
확산시킨 점에는 공이 큰 분들 입니다.

이런 와중에 시카고에 소재하는 REFCO라는 선물회사가 서울서
세미나를 개최하였고 거기에 참석한 저는 참석 했다는 표시로
명함을 한 장 떨어뜨려주고 왔죠. 그러고는 회사에 선물시장
연구가 필요하며 인력은 어떻게 양성해야 한다는 등의 보고서는
여러 번 냈죠. 그 중엔 '시카고 연수'(해외연수)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구체적인 것은 없고 연수를 보낸다는 결정이 나면
그 때부터 '연수처 물색 등을 선물협회의 도움을 받아 추진한다.'
정도의 막연한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 한국의 투자금융회사들은 향후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점이었으니 '업종전환' 문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은행, 증권사, 종합금융회사 등 조건과 정부정책이 맞으면 전환을
시킨다는 것이었죠. 이로 인해 한국, 한양, 금성 이 은행으로,
지방사 들이 종합금융회사로, 서울, 고려 등이 증권사로 전환해
갔지만 중앙, 동양, 제일 등의 투금사는 일단 전환을 안하고
버티는 시점 이었죠.
중앙도 일단 전환은 안 하지만 언젠가는 종금사로 전환한다는
목표를 두고 인력양성에 박차를 가할 준비를 할 때 였습니다.
투금사에서 종금사로 전환하기위해 준비할 사항은 가장 시급한
것이 '국제금융'을 담당할 인력양성 이었죠. 당시 투금사에서는
'전산실'요원이 Program을 짤 때 사용하는 것 외는 '영어'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업종이었습니다. 그러니 국제금융 시장에
뛰어들려면 영어를 할줄아는 인력과 국제금융시장의 상품을
이해할 수 있는 인재가 우선 필요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해외연수를 준비하기 시작하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미국에서 한 장의 '초청장'이 날아왔습니다. 한 1년 전
서울서 세미나를 했던 Refco 社에서 보낸 것으로 6주 또는 12주
교육을 무료로 시켜 주겠다는 거였죠. 참가자는 숙식비만 부담
하면 자기네 교육센터에서 무료로 교육을 시켜주고 후반 6주는
자기네 Trade desk를 제공한다는 파격적인 조건 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계획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참가하려 구요.
이 때 또 다른 부서에서는 '싱가포르'의 IBF의 6주짜리 연수를
추진하고 있었죠. 거의 같은 시기에 두 보고서가 올라가니
위에서는 '둘 다 보내는데 영어시험을 거쳐서 대상을 선발한다.'
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부랴부랴 TOICK 시험이 특별전형으로
회사 내에서 치러졌고(여기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그 결과
시카고는 제가, 싱가폴은 다른 직원이 선발 되었죠.

그런데 싱가폴로 결정된 직원이 해괴한 논리로 자기가 미국에
가야겠다는 겁니다. "토익 점수도 내가 높고, 나는 미국을 안
가봤기 때문에 가야겠다."는 겁니다. 토익점수는 일정점수
이상이 되면 일단 대상이 된다는 것이었지 높은 점수획득자가
연수지를 선택한다는 얘긴 아무데도 없었고, 부랴부랴 치뤄진
토익의 문제가 어떤 준비서에 나온 샘플문제를 그대로 가져왔고
그 친구는 그걸 본 덕분에 980점을 받았다 나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초청장이 제게 왔고 '정 니가 못 오면 니네 회사의
다른 직원이라도 꼭 보내달라.'는 것이었고 제가 갈 수 있는데
왜 안가겠습니까. 저도 가야겠다고 강하게 주장해서 결국 제가

가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이 일 이후로 그 직원과는
사사건건 마찰이 많았고 사이가 안 좋습니다.

결정이 되자 준비를 시작하는데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6주동안
숙소를 제일먼저 구해야 했고 비행기 예약도 해야 했습니다.
예약은 North West Airline 으로 정했습니다. 당시 그래도 비용을
생각하면 그 항공사가 가장 싸기도 했고 또 한국대리점인
'샾 항공'의 사주가 친구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서울 -시카고 왕복에 뉴저지 사는 동생도 만나봐야 했고
또 같이 공부하다 뉴욕에 주저앉은 '최 장현'선배도 보고 싶었고
또 주말을 이용해서 '토론토'(CANADA)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방 충극'(대학동기)이도 만나기 위해 $200을 더 주고 표를
샀습니다. 숙소 예약은 당시 '한양투자금융'에 다니던 '한 영호'
라는 후배가 있었는데 그때 같은 곳에서 먼저 연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전화를 해서 숙소를 물어보니 한 시간쯤 떨어져
있는(Refco 회사에서) 모텔인데 싸고 괜찮다고 해서 예약을 부탁
했습니다.

김포공항에서 NWA 비행기를 타고 떠났습니다. 동경에서 갈아타고
시카고로 향했습니다. 시카고 공항에 도착하니 지금은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하는 '김 수길'(고교. 대학 동창)군이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그 때 아마 무슨 언론재단의 연수로 1년간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끌고 나온 차가 당시 미국시장에
진출한 지 얼마 안 되는 신형 포니 였는데 번호판에 놀랍게도
'KOREA' 라고 써 있었습니다. 물론 랜트카 회사에서 받은
것이지만......
한국 동포가 많이 사는 '로렌스'라는 동네를 지나 링컨에비뉴에
있는 'SPA Motel'에 들었습니다. 온천하고는 거리가 먼 그냥
이름이 그랬습니다. 김 수길 군과는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짐을 정리하고 있는 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가보니
놀랍게도 과거 선물협회에서 세미나 할 때 얼굴을 익힌 선물협회
직원이 와 있었습니다. 반갑게 인사하고 물으니 자기도 연수
받으러 왔고 동양선물에서 온 친구도 있다는 겁니다.

식당, 물건 파는 곳(수퍼 등) 등 안내를 받고 하루를 보냈습니다.

다음날 일요일에 연수 받을 곳을 찾아 갔습니다. 길을 알아야
월요일에 헤매지 않고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루프'(미니기차인데-경 전철 이라고 하나요? 뉴욕과 뉴저지를
잇는 '패스. 트레인’과 크기가 같았습니다. 시카고 시내에서
한 바퀴를 돈다고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나요?)를 타고 당시
한번 타는데 1불인가 1불 25센트인가 했는데 한달 '패스'를 사면
한달 동안 무제한 탈 수 있는 제도가 있어(45불인가 60불인가
했습니다.) 그걸 끊었습니다. 그러고 시간 나면 탔죠. 로렌스
연습장(참 지금에야 밝히지만 로렌스에 있는 '놀만 골프'라는
닭장 연습장에서 7일 연습하고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퍼블릭
코스에서 처음 골프를 쳤습니다.(머리를 올린다고들 하더군요.)
스코어야 비밀입니다만 골프를 친 것은 사실 입니다. 같이 친
'방 충극'(대학 동창으로 85년에 캐나다로 이민)이가 증인
입니다.)갈 때도 타고, 일요일 날 미시간 호수에 수영하러 갈 때도
타고, 시어즈 타워 구경갈 때도 타고, 아쿠아리움 구경갈 때도
타고...... 본전은 뽑았습니다.

우선 일요일에 시내로 갔습니다.
연수를 받을 Refco라는 회사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아야
월요일부터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전철을 타고
다운타운으로 가서 '라살'스트리트를 찾으니 잘 찾아 집니까?
물어물어 헤 메다 겨우 찾았고 교과서나 교재에서 자주 보던
우람한 건물이 시야를 막기에 정문 쪽으로 가니 그게
Chicago Board of Trade 였습니다. 그 옆에 붙어있는 건물에서
Revco라는 이름을 확인하고는 시내 구경을 나섰습니다.
이리저리 걷기가 좋은 게 전철이 시내 중심에서 지상으로
튀어나와 큰 사각형을 그리며 한바퀴돌아서 온 곳으로
되돌아가게 되어있어 웬만큼 돌아다녀도 전철이 보이는 곳에
가서 전철을 타면 된다고 생각하니 길 잃을 걱정이 없어
지더라고요. 미시간 에비뉴 인가요 ? 퍼레이드도 자주 하는 넓은
길이 있었습니다. 건축의 도시라는 시카고에 유명한 건축물은
이 길 양쪽에 다 모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길 끝자락으로 올라가서 미시간 호숫가에 가보니 낚시질 하는
사람도 많았고 또 조금 가니 놀랍게도 모래사장이 있고 사람들이
수영을 하더라고요. (2주 후에 저도 수영복을 입고 물에 들어가
보았습니다만)

그리고 월요일부터 연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기초야
한국서도 했던 거라 그런대로 따라 갔습니다만, 장 끝나고 시황
설명을 할 때는 좀 황당하더라고요. 영어는 당연히 잘 할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속사포처럼 쏘는데 한 6년 만에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영어를 들으니 그게 쉽게 들어옵니까? 귓가에서만
맴돌다 지나가 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연수 자는 한국사람이 한 10명(중앙투금의 저, 한외종금(이 친구는

후에 밴쿠버에서 다시 만났고 대학 후배라는 것도 밴쿠버에서

다시 만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대신증권(이 친구는 일요일 날

흑인동네를 지나는 전철을 탔다가 강도에게 돈과 시계를 털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외환은행 등)과 그곳 신입직원 2명,

그리고 일본에서 온 사람 3-4명 이렇게 받았습니다만 처음엔

서로 눈치 보느라 조용하지 않습니까? 5주정도 지나니 농담도

하게 됐습니다만.

시어즈 타워(한 때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죠. 전망대
올라가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한 6달러인가 낸 것
같습니다. 꼭대기에 올라가면 사방이 탁 트여있어 볼만 합니다.)

존. 행콕. 센터(새까만 건물 그런대로 폼 납니다. 보험회사라는
것은 2000년에야 알았습니다. 낮에는 올라가면 그저 높은데
왔구나 싶고 밤에 식당에 예약(한 1주일 전쯤 예약을 하면서
남쪽 창가 자리를 부탁하십시오. 야경이 가장 멋집니다.
재수없이 호수 쪽 자리에서 저녁을 먹으면
뭘하러왔나
?'하는
푸념하다 보면 밥맛 하나도 없어집니다. 호수 쪽에 밤에 보이는
것은 그저 깜깜한 어둠뿐입니다. 간혹 운이 좋아야 지나가는
배(호수지만 큰 배가 다니고 군함도 있습니다.)의 불빛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하고 저녁을 드시면 분위기 끝내 줍니다.
시카고 야경도 쌈 쌈 합니다. 가격은 조금 쎄더군요.

옥수수 빌딩(건물이 옥수수 두 개 세워놓은 것 같은 높은 건물
입니다. 아파트라 나요? 시카고 강 옆에 있습니다.)

각각 갖다 붙인 사연이 하나같이 유명한 건물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더구나 고의인지 '소의 과실'(소가 뒷걸음 치다
석유등을 쓰러뜨려 그 불이 건초에 붙었다는 설)인지 모르나
시카고 대 화재(다운타운이 몽땅 타고 Water Tower 라는 수도 국
탑 하나만 남은 사건)때 모두 타버려 새로 도시 계획하여 건설
하였기 때문에 도시가 반듯반듯해서 보기도 좋습니다.

시내를 돌아다니는 투어버스(어느 곳이나 도시에 가시면)를
먼저 타고 한 바퀴 돈 다음 그 중 흥미를 끄는 곳에 다시 가 보는
것이 저의 도시 관광 순서 입니다. 책자보고 찾아 다니기는
너무 힘이 드니까요. 투어버스는 요소요소를 빼 놓지는
않으니까요.

이 때 기억이 남는 일은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싹 쓸어
버린 일이 일어나 석유가격이 40달러를 넘어버렸고......
자동차를 렌트해서 무작정 달려본 일이 있었습니다. 가다 보니
아이오와주의 '데. 모인’(참, 그러고 보니 여긴 친구 '권 인태'군이
유학 가려고 비자까지 받고서 포기한 학교가 있는 곳이군요)에
갔다 온 일이 있었습니다. 황당한 일. 저는 차를 빌릴 때 그 쪽
사무실에 가면 더 빨리 빌릴 수 있는 줄 알고 바로 사무실로
갔더니 '예약이 안된 분은 차를 빌려주지 않는다고 합디다.
그래서 예약센터의 전화 번호를 받고 사무실을 나오니 바로 옆에
공중전화가 있더라고요. 거기서 예약하고 다시 문을 열고 들어
가니 차를 빌려 주더라고요. (한편으론 이해가 가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바로 빌려주면 수신자부담 전화 비라도
아낄 텐데...... 했습니다.) 그 차를 몰면서 '크루저. 코트롤러’라는걸
처음 써 보았습니다. 일정속도에 오른 후 스위치를 작동시키면
운전자는 핸들만 붙잡고 있어도 차는 계속 같은 속도로 가더군요.
이 건 미국 같은 도로가 넓고 차가 많지 않은 곳에서는 그만
입디다. 곧은 길에서 두 발을 좌석에 올리고 핸들만 잡고 가는
기분도 괜찮았습니다.

4주를 마치고 토론토 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중간에서 비행기를 한번 갈아타야 했고 캐나다는 다른 나라 였기
때문에 그 때만 해도 비자를 미리 받아야 했습니다.(지금은 면제
혜택이 있지만 말입니다.) 시카고에서 비행기를 타고 경유지가
디트로이트 였습니다. 디트로이트는 NWA의 주요 기지 중 하나
였습니다. 공항에는 온통 NWA의 비행기만 잔뜩 있고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는 한쪽 구석에 있더라구요. 나중에 안 사실
이지만 주요 국제 공항은 주요 항공사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분할이 되어 있더라구요. 예를 들면 '디트로이트'나
'미니아폴리스'가 NWA의 주요 기지이고 시카고의 '오. 헤어’는
UA......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시카고에서는 찬밥 신세로 공항 구석 출입구로 탑승을 했는데
디트로이트에서는 중앙으로 내리더라고요. 비행시간이 2시간
18분으로 적혀있어 꽤 거리가 먼 줄 알았는데 한 한 시간 정도
지나니 비행기가 착륙 하더군요. 그러면서 스튜어디스 안내가
현지시각은......'하는데 아차
! 시간대가 한 시간 변경되는구나.'
하고 알았죠. 그리고는 다시 한 1시간을 죽치고 밤 비행기를
타고 '토론토'로 향했습니다. 공항에 내리니 밤 10시가 넘어
한밤중 이더군요. '방 충극'군에게 전화를 했죠. 내일 만나자고
그러면서 호텔 이름을 알려 주었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득달같이 왔더군요. 덕분에 아침을 잘 차려진
한식으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차에 골프백 두 개를
싣고 연습장으로 향했습니다. 시카고의 지하닭장('놀만골프'
였죠 ? 아마, 그 '로렌스'라는 곳에 있는 1층 골프샾, 지하 연습장
으로 된 곳)에서만 연습하다 넓은 광장에서 공이 날아가는
방향까지 볼 수 있는 연습장에서니 저절로 가슴이 뛰더군요.
거기서 공을 한 박스 치는데 '골프채' 잡아본 지 1주일 되는 놈이
날리면 얼마나 날리겠습니까? 이리저리 제 맘대로 날아가는
거지요. 그래도 '헛 스윙' 안하고 공은 맞히니 친구녀석 하는 말이
"됐다. 가자." 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친구가 회원으로 있는
퍼블릭 골프장으로 갔습니다. 요즘은 모르지만 그 당시 토론토의
퍼블릭 골프장은 주민을 위해 1년에 한국 돈으로 50만원 정도를
내면 1년 내내 '그린 피' 없이 무제한 골프를 칠 수 있게 해주는
제도가 있어 이 친구는 공짜, 나의 그린 피-캐나다 돈으로 10불-
인가 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초보니까(초보가 아니라 그 뭡니까
우리나라에서 필드에 처음 나가면 '머리 올린다'라고 하죠 ?
제가 알기로는 본래 이말은 기생들이(한국인지 일본인지는 잘
모릅니다.) 처음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뜻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머리를 올리러 갔으니까) 전동차를 타야 공을 빨리
찾을 수 있다고 전동차를 빌렸죠.
그 다음 '티샷'부터 18홀이 끝날 때까지 어떻게 지났는지는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골프코스 경치가 무척 좋았다는 것과
한국 사람만 전동차를 타고 골프를 쳤고 캐나다 인 들은 자기
백을 각각 메고 이동하거나 손으로 끄는 카트에 얹어 끌고 다니며
골프를 친다는 것입니다. 아 또 하나 큰일날 뻔한 일이 있었죠.
몇 번 홀 인지는 모르고 한 170야드 정도 남은 거리를 두고
3번 아이언(아직 우드를 휘둘러본 적이 없어 멀면 무조건 3번을
잡았습니다.)으로 치려니 그린 위에 앞 팀이 있더라고요. 잘만
맞으면 '온. 그린’이 될 것 같아 망설이고 있는 데 친구녀석 왈
"야, 나 실력에 아무리 잘 맞아도 저기까지 안 가니 그냥 쳐!!!"
였습니다. 그렇다고 "아냐, 날아가 !" 할 수도 없어 냅다 휘둘렀죠.
그랬더니 그게 암팡지게 맞아 그린 위에서 퍼팅하는 앞팀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누가 맞았으면 '캐나다
귀신'이 될 뻔 했죠. 앞 팀 사람들은 아마 자기들이 시간을 끌어
빨리 가라고 일부러 한 줄 알고 두 사람이 씩씩거리며 달려
오더라고요. 필드에 처음 나간 놈이 그게 얼마나 황당한 결례인지
알 턱이 있습니까? (오랜 세월이 지나서 조 폭 앞 팀에게 그런
무례를 저질렀다가 한 1억 원을 뜯겼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얘기도 있을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결례를 했으니까요.) 저는
무조건 "Sorry!" 을 연발하고 친구녀석은 "이놈이 오늘 필드에
난생 처음 나와 지가 어떻게 치는지도 모르고 쳐서 그렇게 됐다.
정말 미안하다."라고 한 5분을 사과하고나니 돌아 가더라고요.
첫 필드 경험 치고는 좀 고약한 경험을 했죠. 그리고는 CN tower
등을 구경 했습니다. 이 때 친구녀석이 어떤 사람을 만나 아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잘 들 있죠?"등의 인사를 한 후 제게 와서
"저 분이 토론토 교육관으로 계셨던 분인데 본국으로 발령 받아
간 지 2년 만에 이민을 왔단다." 하는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죠.
'캐나다가 정말 그렇게 좋은 곳인가? 영사관에서 근무할 정도면
한국서는 '잘 나가는 분'일 텐데 귀국한 지 2년 만에네 완전히 이민을
오다니....' 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나이아가라'라로 갔습니다. 유학때 비자가 없어
못 봤던 'Canadian Niagara'를 원 없이 봤습니다. 나이아가라의
진수는 카나다 쪽에서 바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굴 속으로
들어가서 폭포물 바로 뒤에서 떨어지는 물도 보았구요. '장관'
그 자체 였습니다. 배(Made fo Mist 인가요?)는 또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2박 3일간의 캐나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시카고로 왔습니다. 올 때는 '디트로이트'에서 '시카고'까지
비행시간이 18분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역시 시간대 변경으로
한 시간을 번 거죠.

시간은 계속 잘도 갔습니다. 6주가 길게만 느껴졌는데 어느 틈에
반을 더 지나고 귀국 날짜를 잡아야 하더라고요. 그 동안 시카고를
샅샅이 뒤져(?) 대강의 지리도 익혔습니다. 제가 2년 동안 누비던
맨하탄 처럼 자세히는 몰라도 지금이라도 시카고에 떨어뜨려
놓으면 어든 든 찾아갈 것 같습니다. 바다 같은 미시간호반도
둘러 보았고요. '캣지에비뉴'에 있는 영화관에도 여러 번 갔죠.
그리고 '로렌스'에 있는 목욕탕(한국사람이 운영)에도 갔었죠.
물론 규모야 옛날 동네목욕탕 보다 작지만요. 한 번은 도심에서
링컨에비뉴의 숙소까지 걸어오는데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한 두 시간
반이 걸린 것 같았습니다. 걷다 걷다 나중엔 오기가 생겨 숙소까지
걸었습니다.

그 중간에 한국에 전화를 했더니 협회가 주선하여 두 사람이 더
연수를 받을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잘 되었죠.

그렇게 시카고 연수는 끝이 났습니다.
정말 좋은 연수였습니다.

(2010년 1월 31일 다시 옮김)


2010/01/31 16:24 2010/01/3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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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경제 전망)

 

2010년 시작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만 중순을 넘어서자 다시

불안한 그림자가 몰려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이 미국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면서 출구전략이라는 운을

슬쩍슬쩍 띄워보았지만 금융 시장의 반응은 별로였습니다. 자만이 깔려 있다는

겁니다.

 

그러던 차에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 스트리트’를 향해 포문을 열었습니다.

2008년과 2009년 사이 2년간 미국 (대형)은행 살리기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 부은 미국의 대통령이 구제금융을 받았던 대형은행들이 혼자서 일어설

상태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규제의 칼을 휘두르기 시작 했습니다.

은행 살리기에 납세자가 볼모가 되는 일이 다시 생겨서는 안 된다.라는

말과 함께 대형 투자은행들은 자기자본으로 위험자산에 투자하지 말라.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대형은행의 예금 시장 점유율도 상한선을 정해

제한하겠다고 하며 특정은행의 부채규모도 제한 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투자은행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으나 일단 국민여론을 업고 있으니 타격은

클 것입니다. 당장 발표 후 이틀 연속으로 다우지수가 곤두박질 쳤습니다.

 

일부 분석가는 구체적인 규제 방안이 확정되려면 많은 시간(약 5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며 그 기간 동안 은행들은 빠져나갈 궁리를 할 것이므로

실효성이 없을 것으로 전망하기도 합니다만, 파장은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별로 기분이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미국의 지난 11월 신용카드

연체 율이 사상최고치에 도달 했다고 합니다. 그냥 넘기기엔 좀 우려가

됩니다. 전반적인 경기는 회복될지 몰라도 개인의 경기는 더 어려워지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양상입니다.

 

한국은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는 입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과거(1990년대)의

경험을 살려 최근의 경제위기에서 가장 먼저 벗어나는 나라 중의 한 나라가

될 듯이(실제로도 먼저 회복을 보였습니다.) 자신에 차 있더니 미국과 영국의

합작으로 대형 투자은행 길들이기와 중국의 긴축(은행 지급준비율 인상 등)

정책이 발표되자 주가는 여지없이 100p 이상 하락하고 환율은 반등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대외의존도(수출 의존도)가 그만큼 높고 아직 완전한

회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조금 걱정되는 부분은 한국의 정치까지 경기회복을 더디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 입니다. 4대강 살리기세종 市 문제가 없었으면

국회의원님들은 무얼 하실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 입니다.

 

정쟁은 어디서나 있습니다. 현재 제가 사는 캐나다도 힘을 모아 위기를

벗어나야 할 판에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별 짓을 다 하더군요.

연방 수상이 약 2개월 간 예정으로 국회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휴회인지

정회인지 정확히는 모르나 야당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하퍼 수상, 국회는

귀하의 개인 집이 아니니 빨리 문을 여시오!라고 공격을 하더군요.

 

캐나다도 외부상황에 초연할 수가 없는 나라 입니다. 대형 투자은행에 대한

규제문제는 피했습니다만(캐나다에는 대형 투자은행이 없고 어찌 보면

금융자율화 정도가 한국보다 못하다. 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보수적

입니다.) 원자재가격 하락 및 미국 경기 침체상태 지속 등에는 직접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원유, 금 등의 자원가격 상승에 힘입어 CDN$ 1: U$ 0.98

가까이 가던 환율이 1월 말에는 U$ 0.93 정도까지 가치가 하락 했습니다.

수출에는 조금 도움이 되겠지만 일반 소비자는 조금 어려워 질 것 같습니다.

 

이런 일도 있구나...... 하는 애기하나 하지요.

2010년 동계올림픽 스키 종목 대회가 열리는 사이프러스라는 스키장이 있습니다.

금년겨울은 기온이 높아 눈이 많이 오지 않았습니다. (보통 겨울이 雨期이고,

낮은 곳엔 비가와도 높은 슬로프엔 눈이 쌓여서 예년 같으면 적설량 누계가

5미터가 넘었습니다.등의 발표를 해야 하는데 금년엔 눈은커녕 비만 오고 그나마

비가 오는 날도 드물어 눈 부족 사태가 났습니다. 부랴부랴 일반인 출입을

금지시키고(그나마 쌓여 있는 눈(雪)을 흩어지게 할까? 걱정되어), 인공제설기

눈을 계속 만들어도 부족하여 산 정상 부근에 있는 눈을 트랙터를 동원하여

아래 쪽 경기 장으로 옮겨서 겨우 대회를 치르는 모양입니다.  조직위원회

사람은 걱정 마십시오 하지만 별 일을 다 봅니다.

 

 

항목별 점검을 하겠습니다.

 

(주식 시장)

2010년 시작과 함께 기분 좋게 시작한 각국 증시는 1월 중순까지는 순풍에

돛 단 듯이 잘 나갔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대형 투자은행에 대한

규제방침을 발표하자 주가는 크게 요동쳤습니다. 2일간 약 5%가 빠졌습니다.

(미국 과 캐나다 증시).

 

한국은 이 발표에다 중국이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대출규제 등의 조치를 취하는

양면공격을 받는 형국이 되어 1,700선에 안착한 종합주가지수가 이틀 만에

1,600 초반 수준으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월말에는 한때 종합주가지수 1,600 선이

무너지기도 했습니다만 1,602 로 1월을 마쳤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동안 잠잠하던

지정학적 요인(북한문제)도 슬금슬금 나오고 있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게 북한

당국자들의 언행 입니다만 최근엔 더 종잡을 수 없게 만들고 있는 양상 입니다.

매일 번갈아 가면서 강. 온 정책을 쓰는 듯 합니다. 주식시장도 과거처럼 화끈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지만 일이 발생할 때마다 시장은 출렁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북한의 움직임에 따라 상. 하한가 종목이 100개 이상씩 나오는 게

예사였습니다.)

 

2월 주식 시장은 (각국 정부금융시장간의)힘겨루기 양상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 됩니다. 미국 정부의 대형 투자은행에 대한 후속조치에 따라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이고 조치의 강도에 따라 다우 지수 10,000p 아래로 하락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한국도 미국, 중국 정부의 조치에 따른 외적 요인과 국내 정책에 따른 내적

요인까지 더하여 가장 변동이 심할 것으로 전망 됩니다.

종합주가지수 1,500 에서 1,800 사이에서 움직일 것 같습니다.

캐나다도 외부요인에 의한 영향을 많이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2월 주가지수는

현 수준 유지가 예측되나 미국주가가 많이 하락하면 토론토 지수 11,000p

아래로 하락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금융시장에 대한 접근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듯 합니다.

 

 

(환율)

달러 하락세가 지속되고 원화 강세가 기대되었으나 미국의 금융시장이 출렁이자

오히려 미국 달러화는 강세 통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올해 초 대부분의 나라들이 경기 하락은 작년에 이미 끝났고 현재의 침체

상태에서 언제 상승으로 돌아설 것인가?하는 문제로 고심했으나 해가

바뀌면서 분위기가 또 다른 긴장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직까지는 세계경제를

이끌어 가고 있고 또 세계 최대 소비 처인 미국의 조짐이 안심하기엔 아직 이르다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또 상업용 부동산가격 하락과 개인 신용카드 연체 율

사상최고치를 기록했다는 소식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또 유럽의 여러 나라들 중 상당수의 국가가 안심할 상황이 아니고 어쩌면

이들 나라 가운데 새로운 금융위기를 초래하는 국가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권위가 많이 약화되었습니다만 아직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인정되는 미국 달러貨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서 1월 하순부터

미국 달러화 강세 장이 되었습니다.

 

2월 중에는 미국 달러화 강세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 됩니다. 국제 금융시장이

불안할수록 미국 달러에 대한 수요는 더 증가하는 것이 요즘 상황 입니다.

 

 

(금리)

미국, 한국, 캐나다 세 나라의 기준금리는 변동이 없었으나 상황은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는 기준금리를 올릴 생각은 없으나 캐나다가 조금 먼저 하반기에

올릴 것으로 예상되나 주택가격이 조금 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면 2/4분기

중에 인상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은 인상 시기만 남은 듯 합니다. (현재 상황에서)

만약 미국과 중국의 정책들이 한국에 악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되면

금리 인상은 없겠지만 별 영향이 없다고 판단되면 늦어도 3월에는 인상을 시작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각국의 중앙은행 기준금리 외 다른 금리(회사채금리, 대출 금리 등)들은 조금씩

오르고 있습니다.

 

 

(부동산 시장)

2010년 캐나다 밴쿠버 일대의 부동산 시장은 조짐이 조금 수상 합니다.

작년 하반기에는 일정기간 동안 리스팅(listing) 숫자와 매매체결(Sold) 숫자의

비율이 100: 70 이상의 수준이었으나 금년 1월 중에는 100:30 전후에서

움직였습니다. 다만 월말에는 이 비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만 2월의 상황을 봐야

금년도 방향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위의 상황만으로 보면 작년 같은 활황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는

1월이라는 계절적인 요인을 감안하면 쉽게 결론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작년 하반기의 활황이 계속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미국은 또 다른 하락조짐이 보이고 있고(일시적인지 추세인지는 불확실 합니다.)

한국은 강 보합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나라 모두 부동산 시장은 2월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2010년의 시장 방향을

결정지을 가능성이 큰 달 입니다.

 

이상 입니다.

(2010. 1. 31.)

2010/01/31 13:01 2010/01/31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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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민주 2010/02/01 00: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세한 경제뉴스가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있어
    잘 보았습니다. 참고도 되겠군요.
    멀리에서 보내주신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 연 초 부동산 시장 ***

2010년 1월도 하순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캐나다 '밴쿠버 지역' 부동산 시장의 조짐이 조금 수상 합니다.
아직 확실한 방향을 나오지 않았고 결론을 내기에는
성급한 감이 있습니다만

작년 하반기의 열기가 조금 식은 느낌 입니다.

1:1 또는 100: 75 이상의 실적을 보이던 리스팅(Listing) : 팔린물건(Sold)의
비율이 2:1 이하 평균 3:1의 수준을 보이며 매물이 쌓여 갑니다.
물론 연초 인 점을 감안 하더라도 좀 '주춤'하는 느낌 입니다.

바이어들이 '숨 고르기'를 하는 듯한 양상 입니다.

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간단한 언급 입니다.)

2010/01/25 08:02 2010/01/25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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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스쳐가기)

 

***** 유럽 3개국 스쳐가기*****

 

1985년 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중앙투자금융(당시)의 사장님이

FCI(Factors Chain International)에서 개최하는 연차 총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FCI 는 국제팩토링 업무를 취급하는 회사들의

연합으로 비슷한 기구가 하나 더 있었으나, 대부분의 한국회사

(주로 투자금융회사 들이 업무영역 확대를 위해 국제팩토링

업무를 취급하기 시작 했습니다.)들은 FCI 에 가입 했습니다.

 

그 때의 초청은 '중앙투자금융'이 가입 신청을 해 놓은 상황이라 총회

초청을 받으면 정말 큰 하자가 없는 한 정회원으로 가입이 된다는

귀 띰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총회의 참석은 다른 나라 회원

회사에 중앙투금을 선 보이는 자리였습니다. (신참으로서)

 

회사 내에선 누가 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되었습니다. 물론

주 참석자는 당연히(본인이 고사 하지 않는 한) 사장님

이었습니다. 수행은 누가 할거냐? 한다면 누가? 였습니다.

결국 제가 수행을 하게 되어 난생처음 유럽 땅을 밟아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투금사 사장 3명, 수행실무자 3명이 가게

되었습니다. 회사는 4곳 한 회사는 실무자만, 또 한 회사는

사장님만 이었습니다.

 

일정을 짰습니다. 회의는 독일의 '뮌헨'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앞으로 거래할 (이미 가입되어 있는)회사들도 새로 가입예정인

한국의 회사들에게 오는 길에 자기네 회사를 방문해서 앞으로

업무협조 논의도 하고 싶다는 초청도 꽤 있었습니다.

아예 참가예정인 모든 회원 사에게 ‘몇 월 며칠에 초대합니다.’라는

초청장을 보내 온 회사도 있었습니다.

여러모로(항공편, 초청회사 및 방문회사 등) 검토한 끝에

‘프랑스. 파리’(당시 대한항공 직항 편이 있었습니다.)에 가서

회원 사 방문을 하고 독일의 뒤셀도르프 회사를 거쳐 회의가

열리는 ‘뮌헨’ 에 가서 회의 참석 및 정식 가입을 하고 ‘덴마크’와

‘일본’에 있는 회원 사를 방문하고 귀국한다는 일정을 확정 짓게

되었습니다.

 

출장 첫 날, 공항에서 파리 행 대한항공에 몸을 실었습니다.

보딩브리지를 지나 비행기에 들어서자 "이따 내려서

뵙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사장님은 좌측으로(1등석), 저는

우측으로(이코노미) 갈라졌습니다.

 

‘앵커리지’! 그간 두 번 기착을 했던 곳이지만 처음엔

유학 갈 때 미국 '입국심사'를 위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내렸고,

귀국 때는 또 다른 설렘으로 제대로 구경도 못한 ‘앵커리지’ 공항

이었는데 이번 만은 아주 편했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구경을 했죠.

6월의 앵커리지 공항 공기는 상쾌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맑은 공기가

가슴속의 찌꺼기를 다 훑어 내는 듯이 시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비행기는 대 여섯 시간을 날아 '드골'공항에 도착

했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유럽에도 사람 이름을 딴 공항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엔 제가 문외한 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 이름을 딴 공항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지명을 딴 공항만

존재하지요. 언제쯤 가야 우리도 자랑할 만한 사람의 이름을 딴

공항을 하나 가져 볼까요? 아마 불가능 하거나 요원할 겁니다.

누가 용케 이름을 붙여 놓은 공항을 만들었다고 해도 정권이

바뀌면 또 개명을 해야 한다고 온 나라가 난리 법석을 떨게 분명

하니까요. '광화문' 현판도 그렇습니다. 정말 바꿔야 한다면

경복궁이 제대로 복원되고 광화문도 처음의 제 위치에 옮겨질 때

바꿔도 문제가 없고 또 정말 역사 바로 세우기를 원한다면

최초에 광화문을 지었을 때 제일 먼저 현판을 썼던 분의 글씨를

가져와서 달면 되지 '박 정희'(개인적으로는 원수의 반열에 드는

사람입니다.)의 글씨는 안되고 경복궁이나 광화문과는 상관도

없는 '정조'(그가 광화문을 중건 했다거나 고쳤으면 몰라도......)의

글씨는 여기저기서 모아와서 붙여도 된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집자는 신문의 '제호'나 만들 때 가끔 쓰는 걸로 알고 있었지

역사적인 현판에 여기저기 글자를 모아와서 붙인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 입니다. 이러니 공항에 누구 이름을 붙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기 겠습니까? 이 글을 처음 쓸 때 논의가 있었는데

현재 현판엔 누구의 글씨가 있는지 모릅니다.

 

입국신고를 하고 나오니 제 나이 또래의 남자가 대학노트 크기만한

종이에 제 이름을 써서 들고 있더군요. (그 분이 3일간 안내를 멋지게

해줄 분 이었습니다. 처음 가는 길이고 사장님을 모시고 가느라 걱정이

되어서 종합상사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부탁을 했더니 안내인을 주선해

주었습니다.)

 

호텔(아마 이름이 '까스띨리옹' 인가 했습니다. '엘리제'궁

근처에 있는 오래됐지만 품위가 있었습니다.)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시내구경을 했습니다. "파리 시내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SKY LINE 을 맞추기 위해 일정높이(아마 7층) 이상의 집을

지을 수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에펠 탑에서 내려다 보면 시내의

대부분 건물의 지붕을 내려다 볼 수가 있습니다......"로 시작된

안내는 정말 본받을 만 했습니다. 그는 아르바이트로 가이더를 하고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한다고 했습니다만, 가이더 생활을 위해

유명한 역사학자가 쓴 '프랑스 역사'책을 두 권(시각을 달리하는

두 권을 읽고 자기 나름대로 정리를 했다고 합디다.)을 읽고 관광

안내책자를 수도 없이 읽었다고 하였습니다. (새로 나올 때 마다

꼭 읽어 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인지 그가 설명하는 요소요소는 그냥 봐서 즐거운 게

아니라 역사적인 유래 등이 곁들여져 있어 아주 매력적인 안내가

되어있었습니다.

 

‘삐갈 광장’(우리나라로 치면 용산 역 이나 청량리쯤 되나요?

몸 파는 분들이 많은 곳. 지금은 잘 모르지만……) 인가를 거쳐

'몽마르뜨'언덕에 갔습니다. 점심도 먹을 겸 언덕 모퉁이의 식당에

들어가 창가에 앉았습니다. 그래야 지나 가는 사람들 구경도 할 수

있으니까요. 점심을 뭘 먹었냐고요? '개구리 뒷다리 요리'를

시켰습니다. 앞에 앉은 사장님 눈이 똥그래 지시더라고요.

"박 대리, 그거 먹을 줄 아나?" 하시길래 "아닙니다. 한번

시도해 보려 구요." 했지만 결과는 '달팽이 요리' (옛날에 한번 먹고는

다시는 주문하지 않는 요리명단에 올렸죠.) 처럼 참담했습니다.

맛도 별로고 양도 작아 오후 내내 배고파 했습니다. 그리고 나와서

거리의 화가가 그린 소품(?)을 하나 샀습니다. (지금도 이 그림은 딸애의

방에 걸려 있습니다만, 그림을 아는 사람은 구별을 해 내더라고요.

싸구려라고......) 화가의 말은 '노르망디'지방의 풍경 이라는데

안 가본 저야 알 수가 있나요.

 

그리고 '에펠 탑', 유람선(센강), 센 강 강변을 산책했죠.

1985년의 6월 센 강 강변엔 일광욕을 즐기는 청춘들이 많이도

있었습니다. 그 중에 눈길을 확 끄는 두 여자가 있었으니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엎드려 등 짝을 태우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잘 쳐다보면 혹시 뭐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에 가까이

가면서 유심히 쳐다보는데......"박 대리, 뭐 보노?" 하시는 사장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아,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좀

아쉽더라고요. '조금만 더 보면 혹시......'

 

'노틀담 성당'엘 갔습니다. 도심 가운데 그리고 도심을 가르는

‘센’강 중간의 섬에 있는 그 성당은 교인보다 관광객이 더 많이

찾는 명소중의 한곳 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역시 성당 안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습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성당 안을 비추는 햇빛도 그랬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평일 오후에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토록 간절하게 기도를 올릴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저도 초에 불을 붙여 촛대에 꽂았습니다. 그 촛불은 이미 꺼져

있겠지만 저의 기도는 하늘에 닿았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노틀담 성당은 뒤에서 봐야 진짜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라는 가이더의 말에 '뒤 꽁무니가 무슨......' 했습니다만
배(유람선)를 타고 가다 쳐다본 성당의 뒷모습은 정말 멋이
있었습니다. (이 때 찍은 사진이 아직 집안 어딘가에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무덤.(여기서 가이더의 설명이 '나폴레옹 전기'보다
더 재미 있었다고 하면 '웃기지 마라 !'하시겠지만 정말입니다.
지하에 안장된 '대리석 관'과 전시관을 둘러 보는데 한 시간 반이
걸렸으니까요. 구경보다 '설명'듣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영웅도 죽으면 그만인 것을...... 물론 후손들이
저렇게 기념관을 만들어 주는 정도면 그는 영웅임에 틀림이
없습니다만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승자의 역사'를 위해
죽어간 졸병이 그 얼마며, 또 적군(?)의 사망자는 또 얼마
입니까? 이리저리 휘둘리다 죽어간 민초들만 불쌍하죠.

'베르사이유 궁전'(이건 빠리 교외에 있는데 정말 '호화로움의
극치'라고 해도 될 정도 였습니다. 궁전 내부나 정원의 치장이
20세기에도 빛을 발하고 있으니 저 궁전에 사람이 살던 시대에는
얼마나 휘황찬란 했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침실'이 아주
휘황찬란 하던데 거기서 잠이 제대로 들었는지 의문이었습니다.
각종 치장이나 그림(천정에도 그려져 있었습니다.)에 정신을
뺏기다 보면 언제 잘까? 하는 걱정이 들 지경이었죠.) 그리고
나폴레옹의 약탈품의 집합소인 '루브르 박물관' 미술책에서
보던 조각, 모나리자 등 눈 청소 확실하게 했습니다.

지중해산 조기(정말 제 팔뚝만 했습니다.)와 김치찌개에 곁들인
'와인', 저녁이 환상적 이었습니다. 그 때 먹은 '조기구이'의 맛은
아직도 입안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다시 파리에 가면 그 식당을
찾아가서 꼭 조기구이를 한번 더 먹을 겁니다. 오후 내내 고팠던
배를 채우고 호텔로 왔습니다.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하고
방으로 돌아왔지만 뭔가 허전했습니다. 더구나 내일은 독일의
'뒤셀도르프'로 날아가야 하는데 파리의 밤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는 게 허전 했습니다. 떠나기 전에 친구 ‘김 우진'군이 제게

해 준 말이 생각났습니다. "빠리에 가면 '물랭루즈' 나

'Crazy Horse' 같은 유명한 쇼가 있는데 그건 꼭 한번 볼만해.

시간 내서 구경 해봐."

그랬습니다. 쇼가 보고 싶었습니다. 무조건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까 오후에 지나다가 호텔에서 멀지 않은 '샹젤리제'거리에서
'리도(LIDO)'라는 간판을 본 기억도 있기에 달렸습니다.
헐레벌떡 도착하니 줄이 꽤 길었습니다. 표를 사려하니 안내원이
"예약을 하셨나요?" 하고 묻길래 "아니."했죠. 그랬더니 예약을
하지 않으면 테이블을 줄 수 없고 뒤의 바에서 구경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속으로 "지금 안에 들어가 쇼를 보는 게 중요하지
테이블 이면 어떻고 뒷줄의 '바(bar)'면 어떻습니까?" 하면서
100프랑 인가를 주고 표를 샀죠. 들어가니 그 표도 음료수
두 잔까지는 주는 것 이었습니다. 위스키를 한잔 하는데 불이
꺼지고 쇼가 시작 되었습니다. 무희들은 왜 그리도 몸매가 좋고
예쁜지요...... 팬티 한 장 걸치고(물론 화장과 깃털 같은 치장은
화려하게 했죠.) 펼치는 연기와 춤은 저의 넋을 홀라당 앗아가
버렸습니다. 또 보고 싶은 파리의 쇼 였습니다. 후에 귀국해서
들은 얘기 입니다만 Crazy Horse 의 쇼는 '훨씬 야하다.'고
합디다. 파리에 가시면 꼭 한번 보십시오.

뒤셀도르프 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독일에서 몇 번째나 큰지
몰라도 파리에서 바로 가는 비행기가 있는 걸로 봐서는 꽤나 큰
도시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경제도시로 큰 편 이라 합디다.) 호스트 회사에서 지정해 준
호텔로 가니 일행이 우리뿐 아니라 상당히 많았습니다. 체크인
후에 호텔 식당에서 먹은 점심...... '소태'같았습니다. 독일사람이
짜게 먹는다는 것을 알기는 알았습니다만 그렇게 짜게 먹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수프가 소금물 같았습니다. 메인디시로 나온
음식도 소금을 하나도 치지 않았는데 짰습니다. 반도 못 먹고
포기했는데 사장님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빵만 먹었죠.
오후에 초청회사의 프레젠테이션 과 견학을 끝내고 시내관광을
했습니다. 큰 도시는 강을 끼고 있고 뒤셀도르프를 관통하는
강도 한강 만큼이나 넓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고 정작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그날 저녁에 먹은 '수십 가지 소시지' 였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선택했겠습니까만 저녁을 먹으러 간 식당이
의외로 허름한데 대해 약간은 실망했습니다만 조금 후에 나온
음식이 그 실망을 한방에 날려 버렸습니다. 무제한 제공되는
갖가지 소시지와 맥주에 정신이 팔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었습니다. 한국서 같이 간 실무자들과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한국어'로 그리고 다른 회사 사람들과는 (잘 안 되는)'영어'로......
그래도 대강의 뜻은 서로 통하는지 웃을 때는 웃고 맞장구 칠
때는 "Are you sure?" 하는 맞장구도 쳐 주었습니다. 소시지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고 그 맛의 '진수'도 만끽
했습니다.

'뮌헨'으로 가는 날 입니다. 뒤셀도르프에서 프랑크 푸르트
까지는 '루프트한자'(독일 항공사)에서 운영하는 기차를 타고
'라인 강'을 따라 경치구경을 하고(중간에 퀠른, 본, 같은 도시와
'로렐라이'같은 명소를 지난다고 했습니다.) 프랑크 푸르트에서
비행기를 타고 뮌헨으로 가는 조금 복잡한 일정 이었습니다.
뮌헨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버스가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또 눈이 번쩍 했습니다. 상반신을 벗고 일광욕을 하는 청춘이

왜 그리도 많은지요?

FCI 총회 기간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중앙투자금융주식회사가
FCI 정회원으로 가입했다는 것뿐입니다. 그 외 많은 얘기가 오가는

회의의 연속 이었습니다만 아직 업무 시작도 안 한 회사가

이미 거래를 하면서 발생한 문제해결을 위한 회의에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알겠지만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뮌헨의 다른 기억은 '쌍둥이 표' 칼을 산 것과 "호프. 브로이. 하우스"라는

무지 막지 하게 큰 맥주 집(한국의 큰 호프맥주 집에 가면 이 집 사진이

벽에 많이 붙어 있습니다. 중앙무대에 밴드가 나팔을 불어대고

홀에 가득 찬 사람들이 맥주에 원수나 진 것처럼 마셔대는 사진

말입니다.)에서 여자 종업원이 한 손에 1,000cc짜리 조끼를

다섯 개씩 열 개를 한번에 날라다 주는 그 생맥주를 취하도록

마신 기억은 있습니다. (그 여자 종업원은 힘도 좋습디다.)

참 한가지 빼먹을 뻔 했습니다. 총회기간 중 하루 투어와 오페라

감상이 있었습니다. 투어는 뮌헨에서 버스로 한 시간 가량 가면

산 중에 위치한 '노인테. 슈바인’성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바그너 인가요 유명한 음악가가 작곡한 '로엔그린'의 무대가

되던 성 이라고 합디다. 그 중에 나오는 곡은 요즘도 결혼식에

나오는 곡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성에서 안내하는 아가씨가 하도

예쁘길래 사진을 찍었더니 벽에 그린 그림의 물간이 바랜다고

플래시를 터뜨리지 말라고 경고를 하더군요. 돌아오다 산간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독일 사람들이 즐겨 쓴다는 모자를 하나

샀는데 그게 어디로 갔는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페라는

'라보엠' 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누군가가(주인공 이름을

모르니까요. 극중의) "미미!"하면서 길게 뽑으니 불이 꺼지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오더라는 기억이 있습니다만 그 오페라는

훌륭했습니다.

 

덴마크 '코펜하겐'엘 갔습니다. 첫날은 저녁 때 당시 주 덴마크

대사님 댁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 것 외는 특별한 일이 없었기에

관광 겸 산책을 나갔습니다. 비행기가 오전에 도착 했기에 점심도

먹어야 했습니다. 이리저리 산책하다 '인어공주' 동상에 갔습니다.

'안데르센'을 기념하기 위한 동상이라는데 의외로 초라한

느낌이었습니다. '성 개방'이 잘된 북구라 그런지 길가에

'섹스용품'을 파는 가게도 즐비했습니다. 1983년도의 뉴욕

맨하탄 42가만큼은 못하지만요.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외국에서 무난한 점심을 먹으려면

'중국집'을 찾으면 된다고 하시면서 사장님이 앞장서 들어간 곳은

중국집이었습니다. 주문도 잘했고 음식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사장님께서 '단무지'를 찾으시는 겁니다. "저는 그 걸 영어로

뭐라는 지 잘 모르는데요......"(그 후에 알았습니다.) 그러자 종업원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볼펜으로 메모지에 大根이라고

썼습니다만(저는 '단무지'를 한자로 대근 이라고 쓰는 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종업원은 宇宙 語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래디시.피클'이라고 했으면 알아들었을지 모릅니다만 그때는

'무'가 영어로 뭔지 몰랐습니다. 몇 번 시도하다 포기하고 있는

반찬만 먹었습니다.

호텔로 와서 잠시 쉬다 5시에 만나기로 하고 각자 방으로 들어

갔습니다. 호텔의 안내서를 펼쳐보다 야한 옷차림을 한 여자의

사진과 함께 '에스코트. 서비스’라는 광고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어떤 건지 궁금해서 전화를 돌리는데 밖에서 누가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문을 여니 사장님이 뭘 하나 사야겠는데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포기하고 나섰죠. '티볼리공원'을 처음

봤습니다. '놀이공원의 시초'라고 하더군요.

 

'연어 버터구이', 대사관저에서 먹은 저녁요리인 연어구이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대사 사모님의 솜씨가 좋아서 였겠지만

그때부터 제가 '연어킬러'가 되었습니다.

 

코펜하겐에서 동경으로 날아가는 SAS 항공사의 747기는 제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자리가 비어서 인지 이코노미

좌석을 Business로 up-grade 시켜 주었습니다. 난생 처음

2등석 비행기를 탔으니까요. 기내식도 메뉴가 있고 공짜로 주는

술도 좋은 것 같았습니다.

 

'동경', 바로 옆에 붙어있는 나라인데 그 때가 처음 이었습니다.

우선 비행기에서 내리니 푸근 했습니다. 얼굴모양도 비슷하고

말도 자주 듣던 말이라 의미는 몰라도 당황하지는 않게 되더

라고요. 반 나절 투어를 하면서 동경의 겉핧기를 했고 저녁에

짬을 내어 당시 일본서 공부하던 '장 형석'군을 만나 일본의

선술집에서 일본 분위기를 만끽했고 또 신주꾸인지 록본기인지

어떤 건물 옥상에서 벌어지는 '여자스모'를 맥주를 홀짝이며

구경 했습니다. 코끼리 같은 남자들이 하는 '스모'보다 여자가

비키니를 입고하는 스모가 훨씬 더 야하다는 그 때 알았습니다.

 

이렇게 15일간의 유럽, 일본 스쳐가기는 끝났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꼭 유레일 패스를 끊어서 자세히 돌아봐야겠습니다.

 

2010/01/25 07:53 2010/01/25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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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 타고 미국 남북 종단****


2004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12월 31일에는 지금은 무얼 하는지 모르는 '페루'에서 유학을


온 '데오도르'와 '타임. 스퀘어’에서 그들처럼 '카운트. 다운’을


하면서 새해를 맞았고 '이제 마지막 학기만 남았다' 고 생각하니


또 좀이 쑤시기 시작 했습니다. 지난 여름의 대륙횡단의 기억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젠 마이아미까지 갔다가 다시


보스턴까지 올라가서 뉴욕으로 되돌아 오는 남북 종단을 꿈꾸게


된 것입니다.


10일 예정으로 또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번에는


'Grey-Hound" 입니다. 지난 번에 빨간 버스를 탔으니 이번엔


파란버스 입니다. (물론 이 두 회사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나


정류장은 같이 사용 하더라고요. (2005년인 지금도) 이번엔


겨울이라 얼어 죽을까 봐 옷을 단단히 입고 탔습니다. (이게


플로리다에서 짐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유학 간다니까


무역회사에 다니는 친구녀석이 가죽잠바 하나를 주었습니다.


뉴욕시의 겨울에 아주 유용하게 썼습니다. 그걸 플로리다에


가면서 걸치고 갔습니다.

버스는 링컨 터널을 지나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


했습니다. 이번에도 필라델피아는 어김없이 지나더군요.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워싱턴'을 지나 계속 남으로 갔습니다.


델라웨어 반도를 지났으면 했지만 이번 버스는 그리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그리로 가면 델라웨어 반도 끝에서 다시


해군기지가 있는 '노폭'으로 가야 하는데 그 길이 죽여준다는 것


아닙니까? 바다를 가로 지르는 길인데 델라웨어 반도 끝--다리


-섬- 다리 -섬-다리-노폭(아마 Norfolk 일 겁니다.)이렇게 되는


길인데 다리가 워싱턴 브리지(뉴욕-뉴저지)나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처럼 높이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수면에서 한 3-4미터쯤


떨어져 있으니 차를 몰고 가면 차가 수면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 얼마나 째 지겠습니까? 저도 딱 한번 그 길을


지나가 봤습니다. 버스는 남으로 달리며 해를 서산 너머로


보냈습니다. 아마 애팔래치아 산맥을 한 밤중에 넘은 것


같았습니다. 이때는 운전기사 바로 뒤에 앉아 있었는데 한 밤중에


갑자기 버스 앞으로 황소만한 물체가 휙 지나갔습니다. 기사님도


조금 놀랬는지 버스가 휘청 했습니다. 저는 까무러치듯이 놀랬죠.


사고 나는 줄 알았습니다. 다행히 그때 느린 속도로 갔기에


사고가 나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조금 더 가서야 연유를


알았습니다. 길 가 표지판 노란 정사각형을 마름모처럼 세워놓은


노란 표지판 안에 사슴 한 마리 그려진 것을 보고야 길에서 사슴과


충돌할 수도 있다는 친구의 얘기가 생각 났습니다. 진짜 사슴이


길을 가로질러 가더라니까 요.


그렇게 버스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아틀란타에 도착 했습니다.


미리 전화로 연락을 해 두었기 때문에 버스 정류장엔 '최 선호'


군이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최 군은 고교, 대학 동창으로 그 때


조지아 대학(UGA 라고 하나요?)에서 박사과정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녀석의 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가니 최군의


아파트(아마 기숙사 였을 겁니다.)가 나오고 거기서 오랜만에


남(?)이 해주는 한국음식을 맛 보았습니다. 맥주를 한 3캔씩


마셨나요? 언제 잠 들었는지 모르게 자고 아침을 먹고 다시


아틀란타 버스 정류장엘 갔습니다. (이때를 생각하면, 그 당시


제게 친절을 베풀었던 모든 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제가 그런 위치에 있다면 꼭 마중을 나가 보답할 것을 여기서


약속 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마이아미'행 버스를 탔습니다. 1월 임에도 불구하고


아틀란타를 지난 버스 속엔 '에어컨디셔너'가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뉴욕서 입고 탔던 가죽 잠바를 벗었지만 긴 팔


티 셔츠도 덥더라고요. 그렇다고 또 벗을 수도 없고... 그때부터


더위와 씨름이 시작 된 겁니다. 그래도 냉방이 잘된 버스라 타고


있을 때는 괜찮았죠. 드디어 버스가 '플로리다'반도에 접어


들었습니다. 잭슨빌, 올란도, 그리고 이름만 들었던 여러 비치들......


데이토나, 포트 로더데일(?) 등 등...... 올란도를 지나면서 버스


창 밖으로 바라본 디즈니월드의 둥그런 돔의 경관은 장관


이었습니다. 11년 만에 기어이 그 속에 들어가 보았습니다만


처음 그 걸 봤을 때 그게 뭔지도 모르고 '아, 디즈니 월드 구나!'


하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돌려가며 쳐다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드디어 버스는 마이아미 터미널에 도착 했습니다. 워싱턴처럼


버스 정류장이 있는 지역이 어둡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우중 충' 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 묵을 곳을


찾느라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서울식당'이라고 쓴 간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중급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습니다. 겨울에 기온 변화가 커서 그런지 몸 상태가 좋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한 게 저녁을 먹고 일찍 자고 내일 관광하자.


였습니다. 제가 플로리다주의 마이아미에서 김치찌개를 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먹었습니다. 과연 한국인은 없는 곳이


없더라고요. 식당주인 아줌마에게 '주로 어떤 분들이 손님이냐?'


하고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을 해 주더라고요. 저는 교민 또는


관광객 이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주 고객이 '선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마이아미가 항구 더라구요. 저는 그저


'환락이 겸비된 바닷가'로만 생각했었거든요?



일찌감치 들어온 호텔 방에서 맥주를 홀짝이면서 TV를 켜니


'American Music Awards' 시상식을 하더라고요. 이날 저는


'마이클. 잭슨’의 뮤직 비디오를 처음 봤습니다. 근데 보통 때는


'노래는 들으면 됐지 무슨 비디오?' 했는데 잠깐 보여주는 것


이었는데도 볼만 하더라고요. 이 날 '마이클. 잭슨’이 상을 7개를


받더라고요. 그 기록이 깨졌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왜 그런 상을


받으면 수상 소감 한마디씩 하지 않습니까? 자기 철학을 얘기


한다든지...... 우리나라 연예인 처럼 (소속 사 누구 사장님, PD 님......


이런 식으로 사람이름 줄줄이 얘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요


그리고 7곱 번째 나온 마이클 잭슨의 말이 "I have nothing to say


any more." 였습니다. 그 말이 문법적으로 맞았는지 여부는 제가


알 바 아니고, 정말 그럴 겁니다. 7번이나 나와 각각 다른 말을


한마디씩 하려면 마지막엔 '할 말이 없을 겁니다.'

(그 '팝의 황제'도 이글을 옮겨쓰는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이아미의 밤은 깊어 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느즈막히 지난 밤에 사온 것으로 요기를 하고


바닷가에 가 보기로 작정하고 호텔을 나섰습니다. 미리 읽어둔


여행 안내서에 따라 비치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 안은


그야말로 별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피부색깔, 나이, 옷 차림


등등......버스가 바닷가로 접어들어 그 기나긴 모래톱을 우측에


끼고 북으로 달리기 시작 했습니다. 20층 이상되는 호텔들이


줄지어 서서 버스 승객들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구요. 그 버스


속에서 백발의 할머니 두 분이 나누는 얘기가 인상적 이었습니다.



"어디가?"


"비치."


"뭐 하러?"


"젊은 애들 구경하러......"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젊고 발랄한 젊은 애들이 보고 싶을까?


그 들을 보면서 삶의 의지를 가지게 될까?' 하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었습니다. 중간쯤에서 내려 바닷가로 가 보았습니다. 1월


중순이라 그런지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닷가에 늘어선 호텔의 수영장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습니다. 1월의 태양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버스 속의 할머니들처럼 단지 젊은 애들을 보려고 간


사람들도 있었겠지만요.



마이애미에서 잠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Key West 를 보고 갈


것이냐? 아니면 휴스턴엘 들르느냐?' 휴스턴에는 대학 동창인


'고 길석'군이 주재원으로 나와 있어 한번 봤으면 하였고, 거기를


들르면 시간(보름 짜리 버스표를 끊었기 때문에......)내에 뉴욕엘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남은 여정이 뉴우올리언즈, 휴스턴


그리고 북으로 가서 보스턴, 가능하면 메인주까지 올라갔다 다시


뉴욕으로 오려면 빠듯 했기 때문입니다. 아쉽지만 Key West는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했습니다.(결국 11년이 지나서야 그 결심을


지켜 '키. 웨스트’에 갔다 왔습니다.) 버스는 다시 북으로 달려


갑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 절경의 해수욕장이 있는 바닷가를


요리저리 다니면서 보여주었습니다. '잭슨. 빌’을 지난 버스가


미국의 남부 해안을 끼고 달리기 시작했고요. 맥시코 만을


따라가는 경치는 그 또한 독특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버스는


뉴올리언즈 도심으로 들어가는 초입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얘기는 들어서 조금은 알고 있었습니다만(루이지에나'주는 과거


흑인노예들이 많았고 그 결과 유색인 비율이 상당히 높고 또


프랑스인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유럽 느낌이 드는 곳


이라는 겁니다.) 다른 도시들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도심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오전 10시경


이었는데도 거리의 분위기는 왠지 좀 느슨해 보였습니다. 남부라


그런지 아니면 유럽분위기라 그런지 아니면 유색인들의 천성이


그런 건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전차!'(탱크가 아니라


위로 전기 줄에 연결하고 궤도를 따라 가는 그 전차 말입니다.)가


다니고 있더라고요. (한국에는 1960년대 말에 사라진 전차가 이 곳


미국에는 80년대 중반인데도 씽씽 달리고 있는 게 신기 했습니다.


(또 한 미국에서 본 것 중 신기한 것은 '트롤리. 버스’ 였습니다.


위는 전차와 같은 데 아래는 고무바퀴가 달려 있다는 거죠.)


근데 그 전차가 샌프란시스코와 마찬가지로 훌륭한 관광상품


이었습니다. 옆면엔 하나같이 'Desire' 라고 써 붙였더라 구요.


그제서야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아! 여기가 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Streetcar named Desire)'라는 희곡의 무대가 되었던


'뉴우. 올리언즈’구나. 그러고 보니 길가 노점상이나 기념품가게의


진열장마다 전차모양의 장난감을 팔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작가가 '테네시. 윌리암즈’인가요?

 


점심을 먹고 나니 몸이 으슬으슬한 게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영하와 영상의 기온 차를 극복하지 못했나 봅니다. 아무래도 조짐이


좋지 않았습니다. 결단을 내렸습니다. 휴스턴엘 갔다가는 뉴욕으로


돌아가기가 힘들 것 같아 휴스턴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락엔롤'의 고향이라는 '내시빌'에 잠시 내렸습니다. 버스정류장


근처의 가게마다 '엘비스'의 천지 였습니다. 그 카우보이 같은 옷

 

모자, 구두, 레코드 판 등등 엘비스를 모르면 살 수가 없을 것 같은


곳이 '내시빌'이었습니다. 커피 점에 들어가도 엘비스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버스 대합실에도 'For everything that's part of you'


라는 노래가 잔잔히 흐르더라고요. 다시 버스를 타고 북으로


올랐습니다. '버지니아'주 인가를 지날 때 였습니다. 점심을


먹으라고 어떤 쇼핑몰에 차를 세웠는데 얼른 햄버거 하나 먹고


여기저기 구경을 하였습니다. 근데 가게 유리창 마다
담배!


한 갑에 65센트, 한 보루에 $6.00' 이라고 커다랗게 써 붙여


놓았더라 구요. 그 때는 내가 담배를 피울 때고, 뉴욕에서는


한 갑에 $1.25 할 때 였습니다. 눈이 번쩍 뛰더라고요. 좋아하는


브랜드(True Blue 100 였습니다.) 한 보루를 샀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담배 주산지라 세금이 없다는 군요. 그래서 다른 주


세금만큼 담배가 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버스 속에서 밤을 지내며 뉴욕 맨하탄 42가 버스 터미널에


도착 했습니다.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메인 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일단 여행을 끝낼 것인가'


하는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미국의 동북부 끝에 발자취를 남겨


보겠다는 생각은 간절했습니다만 계속 갔다가는 몸이 견디지


못할 것 같아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메시지'가 하나 달랑 있었는데 '백 승현' 선배가


전화를 했었다는 겁니다. 일리노이에서 정치학을 했는데 '박사'


과정으로 진학하면서 '루이지에나' 주립대학으로 옮겼다는


겁니다. 이 무슨 황당한 얘깁니까. '베턴.루지'에 있는 루이지에나


주립 대학은 내가 몇 일전에 지나온 '뉴우올리언즈'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일주일만 일찍 전화를


했으면 얼굴도 보고 또 기력도 회복해서 '휴스턴', '메인 주' 모두


갔다 올 수 있었는데......


하늘의 뜻이 이번 여행은 조금만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꼬박 24시간을 내쳐 잤습니다. 밥도 안 먹고요...
2010/01/02 14:45 2010/01/0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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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 타고 동서 대륙횡단 하기***

1983년 여름 방학이 되었습니다. 좀 빨리 끝내보려고 여름학기

한 과목을 하고 남은 기간(약 2달 남짓)중 1개월 반을 친구인

'박 재기'군이 운영하는 신발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받은

수고료 중 일부를 가지고 LA에 갔다 오기로 했습니다.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미국이 얼마나 넓은 지를 눈으로

확인해 보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N.Y.--L.A. 왕복표를 끊으면

버스가 가는 중간에 내려 놀다가 며칠 후에 다시 타도 된다는

말에 여기저기 있는 친구들도 한번(한 두 명 이지만요) 만나보기

위해 버스를 선택 했습니다. 당시 아마 편도가 $99 이어서

$200 을 주고 왕복표를 샀죠. 버스는 'Grey Hound'와 쌍벽을

이루는 'Trail Way'(빨간 버스 입니다.)를 선택 했습니다.

'버스여행'의 좋은 점은 이런 게 있지요. 미국처럼 넓은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버스여행이나 번갈아 운전할 사람이 둘 이상이면 자동차 여행을

적극 권장 합니다. 좋기야 자동차 여행이 최고지요. 가보고 싶은

곳 코 앞까지 차로 갈 수 있으니까요.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일정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죠.

,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Rent, 휘발유, 아무래도 많이

쉬어야 하니 모텔 비용이 더 든다는 거죠.) 그리고 운전자 여유가

있어야 하는 데 피로할 때 운전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 큰

단점이죠. 혼자서 자동차여행 (?)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만류하고 싶습니다. (사고 위험이 높습니다.)

버스여행은 그 다음이죠. 시간에 다소 구애를 받고(버스시간),

버스노선을 따라가야만 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비행기, 목적지가 한곳 이라면 단연 비행기가 최고 입니다.

빨리 원하는 곳에 가고 거기서 차를 빌려서 다니면 되죠. 그러나

가고 싶은 곳이 여러 곳이고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다면 비용이

엄청 듭니다. 옛날에는 NWA 같은 곳에서 서울--뉴욕 왕복표를

사면 그 다음부터 오가는 길목 공항에서 다른 곳으로 갔다 오려면

$50 추가요금만 내면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런 요금제가

최고였죠.

 

기차여행, 버스와 마찬가지의 장. 단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버스보다 조금 더 편안하다는 겁니다. 좌석도 넓고 차도 덜

흔들리고 속도도 빠르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버스여행의 즐거움은 주변 경치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달리는 버스 속에서 잠을 잘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건 낯뿐만 아니라 밤에도 쉬지 않고 버스는

달리므로(미국) 숙박비 절약을 위해 절경이 없는 지역으로 지날

때는 일부러 밤을 택해서 버스에 오르면 버스는 달리고 승객은

자고...... 이런 즐거움도 있습니다.


, 미국의 전국 망 버스(제가 알기로는 Grey Hound 와 Trail Way

두 회사가 있습니다.)는 N.Y.-- L.A. 같은 경우 한 30분 마다

한대씩 출발을 하는데(물론 정류장은 조금씩 다름니다. 시카고를

거쳐가는 게 있는가 하면 워싱턴을 경유해서 LA 가는 것 등으로

구별되나 이런 긴 노선은 적어도 2시간에 한번은 다음버스가 있고

뉴욕--엘 에이 표를 가진 사람은 어떤 지점에서 내려서 놀다가

그 다음 버스를 타도 되고 한 이틀 후에 타도 됩니다. (유효기간이

있지만 그게 꽤 깁니다.)

그리고 버스여행의 백미(?), 정류장이 대부분 도심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노선 중간에 있는 도시는 대부분을 한번

구경하고 가니 이 또한 공짜구경 아닙니까? 고속도로를

달리다가도 대도시 정류장에 가면 도심으로 들어가 한 바퀴 돌고

나오니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구경은 잘 합니다.

 

1983년 8월 어느 날 약 10일 예정(얼마나 걸릴지 몰라서)으로

뉴저지 洲 저지시티 Smith Street 10 번지
(제가 살던 곳 주소 입니다.)를 떠났습니다.

발걸음도 가볍게...... 어깨에는 요즘의 Note-Book PC 가방 2개를

붙여놓은 것만한 밤색 가방 하나 걸쳐 메고 Path Train을 타려고

'저널스퀘어' 역을 향해 갔습니다. 패스 트레인으로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는(Ground Zero) World Trade Center 역으로

가서(아, 그 역은 더 좋게 꾸며져 있고 패스 트레인도 여전히

쌩쌩 달리고 있었습니다. 2004년 6월 확인) E Train 으로 갈아타고


맨하탄 42가에 있는 Port Authority(맨하탄 종합 버스터미널)로

갔습니다. (거기엔 지금도 작동하고 있는 커다란 네모상자 안에서

주먹만한 구슬이 길을 따라 움직이면서 주위의 쇠붙이를 치면

오묘한 소리가 나는 '작품'이 여행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미리 사 놓은 표를

보여주고 L.A. 행 버스 탑승구로 갔습니다. "이 빨간 버스가 나를

1차 숙박지인 '인디아나. 폴리스’까지 데려다 줄 것인가......"하면서
 
버스에 올랐습니다. 나 같은 여행객을 제외하면 보통 버스를 타는

사람은 좀 서민 들이죠. 그래서 더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기도
 
합니다. 한 3분의 2쯤 승객이 타고 시간이 되자 버스는 움직이기
 
시작 했습니다. 터미널과 거의 붙어있는 '링컨. 터널’을 빠져

나오는데 한 15분이 족히 걸렸습니다. '이렇게 가다가 L.A. 에는

언제 도착하나......' 하는 우려를 씻어 주려는 듯이 N.J. Turnpike에
 
올라선 빨간 버스는 화살처럼 달리기 시작 했습니다. 창밖 경치를

보면서 Newark Int'l Airport 를 지났나 싶었는데 버스는 어느새

필라델피아 도심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옛날 200년 전

미국의 선조들이 이 도시에 모여 '자유의 종'을 치면서 독립을

선언하던 유서 깊은 '필라델피아'가 버스의 첫 정류장 이었습니다.

그 땅을 안 밟아 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잠시 내려서 기지개를

한번 펴고 다시 버스에 탔습니다.


버스는 쉬지 않고 달립니다. 주요 도시의 정거장 정차를 위해

고속도로를 벗어나 도심으로 들어갔다가 승객을 갈아 태우고는

다시 고속도로를 쌩 하면서 달려 갑니다. (미국의 고속도로는

남부에서 동서로 올라가면서 10번, 20번,... 90번까지 있고,

남북으로도 5번(서쪽 끝), 15번 등으로 있고 동쪽의 95번까지

번호가 붙은 주요 고속도로가 있지요 그리고 비껴가는 지선이나

곁다리 고속도로는 또 다른 번호를 붙여 놓았더라 구요.

Long Island 를 가로 지르는 495번, 그리고 뉴욕 주 북부를

가로 지르는 290번, 또 뉴욕 동부를 세로로 달리는 87번,

88번 도로 등으로 말입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끼니 때우라고 대형 쇼핑몰 같은 곳에 차를

세우고 운전수가 안내를 합니다. 30분 있다가 혹은 1시간 있다가

차가 떠납니다. 하고선 승객 수를 세어놓죠. 그러면 승객들은

여러 개의 식당(맥도날드도 있고 TGI Friday 같은 곳도 있고요,

재수 좋으면 중국집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때는 'Chicken-

noodle soup'(닭고기 우동쯤 되나요?)도 맛볼 수 있습니다.)

중에서 한 곳을 찾아 들어가서 한 끼를 때우고 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이 시간에 보통 '운전수 교대'가 이루어 지더라구요.

처음에 밥을 먹고 버스에 다시 올랐는데 내릴 때는 흑인 기사

였는데 다시 타니 백인 아저씨가 기사 석에 앉아있어 차를 잘 못

탔나? 하고 두리번 거리기도 했습니다. 다시 내려 버스 앞을

보니 분명히 Los Angeles 라고 쓰여있고 주위에 빨간 버스는

한대 뿐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탔습니다만 다음부터는

'아 ! 기사 교대 했구나 !' 하곤 그대로 여유를 부렸습니다.

뉴욕에서 엘. 에이 까지 기사를 8명을 갈아치우면서 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밤이 되었습니다. 캄캄한 어둠을 뚫고(참 모두 깜깜했던 것은

아닙니다. 고속도로 가로등이 있는 곳이 대부분 이었으니까요.)

버스는 달리는데... 잠을 자기 위해 의자를 뒤로 졌혔습니다.

그러나 잠은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이 때 두 가지를 후회

했습니다. 두꺼운 소설책(왜 공항이나 바닷가에 가면

한 400페이지쯤 되는 '페이퍼. 북’을 보는 분들 있지 않습니까?

주로 추리소설이나 로맨스 소설 같은 것 말입니다. 요즘(2004년)

한 10달러 정도 합디다.)을 준비 못한 것 하고 베개를 준비 못한

것 입니다. 오후 4시경에 버스를 타는 아주머니가 베개를 들고

타길래 속으로 '참, 웃긴다. 버스를 타면서 무슨 베개를 들고

탄 담???' 했는데 밤이 깊어지니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베개를

들고 탄 그 아주머니는 아주 편안하게 잠을 주무시는데 이 몸은

흔들리는 차 속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면서 자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쉬지 않고 달린 버스가 '인디아나. 폴리스’에 도착 했습니다.

정류장을 나와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니 반가운 얼굴이

보였습니다. '이 제윤'군 입니다. 학생 때 '총 학생회'를 같이 한

인연으로 알고 지냈는데 인디아나에 유학을 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물어 물어 알아낸 전화번호로 미리 전화를 해 두었는데

정말 환 하게 웃으면서 나타났는데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세계에서 한 대 밖에 없는 '딱정벌레'차를 타고 '불루밍턴'으로

갔습니다.('세상에서 한 대 밖에 없는 차'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이랬습니다. 물론 그 시기에 그 '폭스.바겐'은 일시적인 단종 품

이었고(그때는 '레비트'인가 '골프'인가 하는 것을 생산할 때 였고

그 후 소비자의 요청으로 다시 그 '딱정벌레'를 생산하지만요.)

그래서 그 차 자체가 귀할 뿐 더러 외양에 아주 희한한 색깔로

칠을 해 두어(노랑색 과 검정색으로 얼룩덜룩 칠해 놓았습니다.)

멀리서도 '이 제윤이 차'라고 확실하게 알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 입니다. 한 시간 남짓 가니 인디아나 주립 대학이 있는

소도시 블루밍턴에 도착 했습니다. 미국의 지방에 있는 대학

도시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조용하고 넓고....

저녁을 먹은 후 옛 날 학생회 일을 할 때 '학생처'에 근무하시던

'허 윤'선생님(이 분도 그 당시 유학 온 상태 였습니다.)께서

오셔서 맥주를 마시며 옛 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다음날 다시 블루밍턴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인디아나

폴리스로 갔습니다. 버스 시간이 좀 남아 있어서 시내구경을 했죠.

중심가에 높은 탑이 있었고 돈을 냈는지 기억에는 없습니다만

그 꼭대기에 올라가 시내구경도 했습니다. 그 탑이 있는 광장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진짜 예수님이 아니라 외양이 '聖畵'에서
 
보던 예수님과 너무나 닮아 예수님이 환생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 친구와 한 10분 이런저런 얘길 나누고(무슨 의사가 제대로

통했겠습니까? 나는 말을 배우고 그 친구는 좀 어눌하고 해서

서로 '이런 말 이리라......'고 추측하면서 얘길 하는 거죠.)다시

터미널로 가서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본래 뉴욕서 탄 버스는 북쪽 루트를 따라 가는 것이었는 데 버스를

갈아타는 바람에 남쪽으로 가는 버스가 되어버린 겁니다. 차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미국 대륙을 가로지르며 달려 갔습니다.


저녁 무렵에 '콜로라도'주 의 '아스팬' 이라는 곳에 도착 했습니다.
 
스키장으로 유명하다는 곳인 줄은 알았지만 그때만 해도 스키를
 
어떻게 타는 지를 몰라 '재미있겠다...'정도 였지만 눈도 없는

8월 말 이었지만 밤의 경치는 그만 이었습니다. 그 경치 위에

눈을 뿌려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옴직한

멋진 풍경이 머릿속에서 전개 되었습니다. '내 스키를 배우고

언젠가는 가족과 함께 와서 저 꼭대기서 스키를 지치며 내려

오리라!' 라고 속으로 외치는 게 고작 이었습니다. 버스는 다시

남서쪽으로 달려 갔습니다. 버스 속에서 또 한밤을 세웠습니다.
 
흑인 한 명이 카세트 테이프 장치가 된 라디오-요즘 데스크 탑 PC의

본체 반만한 것 이었습니다. -을 들고 탔습니다. (1980년대 그 당시

흑인들 사이에선 그 커다란 라디오를 들고 다니는 게 아주 유행

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이런 우스개 도 있었으니까요.

"보통 사람이 죽으면 관을 운구하는 데 8명이 필요한데 흑인이

죽으면 아홉 명이 있어야 되는 데 그 이유는? 하면 8명은 관을

들고 한 명은 카세트 라디오를 들고 가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그 양반이 무슨 코미디 프로그램을 듣는지(버스 안에서는

금연이며 라디오를 켜서 소리를 낼 수 없고 밤에는 떠들어도

안 되는 규정이 있습니다만 웃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가 보죠?)

연방 깔깔대고 웃어대는 바람에 잠을 설쳤습니다.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오후 4시경

Flag Staff 라는 곳에 차가 잠시 정차 했습니다. 화장실 볼 일 보고

정류장 벽을 보니 '그랜드.케년' 포스터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저 걸 놓치면 이번 여행은 꽝이다!'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 갔습니다. 부리나케 차에 올라 내 가방을 들고 다시

내렸습니다. 그때부터 숙소를 정하기 위해 주위를 어슬렁 거리기

시작 했습니다. 모텔 또는 호텔도 찾아야 했지만 저녁 먹을 곳도

찾아야 했습니다. 겨우 허름한 모텔을 정하고 다시 나와 식당을

찾았습니다. 그 많던 맥도날드, 버거킹은 어디로 갔는지 M 이나

B 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미국 식당을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중급 정도의 식당에 들어 갔습니다. 소 도시라

그런지 내부는 수수 했습니다. 메뉴를 부탁해서 하나하나 읽기

시작 했습니다. 그 때 그 식당 종업원도 저를 보고 한심하다고

했을 겁니다. 시골에 동양녀석이 하나 나타나 메뉴를 샅샅이 보고

있으니 '저게 뭘 시키려고 저리도 자세히 보나????' 했겠죠.

"Roast beef please ." 다른 건 아무리 봐도 맛을 알 수 없고

그 옛날 중학교 때 영어시간에 '불고기'를 'Roast beef'라고 말한

어떤 선생님의 말씀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Roast beef'라고 가져온 게 어떤 건지 아십니까?

저는 한국의 불고기는 아닐지라도 구운 고기에 양념이라도

조금 된 것을 기대 했습니다. 그런데 접시 위에 얹혀있는 고기는

잘게 썰어 삶아 논 수육 같은 것이었고 감자 으깬 것 과 함께

나왔더군요. 그 날 밤 체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고맙게

생각하며 잠들었습니다. "Roast Beef!!!" 지금도 말만 들어도
닭살이 돋습니다.


다음날 그랜드 케년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관광지라

그런지 운전수 아저씨도 가이더 다 되어 있었습니다. 그랜드.

케년에 대해 대강 설명 하더니 운전석 앞의 거울을 보며 한 명씩

지명을 하더라고요. "어디서 왔니?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니?"

등으로 승객의 기분을 돋구어 주더라고요. 인도사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부부,.... 한국에서 온 이 몸까지 모두 7개국

국민이 그 버스를 타고 그랜드케년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관광지 안에 셔틀버스가 다닐 정도로 웅장한 규모 시시각각

태양의 위치에 따라 변하는 계곡의 색상 등은 여기서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절경을 깎아 내릴 것 같아 생략 합니다. '계곡 아래

콜로라도 강까지 갔다 오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4시간에

걸친 그랜드 케년 답사를 마치고 다시 '플래그 스태프'에서

엘. 에이 행 버스를 탔습니다. 그리고 또 한밤 버스에서 잤습니다.

아침 녘에 버스는 '샌.버나디노'라는 곳에서 잠시 섰습니다.

잊지 못할 일이 벌어진 곳도 여기 였습니다.

처음엔 그냥 잠시 쉬는 곳이라 버스에 있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한 3분쯤 있으려니 화장실이 나를 불렀습니다.

여기서 출발하면 L.A. 까지는 논 스톱으로 가는데 버스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렸죠. 당연히 버스기사가 나를 본 줄 알았죠.

그러나 최대한 빨리 큰 일을 보고 나왔는데 아뿔싸......

버스는 이미 정류장을 떠나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쫓아 갔지만 그 성능 좋은 버스를 잡는다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내 분신이랄 수 있는 가방이 버스 속에 있는데......' 거기엔

여권, 옷가지 또 여행경비 $1,400 이 들어 있는데...... 헐레벌떡
 
다시 매표소로 돌아왔죠. 그리고 맘 좋아 보이는 할머니가 있는
 
카운터로 갔습니다. 정확하게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에 없어
모르나 내 영어를 배운 이후로 그토록 빨리 영어로 말해본 적은
 
前無後無 합니다. 아무튼 "방금 떠난 버스를 내가 타야 했는데
 
화장실에 갔다 오니 떠나버렸다. 거기 내 가방이 있는데

여권과 여행경비가 들어 있다. 어떡하면 좋겠냐.

도와주세요." 문법에 맞았는지 여부는 고사하고 발음이

제대로 되었는지도 모르나 그 할머니 대답이 "Don't worry.

I will Help you." 였습니다. ‘아! 일단 의미는 통했구나.' 하고 안심을

했죠.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좀 천천히

이번에는 발음에도 신경을 쓰고 문법도 한번 생각해 보고 하면서

설명을 했습니다. "내 가방은 이만하고 색깔은 밤색이고......버스
 
운전수 쪽 앞에서 세 번째 선반에 있다. 그 속에는 여권이 있어

그걸 못 찾으면 내가 굉장히 어려움을 겪게 된다." 고 슬픈 표정을

지어가며 얘기했더니 그 할머니 빙그레 웃으시더니 "너, 참

다행이다. 그 버스는 엘. 에이 까지 논. 스톱으로 간다. 그래서

너는 걱정 없이 찾을 수 있을 거다. 내가 지금 엘. 에이 사무소에

전화를 할 테니 잠깐 기다려라." 그러고는 전화를 해서 내가

얘기한 가방 얘기를 하고는 제게 그러는 겁니다. 엘. 에이

터미널에 내려 표 파는 곳 왼편에 창구가 하나 있는데 Mike를

찾아가라. 그러면 니 가방을 줄 거다. 여권이 거기 있다니
 
너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너는 한 30분 후에

다음 버스를 타고 가라."하면 친절을 베풀더군요.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한 그 할머니가 천사처럼 보이더라니까 요.
(간사함이란...)


안심 半, 걱정 半 하면서 엘에이로 들어가는 프리웨이 위로

버스는 달렸습니다. 웬 차가 그리도 많은지 아마 편도5차선쯤

되어 보이는 길에 차들이 끝이 없이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었

습니다. 그런 길에서 '숏.팬츠'를 입은 예쁜 여자가 한쪽 다리를

창문턱에 걸친 채 운전을 하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Auto'자동차를 잘 모르던 시절 '저러고도 운전이 될까?'

하는 것은 둘째이고 '뭘 좀 볼까?' 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지만 안 보이더라고요. 그때부터 가방은 뒷전이고 지나가는

자동차의 운전수 보느라 정신을 빼다보니 버스는 어느새 L.A.에

도착했습니다. 물어 물어 Mike 를 찾으니 탁자아래에서

내 가방을 꺼내서 "이거냐?"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가방을 열고
 
"여권 어디 있니?" 하기에 위치를 알려주고, 그걸 보고 저를

확인하더니 가방을 내 주더라고요. 저는 가방을 받자마자

(물에 빠진 놈 구해주면 보따리 내 놓으라 한다고) 감춰둔

돈부터 꺼내서 세어 보았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 돈이

모자란들 내가 누구에게 돈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처음부터 없었다. 버스에서 누가 훔쳤겠지."
 
하면 할 말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랬더니 Mike 란 녀석 눈이
 
휘둥그래 지면서 "그렇게 많은 돈이 있는 줄 알았으면

좀 빼는 걸 그랬다." 고 농담을 하더라고요.

이렇게 난리를 치며 대륙횡단을 했습니다.


'로스.안젤리스'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만만하게 본 '올림픽.블러바드'(여긴 한인 타운이라고 해서

한식 한끼 해결하려고 전신주에 걸린 표지만 보고 걸었는데

8월의 땡볕아래 한 30분쯤을 걸어서야 한글 간판이 보이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고도 한참을 가서 '세종회관' 이라는 한식을

하는 식당이 나왔습니다. 메뉴고 뭐고 따질 틈이 없었습니다.

그냥 들어갔죠. 종업원이 가져다 주는 냉수 맛은 아직도 잊지를

못합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곳이 다음날 만나기로 한 친구네

집에서 운영하는 식당 이었죠.) 한 4일만에 한식을 한끼 먹었죠.

음식을 가리지 않는 편인데도 이때 불고기 맛은 죽여 주었습니다.
 

"야, 제발 '디즈니.랜드'는 혼자 갔다 와라 난 10번도 넘게 갔다

왔다." 라는 친구의 부탁을 무시할 수 없어 혼자서 '디즈니.랜드'

라는 놀이동산을 찾아 갔습니다. 액센트가 "디" 자에 있다는 걸

확실하게 해준 날 이었습니다. '그냥 우리가 흔히 하듯이

"디즈니.랜드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냐 ?"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What? Where?" 였습니다. 세 번을 얘기해도 못 알아

듣기에 글로 썼죠. 그랬더니 '디'자에 액센트를 주면서 "오,

디즈니.랜드!" 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아마 460번 인가를 타라고

하더군요. 그게'아나하임'에 가며 거기서 내리면 금방 찾는다고

합디다. 나이 스물아홉에 간 놀이동산에서 그렇게 즐거워 본

적도 없고, 가족들과 함께 못온게 그렇게 후회되기는 처음

이었습니다. 거기서 "이 다음에 반드시 가족 모두와 함께 꼭

오리라."라고 결심했는데 12년 후에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중간에 내리지 않고 운전기사를 8명을 갈아치우고

버스 한대를 교체해서(같은 노선에 정비를 위해 버스만 교체)

3일 넘도록 달렸습니다. 곧은 고속도로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굽이굽이 절경을 따라 돌아가는 버스의

차창에 어린 풍경들은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멋진

것이었습니다. 밤에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버스의 앞창

멀리 오색 창연한 불빛이 보였습니다. 그곳을 보고 달리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부풀게 하는 '라스.베가스'의 불빛 이었습니다.

본래 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카지노엔 갈 생각도 없이 버스에 앉아

있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버스가 도착하자 기사양반 왈

30분간 정차 하겠답니다. 그 시간 동안 뭘 합니까? 버스에서

내렸죠. 버스 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카지노 호텔 한 곳만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라스베가스에서는 그리 유명한 호텔이 아닌 것 같았는데도

그 규모나 시설은 '아틀랜틱.씨티'를 압도했습니다. 우선 도박장

내부가 엄청 넓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릅디다.
 
'아틀랜틱 씨티'의 고객은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없어 보이고

또 무엇에 쫓기는 사람들처럼 보였는데 이곳 '라스베가스' 고객은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표정이 '돈을 따야지!'하는

얼굴이 아니라 ‘즐기자!' 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음료수를 서빙하는 아가씨들도 훨씬 이쁘더라구요. 한 10분

구경하다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오는데 '역시 라스베가스'

였습니다. 버스 정류장 한쪽 구석에 '슬럿머신' 5대가 놓여있고

그 중 3대에는 이미 고객이 서서 손잡이를 열심히 당기고

있었습니다. 손이 저절로 주머니에 가더라고요. 손에 잡히는 게

5달러 짜리 지폐 한 장 이었습니다. '그래 버스 떠날 때까지 이것만

하자.'하고는 동전으로 바꾸어 당기기 시작 했습니다. 이때가

슬럿머신으로 제가 돈을 딴 유일한 경우 였을 겁니다. 이때도

아마 버스가 떠나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돈을 홀랑

잃었을 지도)모르죠. 버스기사가 차 떠난다는 방송을 하길래

후다닥 버스에 타고(지난번 샌.버나디노 같은 불상사가 없기를

바라며) 돈을 세어 보았습니다.(제법 동전 쏟아지는 소리를 몇 번

냈기 때문에) 3달러 75센트 땄더라 구요. 햄버거 한 개는 공짜로

먹을 만큼 땄습니다.


밤새 달린 버스에서 눈을 뜬 게 한 오전 9시경이었을 겁니다.

버스는 콜로라도 강을 끼고 굽이굽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기암 절벽이 줄줄이 이어진 곳, 사람 키보다 더

큰 선인장들이 늘어선 사막, 양쪽에 산을 끼고 그 사이로 흐르는
 
맑디맑은 콜로라도 강......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곳

입니다.


버스는 덴버, 오마하, 시카고 등을 거쳐 드디어 출발지인

뉴욕에 도착 하였습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그 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 오더군요. 만 하루를 잤습니다. 물론 짬짬이 밥은

먹었죠.

다시 한번 해 보고픈 대륙횡단 입니다.

2010/01/01 14:02 2010/01/0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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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투자 손실 키우는 10가지 실수

주식투자에 멋 모르고 발을 들여놨다가 뜨거운 맛을 본 초보

주식투자자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저지르는 실수가 몇 가지
있습니다.

다음은 증권교육방송 ‘스탁스토리’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샤라포바(필명)가 제시한 초보주식투자자들의 10가지 실수를

제목만 소개 합니다.

 

1. 비싸게 산다.

 

2. 정보를 너무 믿는다.

 

3. 로스컷이 없다.

 

4. 비중조절을 할 줄 모른다.

 

5. 자기만의 종목 선정 기준이 없다.

 

6. 너무 공부를 안 한다.

 

7. 통계적 확률보다 순간적인 감정에 의지한다.

 

8. 적정 수익 실현을 못한다.

 

9. 우량주는 안전하다고 믿는다.

 

10. 절대적인 비법, 기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2010/01/01 13:28 2010/01/01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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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庚寅年 새해가 밝아 옵니다.

2010년 庚寅年은 ‘흰 호랑이(白虎)’ 띠 라고 합니다.

 

예로부터 상서로운 동물로 여기던 ‘호랑이’,

그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흰 호랑이 해’라고 하니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도 행복과 건강이 함께하기를

기원 합니다.

 

2010년을 맞이하며…

2010/01/01 04:54 2010/01/01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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