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눈 오는 풍경)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흰 눈이 소담스럽게 내리고 있다.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아침 운동을 하는지 몇몇 사람이 개천을 따라 나 있는 산책로를 지나고 있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는 생각에 미소가 떠오른다.

오늘이 올해 들어 첫눈은 아니지만, 지난번 첫눈 오던 날 친구들과 일본여행 중이어서 못 봤으니 내게는 오늘이 첫눈이라 해도 괜찮겠다.

 

봄가을이 사라진 듯 그렇게 뜨겁던 여름이 지나자 곱게 물든 단풍을 잠시 감상하는 사이 차가운 겨울을 느끼게 되었다.

가을이 되면 입으려고 준비했던 코트를 입어보기도 전에 두꺼운 외투를 꺼내야만 했다.

 

이렇게 겨울이 찾아오면 먼저 생각나는 건 첫눈이다.

어릴 적 엄마가 고운 색의 털실로 무늬를 넣어 짜 주셨던 끈 달린 벙어리장갑으로 아무리 차가운 눈을 만져도 손 시리지 않던 따스함이 생각나고 온통 하얗게 변한 눈 세상에서 눈사람을 만들며 깔깔댔던 그 시절 동무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겨울 풍경은 따뜻하다.

젊어 한때 짧은 미니스커트에 부츠를 신고 춥다고 벌벌 떨면서도 펄펄 날리는 흰 눈을 맞으면서 즐거웠으니 눈은 기분 좋은 존재임이 확실하다.

 

또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첫눈은 첫사랑을 생각나게 해준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증명하듯 안타깝게 헤어졌던 그 사람,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련하게 추억에 젖게도 한다.

 

좋은 사람과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은 지켜지든 말든 매우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는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종종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약속한 장소가 어긋나 헤어지는 친구도 여럿이었다.

그러면 자주 다니던 다방을 찾아 애타게 메모판을 확인해 보기도 했다.

당시는 서로의 연락을 다방 메모판에 메모지를 곱게 접어 끼워 놓고 소식을 전하곤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울 시내에 육교가 거의 없어졌지만 언젠가 좋아하는 친구와 평창동의 육교를 오르며 설레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그때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육교 계단에 쌓인 흰 눈은 참 깨끗해 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친구와 한 움큼씩 집어 입에 넣으며 마주 웃었던 추억이 생각난다.

지금 그 친구는 먼 여행을 떠나 다시는 만나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에 별일 아니었어도 그날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나를 아프게 한다. 그때의 눈 맛은 아주 시원하고 사르르 녹았다.

 

더 어린 시절에 장독대의 항아리 뚜껑마다 소복이 쌓인 눈을 맛보는 건 겨울의 특권이었다.

동생들과 함께 하얀 설탕 가루처럼 보였던 흰 눈을 입에 넣었는데 맛도 달콤하지 않았을까?

요즘 같은 시대엔 미세먼지나 중금속 등으로 눈의 맛을 본다는 건 생각도 못 할 일이어서 애석하고 어린 시절이 더욱 그리워진다.

 

흰 눈이 이렇게 즐겁고 좋기만 한 건 아니다.

눈이 내리면 보이는 풍경마다 멋진 한 폭의 동양화가 된다. 펑펑 내리는 창밖의 경치가 멋지지만 이내 저 눈이 녹아서 질척해지고 도로가 지저분해질 텐데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긴다.

한때는 나도 예민한 감수성으로 무척 감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는 동안 그만 투박하고 억센 여자가 되어버린 듯 깨끗한 눈 세상에서 질퍽한 길로 변하는 게 싫은 감정이 무딘 아낙네가 되어버렸다.

 

예쁜 상상의 나래를 멈추게 하는 사라져버린 감성이 안타깝다.

그래도 나에게 흰 눈은 달콤하고 사각거리는 빙수의 맛으로 남아있으니 그나마 감정이 아주 피폐해 버리진 않은 것 같아 안심이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또 하얀 은세계를 기다린다.

1970-01-01 09:00 2018-12-1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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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거리라는 하라주쿠에 갔다. 가이드의 말로 이곳의 크레페가 그렇게 맛있다고 한다.

크레페 가게가 밀집된 곳에 가니 관광객인 듯 많은 사람이 길게 줄을 서서 크레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유난히 줄이 긴 크레페 가게가 있어 우리도 그쪽에 줄을 섰다.

나는 음식점이나 과자 하나를 사도 꼭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집으로 몰리는지 군중의 심리를 모르겠다.

옆집은 텅텅 비었어도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가게로 사람들은 줄을 서고 기다린다.

얼마나 더 맛있는지 몰라도 빨리빨리 가 몸에 밴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친구들 의견을 따랐다.

500엔짜리 크레페를 하나씩 들고 재밌었지만, 맛은 별로다. 왜 그렇게 줄까지 서며 사 먹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여행 온 사람들이 일본을 느껴보는 즐거움이 있을 거라고 이해했다.

많은 인파에 쓸려 다니며 우리 명동을 떠올렸다. 내 마음의 고향 명동이 훨씬 멋지다는 생각도 했다.

 

한곳의 면세품 가게를 거쳐 라멘 박물관에 갔다.

일본은 관광 상품을 참 잘 만들어내는 것 같다. 지하 3층의 어스레한 곳에 미음 자로 라멘 가게를 만들었다. 옛 유흥가와 상점을 재현한 듯 60년대나 볼 수 있는 간판으로 매우 독특한 분위기였다.

입장료까지 받는 이곳에 들어와 보니 온 관광객이 여기에 다 몰린 듯 사람들이 각 라멘가게 앞에 장사진을 쳤다.

       (도쿄 라멘박물관, 내가 맛 본 라멘 가게)

도쿄라멘이 맛있기로 유명하지만, 족히 이삼십 분은 기다려야 하는데 나에게는 인내심 테스트하는 것처럼 힘들었다.

그래도 일본에 왔으니 명물 라멘 먹어보자며 줄을 서서 이삼십 분 기다린 후에 라멘 한 그릇 맛볼 수 있었다. 가격은 900엔, 라멘 값치곤 좀 비싸다. 맛은? 개인차에 따라 다르겠지만 느끼해서 내 입맛은 아니었다. 역시 우리 라면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전통 결혼식 풍경)

메이지 신궁에 갔다. 이곳은 우리에게 그리 달가운 장소는 아니다.

일본의 근대화에 영향이 컸던 메이지 일왕과 소헌 황태후를 모신 곳으로 메이지 일왕은 조선침략과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했다.

그들에게는 영웅이어도 우리에게는 침략자라는 역사적 인물이어서 메이지 신궁에 별 감흥은 없었지만, 경내에서 일본 전통혼례식을 본 건 즐거웠다.

전통 의상의 신랑 신부와 주례가 앞장서고 양복을 갖춰 입은 하객이 줄지어 따라가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이곳도 기모노를 차려입은 아이들이 복을 기원하러 찾기로 유명하다고 하는데 실제로 예쁘게 치장한 아이들이 많았다.

    (일본 속 차이나타운 )

다음은 항구도시인 요코하마로 이동했다. 일찍 문호개방과 함께 외국문물을 받아들여 국제적인 분위기로 발전했다는데 어릴 때부터 들었던 애절한 목소리의 여가수가 부른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멜로디가 흥얼거려졌다.

일본 개항 때 요코하마에 정착한 유럽인들이 중국인 통역을 데려오면서 형성되었다는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지금은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음식거리가 되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휩쓸릴 정도로 인파가 넘쳤고 각종 음식과 과자가 눈길을 끌었다.

우리도 과자점에서 월병과 중국 과자를 샀다.

축제장처럼 머리 위로 길게 펼쳐진 황금색 용이 모두를 반겨주는 듯하다.

이제 일본 속의 차이나타운 방문을 마지막으로 나리타공항으로 출발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즐거웠던 여행이 떠올라 기분이 좋다. 여행도 기운 있어야 다닐 수 있으니 우리 시니어도 더 나이 들기 전에 여행 많이 다니면 좋겠다.

좋은 친구들이 있어 행복한 도쿄여행이었다.

1970-01-01 09:00 2018-12-1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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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지만 깔끔한 호텔 빌라 폰테인)

굿모닝~ 숙면 후의 기분이 상쾌하다.

7시부터 조식 뷔페 문을 연다니 부지런히 세수와 단장을 마치고 일 층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자유여행 날이다. 마음껏 좋아하는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으니 아침은 간단히 먹기로 했다.

정갈하게 차려진 메뉴는 수프와 빵, 주스, 각종 샐러드와 커피 정도였다.

 

간단한 아침 메뉴를 보니 몇 년 전 후쿠오카여행이 생각났다.

그땐 큰 호텔에 묵었는데 아침 뷔페가 대단했다.

내가 매우 좋아하는 오도리(생새우)가 잔뜩 있어서 실컷 오도리 회를 먹었고 다른 메뉴도 우리나라 일류 뷔페만큼 화려했었다.

 

저녁엔 대게를 먹으러 갔는데 1시간 30분 동안 얼마든지 리필할 수 있었다.

사이드메뉴도 훌륭했지만 우리는 대게만 엄청나게 먹었다. 정말 맛있고 푸짐했던 후쿠오카의 대게가 잊히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오늘은 조촐한 아침을 마치고 우리끼리 거리로 나왔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전철이 있었다. 우리는 먼저 900엔짜리 온종일 쓸 수 있는 일일 승차권을 샀다.

여기서도 친구들의 일본어 실력이 발휘되어 불편 없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미리 검색했던 대로 도야쓰 라는 시장에 가기로 했다. 원래 쯔키지 시장이 어시장으로 유명한데 도야쓰로 옮겼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요즘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구 시장과 신 시장으로 나뉘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일본은 아무 문제 없이 어시장이 이전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도야쓰 시장가는 길이 아주 한가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거리의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오늘이 일본의 노동절이라 도야쓰 시장이 모두 문을 닫았다고 한다.

아이쿠-도야쓰에서 싱싱한 생선 초밥을 먹으려 했는데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쯔키지 시장은 여전히 성업 중이니 그쪽으로 가보라 해서 다시 오던 길을 되짚어갔다.

 

찾아가는 길에 친절한 일본 아줌마를 만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좋은 여행 하라는 덕담도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가는 길모퉁이에 붕어빵 가게가 있었다. 유명한 곳인지 줄을 서서 사람들이 붕어빵을 사고 있다.

우리도 안으로 들어가 붕어빵 한 개씩 사 먹었다. 우리나라는 세 개에 천 원인데 여기는 한 마리에 1.500원이었다. 바삭하고 달콤한 팥이 맛있었다.

           (맛있는 초밥 집 앞 마네킹 아저씨)

쯔키지 시장이 가까워져 오자 풍성한 시장풍경이 펼쳐졌다. 사람도 많고 골목골목마다 생선과 해산물 가게가 즐비하고 초밥집이 잔뜩 있다.

TV에서 보았던 참치 해체 식도 있어 사람들 사이로 잠시 구경도 했다.

여기도 역시 길게 줄을 선 초밥집이 많았다.

넉넉한 모습의 마네킹이 웃고 있는 초밥집에도 긴 줄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들 이 집이 유명하다고 말해주었다.

잠시 망설이자 문 앞의 아저씨가 “마싰서, 마싰서”하며 우리를 유혹했다.

줄 섰다가 먹은 생선 초밥은 그 맛을 표현할 수 없다.

마구로 초밥, 운이 알 초밥, 각종 생선 초밥 등 너무 맛있어서 이번 여행의 진수를 맛보았다.

        (맛있는 초밥에 행복하다)

시장 구경을 마치고 긴자에 갔다.

명품매장이 즐비한 긴자거리는 오늘 마침 노동절이라 차 없는 거리였다.

불가리, 샤넬 등 독특한 건물이 늘어서 있는 긴자거리를 내 세상인 듯 누비고 다녔고 테이크아웃한 뜨거운 커피 한 잔도 마음을 설레게 했다.

   (와규는 비쌌지만 맛있었다. )

우에노 공원도 찾아보면서 일일 승차권을 참 알뜰하게 잘 이용했다.

저녁은 호텔 근처 와규 집에 갔다. 와규는 정말 비쌌지만 맛있게 잘 먹었다.

오늘 하루는 참 멋지고 맛있게 지냈다.

1970-01-01 09:00 2018-12-10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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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나리타 공항)

대학 동창 삼총사가 일주일 사이 결정하고 갑자기 떠나게 된 일본여행이었다.

초등학생이 된 손자를 돌보게 된 친구는 항상 시간에 쫓겨서 모임도 그 친구 동네에서 하곤 했는데 이번에 손자가 학교 행사로 여행을 가기 때문에 내 친구는 꿀 같은 휴가를 얻었다며 우리도 그날을 이용해 어딘가 다녀오자고 의기투합했다.

 

2박 3일이지만 알차게 지낼 수 있도록 오전 8시 출발에 돌아오는 날은 오후 8시 일본 출발인 상품을 골랐다.

몇 년 전 홍콩 여행 때는 오후 출발이어서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갔고 돌아오는 날은 오전이어서 인천공항에 점심때쯤 돌아와서 시간이 매우 아쉬웠으므로 이번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

 

두 친구는 아직도 일본어 공부를 계속하고 있어 웬만큼 말이 통하니 자유여행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항공권이나 숙소 문제를 편리하게 하려면 여행사 패키지를 따라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둘째 날 하루는 자유 시간을 갖는 상품을 택했다.

 

어쨌든 좋은 친구들과 어딘가로 떠난다는 건 매우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출발하는 날 오전 6시 10분까지 공항에 모이라고 했다. 아침잠 많은 나는 비상사태에 대비해 알람을 두 개나 켰다.

새벽 4시 50분 첫 공항리무진버스를 타야 해서 힘들었지만, 시간 맞춰 나오는 길이 즐거웠고 끌고 가는 캐리어의 바퀴소리가 경쾌한 음악처럼 들렸다.

 

드디어 출발! 가이드와 우리 삼총사를 포함 21명이 여행을 시작했다.

신혼부부도 있고 연인 커플, 모녀, 아빠와 아들, 수원시향 음악 하는 분들과 일행이 되었다.

그리 싼 가격이라고는 생각이 안 드는데 저가 항공사라 기내식이 없다더니 정말 주스 한 잔 없이 생수 한 컵만 제공되어서 우스웠다.

우리는 이번 여행을 스시 먹방 쪽에 목적을 두었으므로 내일을 기약하자고 결의했다.

 

두 시간 좀 넘게 걸려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다.

점심으로 일본 가정식 음식점에 갔다. 영양솥 밥에 버섯 된장국이 나왔다. 반찬은 4가지로 정갈했지만, 너무 조금이다. 그러나 김치 한 그릇도 요금을 내야 해서 모자란 대로 그냥 먹었다.

식사 후 30분쯤 걸려 찾은 곳은 나리타 신쇼지 고찰이다.

 

                            (1000년 역사의 신쇼지 고찰)

절까지 이어진 양쪽 길가에는 예쁜 가게가 늘어서 있어 관광지임을 알게 해준다.

커다란 둥근 장식물이 걸린 절 정문부터 일본의 정취가 물씬 느껴졌다.

신쇼지 절은 940년 창건된 사찰로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다.

나리타 치바현 사람들은 이곳을 정신적인 고향으로 생각하는 만큼 관광객과 일본인의 방문이 많은 절이라고 한다.

이곳은 세계 2차 대전 때 진주만 공습을 감행한 일본에 대응해 미국이 폭탄을 투하한 곳이다.

신쇼지 절은 상당한 규모였는데 깔끔한 모습의 건물은 폭격에 맞아 새로 지었고 고풍스러운 모습의 고찰은 폭탄을 피해 1000년을 지켜낸 모습이다.

          (예쁘게 치장하고 복을 기원하러 온 남매)

특히 예쁘게 기모노를 차려입은 아이들이 눈에 띄었는데 이 절은 3살 남짓 남자아이와 7살이 넘지 않은 여자아이들이 기모노로 장식하고 복을 빌러 찾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눈매가 꼭 닮은 예쁜 남매가 있어 친구가 유창한 일어로 부모에게 허락받고 사진도 한 장 남겼다. 열심히 일어 공부한 보람이 있다고 즐거워했다.

 

오후엔 도쿄에 하나뿐이라는 오다이바 온천에 갔다.

찜질방과 같은 형식으로 도쿄 밤도깨비 여행 온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시간이 촉박하다며 간단히 족욕과 식사를 하든지 온천을 하든지 선택하라는데 우리 삼총사는 물론 온천을 택해 매끈매끈 온천을 즐겼다.

        ( 자유의 여신상과 금문교를 똑같이 만들어 놓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환하게 불 밝힌 도쿄타워가 보였다, 건너편에는 자유의 여신상과 금문교가 빛나고 있다.

일본은 모방의 천재라더니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 금문교를 똑같이 만들어 놓았다.

온천 후라 민낯이어서 고민됐지만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을 수 없어 깜깜한 밤중에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찍고는 한참을 웃었다.

 

숙소인 호텔 빌라 폰테인 우에노에 도착했다. 3인실이 없어 12만 원을 더 내고 방 두 개를 썼다.

크진 않지만 깔끔하고 안락했다.

내일의 자유여행을 기대하며 도쿄여행의 첫날을 보냈다. (2편에 계속)

1970-01-01 09:00 2018-12-1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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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중 외줄에서 세 명이 자전거를 타는 묘기)

서커스라는 단어는 나에게 어쩐지 애잔한 그리움과 아련한 슬픔을 생각나게 한다.

천방지축 선머슴아처럼 동네 친구들과 뛰놀며 자랐던 대전 인동의 어린 시절, 동네의 개천 변 다리 밑에는 심심치 않게 약장수 극단이나 작은 규모의 서커스단이 무대를 만들었다.

약장수의 쇼는 인동다리 밑 어디서든 구경할 수 있었지만 작은 텐트라도 친 서커스단이 오면 텐트 뒤편 천막을 들치고 들어갈 수 있는 개구멍을 찾아낸 동네 오빠들을 따라 마음을 졸이며 몰래 입장하기도 했었다.

 

내용은 다 생각나지는 않지만, 약장수 악단은 슬픈 이야기인 듯 사람들이 훌쩍거렸고 기억나는 서커스는 동물들이 공연에 나왔는데 익살스러운 그들의 모습이 내겐 왠지 슬픔으로 각인된 정도여서 서커스를 그리 좋아할 순 없었다.

그 후에도 곡예사의 슬픈 사랑 이야기나 열악하다는 그들의 사정 등을 들어서인지 서커스를 유쾌하게 받아들이진 못했다.

 

몇 년 전 어른이 되어서는 처음으로 태양의 서커스 ‘퀴담’을 관람했다.

너무 재미있어서 작년인가 했는데 벌써 3년 전이다.

아들과 둘이 가서 보았던 ‘퀴담’은 너무나 놀라웠고 이제까지 가졌던 서커스단의 비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다닌다는 뾰족지붕의 빅탑이라 부르는 공연장 모습도 동화 나라 같고 산뜻했으며 각종 공중묘기뿐 아니라 관객과 소통하며 펼치는 서커스는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특히 ‘퀴담’ 편은 우리나라 공연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재공연은 없다니 의미도 컸다.

곡예사의 모습이 애잔해 보이지도 않았고 멋지고 유쾌해서 내가 알고 있던 우리나라의 서커스가 매우 안타깝다고 느껴졌다.

 (잠실 종합운동장 서커스 쿠자 공연장 앞에서)

12월 첫 일요일 아들이 친구와 같이 가라며 ‘쿠자’ 티켓을 두 장 보내왔다.

‘퀴담’에서 즐거웠으므로 기분 좋게 잠실 종합운동장 서커스공연장을 찾았다.

나는 이제 ‘퀴담’과 ‘쿠자’ 두 번째 관람이지만 태양의 서커스는 시리즈가 매우 많았다.

아들이 보내는 티켓은 항상 VIP 석이어서 무심코 그쪽으로 들어가려다 보니 이번엔 SR 석이었다.

‘퀴담’ 때도 느꼈던 거지만 VIP 석은 공연자와 더 많은 소통을 할 수 있는 맨 앞자리이다.

SR 석도 17만 원이나 하니 그쪽은 엄청 더 비쌀 것이다.

그래도 원형의 서커스장은 어디에서든 잘 보이게 되어있고 공연자들이 심심치 않게 무대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사진도 같이 찍어 소외감은 덜했다.

 

1부 60분과 인터미션 30분, 그리고 2부 60분으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인터미션이 30분인 건 다음 공연의 무대를 설치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일 것이다.

서커스의 특성상 안전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겠다.

 

2007년 4월 초연된 이후 전 세계 19개국 관객을 열광시킨 ‘쿠자’는 태양의 서커스 중 최장기간 투어 기간을 갱신하고 있는 작품으로 초기 태양의 서커스 정신과 본질로 회귀한 작품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쿠자’는 인간의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최고 난이도의 화려함과 유연함을 공연예술로 승화하고 있다는데 정말 놀라운 인체의 신비를 보여주었다.

‘컨토션’이라는 아크로바틱, 세 명의 몸이 얽히고 사람의 몸이 어떻게 저리 꺾이고 유연할 수 있는지 경이로웠다.서커스의 정석 공중곡예와 외줄 타기, 높이 쌓은 의자 위에서 펼치는 묘기 등 아슬아슬한 장면이 한순간도 놓칠 수 없게 시선을 끌었고 라이브로 연주하는 드럼의 경쾌한 음향도 신나고 멋있었다.

‘퀴담’에서 보여주었던 로켓포 쏘는 묘기 등은 생략되어 아쉬웠는데 서커스 본질의 회기라는 점에서 이해가 되었다.

 

정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해서 즐겁게 관람했다.

우리나라 사람도 재주라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텐데 우리의 서커스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점에 마음이 아프다.

우리에게도 명맥을 이어오는 ‘동춘서커스’가 있다.

지난여름 아들네와 대부도로 놀러 갔다 오는 길에 허름한 동춘서커스 공연장을 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도 재주가 비상한데 왜 태양의 서커스만큼 크지를 못하는 걸까? 안타깝다.

우리의 서커스도 외국으로 공연 가서 찬사를 받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1970-01-01 09:00 2018-12-05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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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왈츠의 기본자세 연습중. -사진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에서 가져옴-)

 

댄스스포츠 중 '차차차'와 '왈츠'를 체험할 기회가 생겼다.

시니어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잡지사에서 이전에 댄스를 배운 적 없는 체험자를 모집한다는 공지를 보고 망설임 없이 응모했다.

나는 그야말로 스텝과 박자를 못 맞추는 몸치이다. 그러면서도 재빨리 신청했던 건 몸치이긴 하나 춤추는 모습을 정말로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삼 년 전 MBC에 '댄싱 위드 더 스타'라는 프로그램으로 댄스 열풍이 분 적이 있다. 밤 11시에 시작하니 많은 사람이 시청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한 회도 빠지지 않고 즐겨 감상하며 황홀함에 빠졌었다.

여러 팀이 출전해서 경연을 벌이고 한 팀씩 탈락하며 댄스의 강자를 뽑는 방식이었다.

각각 팀마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종류가 다른 춤을 선보였는데 멋진 의상에 아름다운 몸의 움직임을 보며 내가 그 주인공이 된 듯 대리만족을 흠뻑 느껴보았다.

 

우리 세대는 어릴 때부터 영화나 소설을 통해 자유부인의 탈선도 댄스를 하면서 생겼고 많은 주부가 춤바람이 나서 가정을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에 댄스는 배워서도, 추어서도 안 되는 퇴폐적인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고정관념처럼 박혀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댄스스포츠에 너무나 큰 매력을 느끼니 격세지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댄스는 아니어도 젊은 시절 유행하던 고고나 디스코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대학 시절 네 개의 단과인 경제과, 경영학과, 무역학과, 정치외교학과가 함께 교양과목 수업을 듣는 시간이 있었다.

체육 시간에 강당에 모인 우리는 시험과목으로 지르박 스탭을 배웠다.

어쨌든 박자에 맞춰 밟아야 했던 지르박은 모두들 엉망이어서 서로 바라보며 웃기 바빴는데 너무 못 따라 하니까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교수님이 각 과에서 요즘 유행인 디스코 출 사람 무대 위로 올라가라고 하셨다.

친구들이 밀어서 우리 과 대표로 내가 무대에 섰다.

지르박 스탭은 못했지만, 음악에 맞춰 신나게 디스코를 춰서 박수를 받았으니 그렇게 몸치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격식에 맞춰 추는 댄스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아 여태 배우지 못했다.

 

댄스는 안 좋다는 생각을 했지만 영화나 매스컴을 통해 보게 된 댄스의 세계는 너무나 아름답고 멋졌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본 탱고는 너무 아름다워 마음까지 시리게 했고 넓은 홀에서 멋진 의상을 입고 빙글빙글 도는 왈츠도 내 마음을 빼앗았다.

유혹하듯 관능적인 모습의 끈적이는 룸바도 매력적이다.

날씬한 예쁜 여자가 추는 춤도 아름답지만, 몸매에 상관없이 뚱뚱한 아줌마가 추는 탱고도 정말 멋지고 보기 좋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도 춤을 배워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기회가 왔다. 짧은 시간이지만 기초인 스탭만 익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강남의 댄스스포츠 아카데미에서 프로 댄스스포츠 강사님의 설명으로 남자 지원자분과의 댄스 수업이 시작되었다.

사면 벽이 모두 거울로 된 무도장은 매우 넓었고 환한 조명으로 깨끗한 분위기였다.

 

댄스스포츠는 남녀가 짝을 이루어 음악에 맞춰 다양한 춤을 추는 스포츠로 19세기 초 영국 상류층 사람들의 사교모임에서 추던 볼룸댄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댄스 스포츠에는 왈츠, 탱고, 퀵스텝, 폭스트롯, 비엔나왈츠 등 다섯 종목이 속한 모던댄스와 룸바, 차차차, 삼바, 자이브, 파소도블레 등 다섯 종목이 속한 라틴 아메리칸 댄스로 나뉜다.

 

댄스와는 달리 댄스스포츠는 많은 운동량과 고도의 수련이 필요하다. 국제경기 정규종목 외의 댄스스포츠로 살사와 메렝게, 스윙 폴카 등 도 있다.

직접 해보지는 않았어도 모두 선수들이 추는 모습으로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종목들이다.

 (댄스스포츠는 예절이 필수. -사진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에서 가져옴-)

 

실제로 실습해 보니 댄스스포츠는 매우 힘들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어렵지 않게 서로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데 고개를 빳빳이 들고 팔을 고정한 채 하는 동작은 진땀이 주룩 흐를 정도로 어려웠다.

그래도 전문가의 설명대로 남자지원자분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다른 손은 위로 올린 채 빙글빙글 몇 바퀴 돌게 되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기회가 되어 댄스스포츠 실력을 더 진전시킬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폼은 엉성했어도 왈츠 음악에 맞춰 서로의 발을 밟는 실수를 연발하며 넓은 플로어를 몇 바퀴 돌았던 기분은 즐겁게 남았다.

흥겨운 음악과 함께 하는 댄스스포츠는 기본 스텝만 익히면 시니어에게도 즐거운 운동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지금도 ‘차차차’ 음악의 멜로디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아 저절로 몸이 흔들어진다.

신나고 즐거운 댄스스포츠 체험을 했다. 

1970-01-01 09:00 2018-10-03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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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7월과 9월에 내는 재산세가 있다. 가진 부동산의 토지와 건물에 각각 세금이 부과되는데 나처럼 작은 아파트는 그리 크지 않은 금액이라 그나마 괜찮지만, 아들이 사는 30평대 아파트는 30여만 원이 넘는 금액이 두 달 사이로 부과되어 고지서를 본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또한 누구나 균등하게 부과되는 주민세가 8월에 있으니 7, 8, 9월은 이래저래 세금을 내야만 하는 달이다.

 

예전에는 집 안 관리를 내가 하지 않아서 세금이나 공과금조차도 신경 쓰지 않고 살았는데 이제는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해야만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연초의 자동차세부터 일 년간 세금으로 나가는 돈이 나로서는 매우 큰 액수다.

 

뉴스에서는 매번 집값이 오르고 있다는 보도를 하고 비싼 부동산에는 비싼 세금을 매기는 부자 증세 이야기가 끊임없이 쏟아진다.

돈 많이 버는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식한 소견으로도 어느 정도를 부자라고 하는 것인지 선을 긋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 애꿎은 서민까지 세금 폭탄을 맞는 건 아닐지 걱정된다.

 

매년 새해가 되면 거론되는 우리 서민의 생활과 직결인 버스요금이나 가스요금 등 공공요금이 오를 것이라는 뉴스와 저금리의 은행이자도 불만이고 팍팍한 살림살이가 걱정스러웠다.

이렇게 오르는 세금을 떠올리다 보니 외국 유럽 여러 나라의 세금에 관한 뉴스가 생각난다.

그중에서도 프랑스는 가장 세금을 많이 걷는 나라인 것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프랑스 배우 알랭 드롱을 좋아했다.

요즘이야 할아버지가 되었을 테지만 나이 든 중년의 모습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멋진 배우이다. 그런데 프랑스 배우인 알랭 드롱이 지금은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너무나 큰 세금에 불만을 품고 이웃 나라 벨기에로 이민을 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세금폭탄이기에 자신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어 준 조국 프랑스를 포기하고 다른 나라 사람이 된 것일까?

 

내가 젊은 시절 와이드 극장 화면에서 보았던 클로즈업 된 그의 우수에 젖은 눈을 절대 잊을 수 없다.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에서 야망에 불타는 살인자로 나왔음에도 그가 잡히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멋진 배우였다.

그렇게 프랑스 하면 생각나는 대표 배우도 세금 때문에 나라를 떠났다니 좀 안 좋은 생각이 든다.

 

몇 해 전 해외토픽을 통해서 들었는데 프랑스의 대표 배우인 제라르 드 빠르디유도 그 나라의 부자 증세를 피해서 옆 나라 벨기에로 이민을 한다고 했다.

‘마농의 샘’ 등 그 사람의 감명 깊은 영화를 많이 봐서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는 배우인데, 처음엔 참 그 세금이 얼마이기에 조국까지 배신하고 다른 나라로 가나. 프랑스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대배우가 애국심도 없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프랑스는 세금으로 수입의 75%를 내게 하는 법안을 냈다고 한다.

 

루이뷔통처럼 큰 프랑스기업들도 이미 다른 나라로 옮겨 갔다니, 프랑스의 세금 제도가 무섭긴 한가보다.

부자나 부자 기업들이 벨기에로 국적을 옮긴다는데, 벨기에 사람들은 세금 때문이 아니고 벨기에의 문화를 사랑할 사람들만 오게 하자며 이민자격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단다.

 

글쎄. 내 해당 사항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세계적인 배우들의 상황이니 흥미를 갖고 지켜보았다.

세금 때문에 조국을 떠난다는 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의 행동으로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기만 하다.

대한민국 서민인 나는 우리나라를 사랑한다. 그러니 내가 큰 부자라 해도 세금 때문에 나라를 떠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내야 하는 세금을 따져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1970-01-01 09:00 2018-10-02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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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추억을 담고 있는 한계령 휴게소)

여름 휴가시즌이다. 유난히 무더운 올해 여름은 피서라는 단어가 매우 절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올 휴가에 설악산에 펜션을 예약했다며 같이 가자고 아들이 전화했다.

이젠 손녀 손자가 제법 자라서 저희끼리 놀러 가도 될 텐데 엄마를 생각해주는 아들이 있어 나는 참 행복하다.

딸만 있는 친한 친구인 삼총사에게 얘기하면 눈치도 없이 따라나선다며 타박할 게 분명하지만, 재빨리 가겠다고 대답했다.

 

여행준비를 시작했는데 뭐 딱히 할 것이 없다.

예전엔 밑반찬이나 음식을 미리 준비해 갔지만, 요즘은 무엇이든 간편하게 살 수 있고 음식은 현지 특산으로 사 먹으면 되어 손이 편해졌다.

그저 복용하던 약과 화장품, 칫솔, 옷 정도만 챙기면 되었다.

얼마 전 새로 산 레이스 달린 흰 블라우스도 챙겼고 물놀이에 대비해 탱크톱과 짧은 바지도 잊지 않았다.

 

동해안 바다와 설악산은 아들이 어릴 때 여름이면 꼭 가는 여행지였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 온갖 피서 용품과 야영할 준비물, 음식을 잔뜩 싣고 아들과 세 식구가 떠나는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이 행복했다.

 

인제 원통을 지나 한계령과 미시령 가는 길의 갈림길 휴게소에서 어느 길을 택할지 의논하는 것도 즐거운 고민이었다.

나는 한계령 고갯길을 좋아했다. 가수 양희은의 저 산은 내게 어서 오라 손짓한다는 노래도 좋아했고 한계령 정상의 휴게소도 좋아했다.

아이가 다섯 살 무렵 한계령 휴게소 바깥 베란다에서 산을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이 아주 마음에 들어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바다로 가기 위한 길로 한계령 정상을 지나 내려가는 길은 잊지 못할 예쁜 젊은 시절의 추억으로 가득하다.

그 옛날 남편이 했던 것처럼 아들은 나를 위해 한계령을 지나 바다로 갔다.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오다 보니 어린 아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놀던 한옥 민박집도 그대로 있고 물레방아 휴게소도 그 모습대로여서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바람불이 계곡은 아련한 추억에 잠기게 했다. 바람불이 계곡은 텐트를 치고 하루를 보냈던 야영장이었는데 지금은 바람불이 펜션이 되어 이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다섯 살짜리 꼬마와 아빠가 텐트를 치고 가져간 간이 테이블에 파라솔을 꽂고 나는 음식을 만들었다.

바로 옆 계곡에선 콸콸 세차게 물이 흘렀고 아빠와 아들은 닭백숙을 시켜 평상에 앉아 맛있게 먹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관리소 툇마루 아래엔 그물이 쳐있고 그 속에 뱀이 우글거려 정말 깜짝 놀랐는데 아마 주인아저씨가 땅꾼 직업도 갖고 있었나 보다.

뱀이 불쌍하기도 하고 소름 끼치기도 했던 기억으로 남았다.

 

밤하늘의 별이 쏟아질 듯 반짝이는 모습을 보며 세 식구는 행복하고 즐겁게 지냈는데 이제 30년이 지난 지금 같은 길을 아들 며느리 손녀 손자와 지나고 있으니 어쩐지 애틋한 마음에 가슴이 아프다.

 (맑고 깨끗한 설악산 계곡의 시냇물에 발을 담그니 신선이 부럽지 않다.)

휴가 첫날은 바다에서 보냈고 다음 날은 설악산 계곡을 찾았다. 북적대는 계곡이 아닌 어느 가족과 우리 가족만 오붓하게 차지한 깨끗한 쉼터였다.

아이들이 튜브 타고 놀 정도의 웅덩이가 있고 햇빛에 반사되어 금빛으로 반짝이는 흐르는 물이 정말 깨끗하고 시원했다.

투명하고 맑은 물에 파라솔을 치고 물속에 의자를 놓고 앉아 신난다고 꺅꺅대는 손녀 손자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신선놀음이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고 자연에 취해 보는 건 나의 로망이었는데 아들이 이루어주었다.

 

아직도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지만 이번 설악 계곡 금빛 물결의 시원함을 떠올리며 내 생애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다.

1970-01-01 09:00 2018-08-21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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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여 년 전 일이다.

컴퓨터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을 때인데 아들이 군대에 입대하고 나니 아들의 빈방에 덩그렇게 컴퓨터가 남았다.

조심조심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세상을 알아가는 데 점점 흥미가 생기고 재미있어졌다.

 

특별히 내가 원한 게 아닌데도 아침에 눈을 떠 컴퓨터를 켜면 온갖 소식이 담긴 새 메일이 하나 가득 있었다.

광고성이나 보험 등 필요 없는 메일도 있었지만, 막 시작한 인터넷으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친구들과 소통하는 건 매우 즐겁고 자신이 좀 업그레이드된 것 같은 기분에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어느 날 메일 한 통이 눈을 끌었다.

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다며 50대 이상 시니어 모여라! 는 문자였다.

안내대로 접속해 보니 유어스테이지라는 시니어 포털 사이트로 좋은 내용이 많았고 특히 일상생활의 지혜나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써 보내면 채택된 글에는 원고료도 나온다고 했다.

 

적은 금액이지만 내가 글을 쓰고 원고료를 받는다는 것도 즐거웠고 그보다 더 큰 기쁨은 많은 사람이 보는 인터넷 화면에 나의 글이 나온다는 점이었다.

그때부터 글쓰기는 내 취미가 되었다.

 

학창시절 누구나 문학 소년이나 문학소녀를 꿈꾸어 보았을 것이다.

나도 중. 고교 시절 교내 백일장에서 상도 몇 번 받았기 때문에 한때 문학의 길로 가야 하는지 얼치기 고민도 한 적 있지만 글쓰기가 만만치는 않아 일찌감치 포기했었는데 이 나이가 되어 본인 글을 표출할 수 있는 장이 있다는 게 기쁘고 감동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가입하고 글쓰기를 시작한 유어스테이지에서는 여러 가지 시니어에 필요한 강좌를 들을 기회를 주었다.

그곳에서 만난 여러 회원과의 교류는 이제까지 시니어로 살면서 활력을 주고 삶에 대한 열정을 갖게 했다.

 

라이프저널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자서전 쓰는 법과 남에게 가르칠 수 있는 교육도 받았다. 강사위촉장도 받았고 자신의 자서전을 한 권씩 갖게 되기도 했으니 나에게는 정말 행운이고 인생 2막의 화려한 시작의 계기가 되었다.

한번 시작한 일에는 열정을 다하는 성격인 나는 몇 년 전 누구보다 많은 글을 써서 회사로부터 나만의 글로 채워진 책을 선물 받기도 했다.

 

누군가는 글을 쓰려 해도 무엇을 써야 할 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우선 주변의 사물을 유심히 관찰하라는 조언을 해주고 싶다. 글을 쓰기 시작한 후부터는 어떤 상황도 글감이 되었다.

길을 가다가 재미있는 문구의 입간판을 보거나 현수막을 보고도 글감으로 삼았다.

예를 들면 식당 앞 '낮술 환영'이라는 입간판을 보고 저 집은 왜 낮부터 술을 마시라고 유혹하는 걸까? 장사가 잘 안되어 낮부터라도 술을 마시라고 부추기는지도 모르니 단골이 많이 생겨서 저 집이 좀 번창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글로 옮겼고, 동네 어귀 버스정류장에 걸린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지 말라는 현수막을 보고는 예전 평화의 상징이었던 비둘기인데 이제는 유해조류로 분류되어 더는 모이를 주지 말라니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비둘기의 배설물에 거리가 온통 지저분하니 안 그럴 수 없는 지자체의 고민도 느껴져 소감을 썼다.

 

이처럼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글감이 많으니 무엇을 쓸지에 대한 고민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글을 쓰는 데는 별 준비물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장점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희망과 마음가짐만 있으면 된다.

좀 더 발전한다면 글쓰기 동호회를 만들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다듬어 큰 돈 들지 않고도 책을 출판해 자신의 책을 가질 수 있다.

 

글쓰기의 좋은 점은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생각을 많이 하게 되니 자신을 돌아볼 기회도 많고 작은 일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내가 쓴 글을 읽고 여러분께서 소감을 남겨주시니 그 댓글을 읽으며 뿌듯한 자부심과 자기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건 글쓰기를 취미로 가져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장점이라는 생각이다.

 

서울 변두리 동네지만 살기 좋다는 우리 동네에 관한 글을 보고 꼭 한 번 와 보고 싶다는 분도 있었다.

그렇게 연락 온다면 기쁘게 맞아 안내해 주려 한다. 그렇게 새로운 친구도 만들어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니 글쓰기의 좋은 점이 될 것이다.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취미로 글쓰기에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글쓰기는 돈이 들거나 준비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글을 잘 쓰게 되면 원고료가 생기기도 하니 즐거운 일이다.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통찰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도 있으니 글쓰기는 좋은 취미임에 틀림없다.

1970-01-01 09:00 2018-06-2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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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풍과 솔향을 머금은 감자밭))

충남 서산시 초청으로 팔봉산 감자 캐기 축제에 다녀왔다.

여행사 대표와 블로그를 운영하는 3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감자 캐기 축제 참여는 매우 신나고 즐거운 행사였다.

지자체에서는 자신의 고장을 홍보하고 농산물 판매를 돕기 위해 이런 행사를 주최하고 있다.

 

감자 캐러 가는 날, 아침엔 조금 선선했지만, 일기예보에 의하면 한낮엔 매우 뜨거운 날이 될 것이라 한다.

하루의 일정으로 서울에서 두 시간쯤 걸려 먼저 서산 해미읍성을 찾았다.

파릇한 잔디가 깨끗한 해미읍성은 팔봉산 감자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고 많은 시민이 가족끼리 나와 산책도 하고 돗자리를 펴고 휴식을 취하는 풍경이 한가롭고 여유가 있어 보여 좋았다.

 

우리나라에는 3대 읍성이 있는데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전북 고창읍성, 그리고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이다.

모두 조선 시대 읍성으로 화려한 고궁과는 달리 민초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해미읍성에 도착해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니 가슴이 아파져 올 정도로 슬픈 역사를 가진 곳이었다.

            (슬픔을 간직한 감옥 앞 회화나무)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외국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천주교를 박해한 증언의 땅이 바로 이곳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많은 천주교인이 해미읍성 안에서 처형되었고 그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감옥 앞 커다란 회화나무에 천주교인들을 매달아 고문을 했다니 푸르른 모습의 회화나무는 그 아픔을 어찌 견뎠을까?

 

아픈 마음을 뒤로하고 일행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어느 음식 평론가가 죽기 전에 꼭 먹어봐야 할 음식으로 서산 영양 굴밥을 꼽았다고 한다.

굴이라면 생굴도 좋아하고 어리굴젓도 좋아하니 점심이 매우 행복했다.

찾아간 음식점 주인장도 친절해서 굴밥 맛있게 먹는 방법을 설명해주어 더욱 즐거운 점심을 즐길 수 있었다.

                   (죽기전에 맛 봐야 할 영양굴밥)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고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팔봉산 감자밭으로 감자를 캐러 출발했다.

서해 바다의 해풍과 팔봉산 솔향을 머금은 우수한 품질의 감자인 팔봉산 감자 축제는 올해 17회째 열리고 있으며 6월 23일, 24일 감자 캐기 행사가 있어 맛있는 팔봉산 감자를 캐는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축제 전에 미리 체험하는 영광을 갖게 된 것이다.

 

감자 캐기 행사 참여자는 직접 감자를 캔 후 5kg은 8000원, 10kg은 15000원에 사 올 수 있다니 가족끼리 친구끼리 누가 더 큰 감자를 캐는지 내기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맛있는 감자 캐러 많이들 오세요~)

일기예보대로 한낮의 태양이 매우 뜨거웠다. 이런 땡볕에서 감자를 어떻게 캘지 걱정이 앞섰지만 막상 감자밭에 들어서니 누구보다도 더 큰 감자를 캘 욕심으로 열심히 호미질을 하게 되었다.

참으로 신기하게 줄기를 뽑으니 땅속에 튼실한 감자가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큰 감자를 캤다고 탄성이 나왔는데 나에겐 그리 큰 감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찐 감자를 좋아하는 나는 먹기 좋은 크기의 감자를 열심히 캐 봉투에 담았다.

                              (포슬포슬 맛있는 감자)

5kg의 감자를 직접 캐서 가져와 늦은 시간인데도 감자를 쪘다.

포슬포슬 정말 맛있는 감자다.

이렇게 우리의 식탁에 오기까지 농부님들은 얼마나 수고가 많았을까? 땀 흘린 오늘 하루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우리 농산물을 많이 소비해서 조금이라도 그들의 노고에 보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맛있는 감자와 함께 소박한 행복을 느낀 하루였다.

 

1970-01-01 09:00 2018-06-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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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영기 2018-10-17 11:07 # 수정/삭제 답변달기 퍼머링크

    감자 축제 멋진 사진 생생정보..현장에 있는 기분이네요 감사하게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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